68화
-일이 이렇게 된 것엔 중간에 누군가의 개입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나에게 그만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그리 많지 않다.
좌르륵, 파노라마처럼 그가 사무실 앞에서 나와 실랑이를 벌이며 했던 말이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털어놓아도 괜찮을까?
아니, 일부라도 얘기를 해도 괜찮은 걸까?
그것에 관해 할 수만 있다면 리카르도와 단둘이 남아 의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리카르도의 말대로 황태자는 수상했다.
빌레드 홍차에 관한 거짓말부터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허니문의 방문. 그리고 갑작스러운 조사단장의 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 짚이는 데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였다.
“…여기에 직접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없는 거군요.”
나는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내 말을 들은 루체는 그제야 질문의 의도가 사건에 있음을 알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애스터도 내 시선을 살짝 피했다.
‘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그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이건 완전히 조사단에 놀러 온 사람으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나를 단장이라고 인정해주는 것까진 바라진 않았다. 그래도 같이 일하는 동료쯤으로는 생각해주었으면 했다.
이마에 힘줄이 돋는 게 느꼈지만 스스로를 다독였다.
‘참자, 참아. 이 일만 해결되면 영원히 볼 일도 없을 사람들인데.’
불쑥불쑥 치밀어오르는 화기에 나는 어서 리카르도가 오기를 바랐다. 그와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황제의 측근인 그는 아마 그 사건을 바로 곁에서 목격했을 터였다.
그의 보좌관인 펠릭스가 리카르도에게 건네 들은 이야기를 해주긴 했지만 무언가 빠진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3시간 정도 흘렀을까.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문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루체와 애스터도 소리를 들었는지 문 쪽에 흘긋흘긋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곧 시선을 돌려 일에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전체적으로 서류 분류에 윤곽이 잡힌 느낌이었다.
내 회사의 직원들에게 시켰다면 이틀 이상은 걸렸을 정보량이었다.
‘역시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다르긴 하네.’
가문이 아무리 특출나도 황궁에서 일하는 건 본인의 능력이었다. 특히나 이런 엄중한 사건을 맡는 데 배치되는 인력은 더욱 그랬다.
‘직원으로 고용하고 싶다!’
뜬금없이 몹쓸 욕심이 밀려왔다. 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문 앞에서 들리는 실랑이는 작아지기는커녕 점점 커졌다. 대화 소리도 뜨문뜨문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나랑 리카르도가 했던 이야기도 들린 건 아니겠지?’
아까 리카르도에게 내 정체를 들켰을 때만큼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잡은 펜을 미끄러트릴 만큼 손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창백히 굳어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문밖의 소란이 불쾌하다는 듯이.
“아까도 문밖에서 이런 소란이 있었나요?”
“부인께서 오시기 전의 말씀이라면, 회의실에서 태자 전하와 사건 개요를 살피는 중이었던지라 만약 소란이 있었더라도 못 들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애스터가 눈짓으로 가리킨 옆방을 보며 애써 굳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가 회의실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여기는 업무를 보는 공간이지 회의나 토론하는 곳으로는 부적절해 보였다.
“그렇군요.”
아까의 대화 때문인지 애스터의 대답이 조금 성의를 갖추었다.
‘휴.’
십 년 감수했네. 설마 이렇게 내 정체가 탄로 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물론 리카르도가 내 정체에 대해 그렇게 쉽게 알아낸 게 제일 충격적이었지만.’
일이 끝나면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알아낸 거냐고 꼭 추궁해야 했다.
아마 리카르도라면 아까 이 방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10분 넘게 문 앞에서 들리던 실랑이는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았다.
그녀를 말리는 남자와 그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여자.
“남자 목소리, 어딘가 낯익지 않아요?”
두 사람도 같은 사람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목소리는 황태자였다. 그를 10분 넘게 붙잡으며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마 황태자비인가?’
베로니카 황녀일 수도 있지만 왜인지 황태자비일 거라는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문을 열어 중재하는 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을 자처하는 것이다.
‘조용히, 못 들은 척하자.’
두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더 이상 소란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묵묵히 서류를 보았다. 좋은 흐름이었다.
하지만 바깥 상황은 그리 흐름이 좋지 않은 듯했다.
-벌컥!
‘설마 황태자가 진 거냐.’
예상대로 아네모네 향이 훅 풍겨왔다. 황태자비, 에테르나였다. 풍성하고 윤기가 흐르는 긴 금발 머리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물결쳤다. 붉은 눈동자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입단시켜 줘요.”
그녀의 등장에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당황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황태자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저렇게 난감한 낯을 하고 있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가 황태자비를 보는 시선은 철부지 말괄량이를 보는 것에 가까웠다.
“왜 대답이 없죠? 나는 안 돼요?”
“아…… 제가 그것을 마음대로 할 권한은 없답니다. 태자비 전하.”
부러 그 상황이 유감스럽다는 듯,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에테르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단장은 당신이잖아요.”
그녀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면전에 삿대질이라, 이건 또 새로운 경험이다.
“아무리 황실에서 만들어진 단체라도 단원에 관한 권한은 1차적으로 단장에게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표면상 그렇긴 하지만, 여기는 태자 전하의 직속 단체라서 제가 단원을 입단시킬 권한은 없답니다.”
“거짓말.”
황태자비의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힐난이 어린 뜨거운 시선이었다.
“그럼 리카르도 에르도안은 무슨 일이죠?”
“네?”
“에르도안 공작은 입단했잖아요.”
황태자비의 귀에 벌써 리카르도가 입단했다는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다. 불과 3시간 전의 일인데 이렇게 빨리 닿았다고?
“황가의 일원이 되기 위해선 이 정도쯤은 알아야죠.”
놀란 내 모습을 보고 황태자비의 입꼬리가 기세등등하게 올라갔다. 나는 날아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아 침착히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제가 에르도안 공작님을 추천한 건 맞지만 결과적으로 전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 나도 추천시켜 주면 되겠네. 방금 봤죠? 내 정보수집력도 나쁘지 않아요.”
‘그건 조금… 혹하네.’
황태자비는 자신이 내밀어야 할 카드를 잘 알고 잘 활용했다. 꽤 영리하고 명석한 머리를 가진 그녀는 정보수집력도 좋아 조사단으로 영입하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오게 된다면….
‘내가 이끄는 게 아니라 내가 황태자비한테 질질 끌려다니게 되는 거 아닐까.’
제일 큰 문제는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이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입단을 요청하는 부류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 이유가 바로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얽혀 있다면 그녀가 이 사건을 자신의 손으로 좌지우지하려고 할 것이기에, 그건 막아야 할 일이었다.
어떻게 거절할지 머리를 팽팽 굴리는데 그 순간,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문이 열려 있네.”
‘이 목소리.’
햇빛 아래에 있는 고양이처럼 나른하고 권태로운 듯한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적 있었다. 황태자비도 흠칫하며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에 나는 방문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금발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여자가 접힌 레이스 양산을 든 채 들어왔다.
“베로니카 황녀님?”
“……여기에 선객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나도 조금 바빠서. 실례할게.”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양산을 든 손으로 에테르나를 밀어냈다. 에테르나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베로니카 황녀는 그때처럼 여전히 묘한 박력과 위압감이 있었다.
“누님, 여기까지 무슨 일로 행차하셨나?”
농담하듯 던진 말과 다르게 황태자는 이러한 일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불쾌한 얼굴이었다.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니?”
그녀가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듯 말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럼 단장. 입단 신청서는?”
“그런 신청서는 없습니다.”
“내가 이 조사단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왜 하나같이 이 조사단에 들어오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달갑지 않은 상황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황태자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팔짱을 꼬며 흥미롭다는 듯 관전하고 있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태도였다. 짜증이 확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