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문득 한기가 느껴져 옆을 보니 단원들을 냉랭한 시선으로 보는 리카르도가 있었다.
그 시선을 받는 주인이 나인 것도 아니건만,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손이 움찔 떨렸다.
루체와 애스터는 이미 한참 전부터 얼어붙은 채 굳어 있었다. 위압감에 억눌린 공기는 싸늘하고 차가웠다.
첫날부터 이런 분위기라니.
‘정말 앞날이 캄캄하다…….’
호재는 없고 악재만 가득했다. 하지만 사건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조사단원과 초장부터 트러블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언제, 어디로 간 거죠?”
돌아온다면 적당히 주의만 줄 생각이었다.
사실 리카르도가 옆에 있는 순간, 적당히 주의를 준다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옆에서 이렇게 차갑게 바라보기만 해도 루체와 애스터의 낯은 창백히 질려 있으니 적당한 주의는 협박이 되고 말 것이다.
“레니에 후작령에 갔습니다.”
“레니에…….”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레니에 후작 가문을 찾아갔는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리카르도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루체와 애스터도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탐탁지 않은 듯한 시선이긴 했지만 내 의견을 기다리는 듯했다.
‘이거 만약 리카르도가 없었다면…….’
여러 부분에서 실랑이가 있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다른 단원을 신경 쓸 시간은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죠.”
나는 품에 넣어둔 노트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노트에는 어제 간밤에 머리를 쥐어짜 원작 내용을 떠올리며 적은 것들이 있었다.
노트에 적힌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독으로 쓰인 약초의 배합식.
책을 읽을 당시에 대충 넘기면서 본 부분인지라 생각나는 게 없어 북부에서만 나는 희귀한 약초로 만들어진다는 정보밖에 적지 못했다.
제일 중요한 건 바로 두 번째였다.
반란군의 행적.
지금으로선 두 달 안에 배합식을 알아내는 것보다 반란군을 붙잡아 문초를 받게 하는 것이 사건의 실마리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그들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어 필사적으로 원작을 떠올리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책을 읽은 지 오래되었기도 했거니와 유심히 읽은 부분도 아니었기에 금방 잊어버렸다. 하지만 행적을 알아내는 방법은 있었다.
바로 이곳의 정보력을 이용하는 것.
비록 황실이 이 독에 대한 건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반란군의 행적에 관한 단서는 하나쯤 갖고 있으리라.
“여태까지 조사한 자료들은 어디 있나요?”
“이쪽 책상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나는 애스터가 가리킨 책상에 다가가 깔끔하게 묶여 정리되어 있는 서류철을 살펴보았다. 옆에서 애스터는 ‘당신이 그걸 본다고 이해나 하겠나.’ 하는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욱하고 감정이 치밀었지만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은 아일라가 더 중요해.’
이런 사소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재판은 가까워질 것이었다.
제일 앞에 있던 서류에 적힌 글자를 본 나는 멈칫했다.
-아일라 레니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양 서류철을 집어 들고 그 안에 묶인 종이를 펼쳐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아일라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가정환경과 유년 시절에 대한 일도 적혀 있었다.
‘왜 이런 것까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런 내용도 사건에 필요한 건가요?”
“필요한 정보와 필요 없는 정보를 구분할 기준이 없어서 다 모으고 있어요.”
루체가 대답했다.
“그러면 일 처리가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아일라의 과거를 낱낱이 파헤치는 건 필요한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 좋지 않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런 식으로 조사를 하게 된다면, 두 달 뒤에 있는 재판까지 조사를 끝마칠 수 없을 거라는 것.
종이 한 장을 보고 모든 업무 체계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눈에 보였다.
특히나 문제가 있다면 더욱.
“필요한 정보와 필요 없는 정보는 내가 대강 분류할 테니까 옆에서 보고 그대로 해주면 돼요.”
나는 서류가 산처럼 쌓인 책상 앞에 앉아 눈짓했다. 루체는 머뭇거리며 내 옆에 앉았다. 애스터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 순순하게 따르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다시 리카르도의 위력을 절감했다.
“이 인원으론 턱도 없겠군. 인원을 보충하러 다녀오지.”
“네?”
돌연 리카르도가 나직이 말한 뒤, 사무실을 나갔다. 짐승을 포획하러 가는 듯한 사냥꾼 같은 기세였다.
‘어디서 인원을 보충한다는 건가.’
나는 그가 무얼 하러 간 건지 금방 깨달았다. 서류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레니에 후작령에 있던 사람들도 돌아오겠네요.”
“…….”
의아한 낯으로 그의 퇴장을 보던 두 사람은 내 말을 듣고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을지 뻔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허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빠르게 서류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레 해오던 일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거의 일평생을 책상머리에만 있었으니.’
반평생을 후계자로서 서류 일에만 파묻히고 그 후엔 중매 사업을 위해 인물 보고서만 읽었던 경험이 이 순간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체와 애스터의 시선이 달라졌다. 사업만 하던 사람이 황궁의 서류를 이리 쉽게 처리하는 것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양반이네.’
면전에서 비웃음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어제 조사단장으로 들어오라는 황태자의 제의에 잠깐 망설인 이유에는 이에 관한 일도 한몫했다.
‘텃세.’
어떤 집단이든 텃세를 부리는 이는 하나쯤 존재했다. 아니, 하나만 있으면 다행이다.
이렇게 출신도 좋고, 황궁에서 일하는 엘리트 과정을 밟은 이들은 더 하면 더 했지.
그걸 알기에 무시당할 걸 감안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중매 같은 사업자들을 괄시했다. 특히나 나처럼 작위를 돈으로 샀다면 무시의 강도는 심해졌다.
그래서 중매 일을 할 때 높으신 분이 예약을 잡은 날이면 더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심했다.
최악의 상황으로는 ‘너 같은 사람, 조사단장으로 인정 못 해!’라는 말을 듣는 일이다. 여기까지 상정했었는데 황태자의 입김 때문인지 리카르도의 존재 때문인지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일라는 회사에 있는 동안 괜찮았을까?’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면 그녀에게 동료들의 텃세는 없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기억창고에 넣어두었다.
회사를 임시로 휴업까지 했는데도 나는 쉴 틈이 없다니, 내 직원들이 새삼스레 부럽군.
사건이 중한 만큼 봐야 할 문서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걸 곧이곧대로 처리했다면 서류만 처리하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할애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 달로도 부족했을지도.
서류를 처리하던 나는 다시 한 번 멈칫했다.
서류에는 굵은 글씨체로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건 경위서>
나는 조심스레 그 서류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난 시작은 연회가 시작하고 2시간이 넘게 흘렀을 무렵.
역시나 내가 황태자와 의무실에 있었을 때였다.
대부분 사건은 엘렌이 말해준 대로 진행되었다. 공교롭게 황궁에서 데뷔탕트를 치르게 된 영애는 아일라 레니에, 그녀 혼자였고 그걸 기념하여 황제에게 축하주를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알던 사실과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분명 아일라가 그 축하주를 올리게 된 과정에 귀족들의 관여가 있었다고 들었었는데.’
그 중엔 레니에 후작 부인도 있다고 했었지.
그러나 그 사실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까부터 서류를 빠르게 처리하던 내가 한 부분에 멈추어 있는 게 이상했는지 루체가 물었다.
“이상한 점이 있나요?”
“두 분 다 황궁 연회에 참석했나요?”
내 기억상에 그들을 본 기억은 없었다.
황궁 연회에는 수많은 사람이 참석한다. 그중에 참여한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한다면 진작 배합법을 알아내 범인을 잡는 것도 가능했을 터였다.
“아니요.”
“참석 못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참석을 못 했다고요?”
안 한 것과 못 한 것의 의미 차이는 상당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황궁에서 일하는 귀족, 더군다나 이반스와 러셀 같은 명문가의 자식이 참석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 의문이 들었다. 눈치를 보아선 두 사람 다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똑같아 보였다.
“왜요?”
“일했습니다.”
애스터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루체는 지루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다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곤란한데.’
사건에 관해서도 이런 태도를 지속하는 건.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나는 입을 열었다. 외려 이걸 내버려 두면 더 시간을 낭비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내가 왜 이 질문을 하는 것 같아요?”
“…….”
이번엔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문 채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낯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부러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이 서류에는 몇 가지가…….”
“……?”
내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자 두 사람의 눈이 의아한 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과연 이걸 이 사람들에게 말해도 되는 걸까.
방금 리카르도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