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선택지는 명확했다.
이제 와서 ‘나는 모르는 일인데요?’라고 발뺌을 할 수는 없을뿐더러, 리카르도를 조사단을 넣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아일라를 위해서.
그가 들어감으로써 조사단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가 확연히 달라진다.
분명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리카르도가 왜?’
그가 왜 조사단에 들어가겠다고 하는지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단순히 짜증스레 내뱉은 내 말에 오기로 승낙한다는 건 그의 성격상 한참 동떨어지는 추측이었으며, 또한 리카르도가 아일라를 위해 조사단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이제 나도 알았다.
그렇다고 리카르도가 심심하다고 조사단에 들어갈 정도로 한가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 남은 이유는 딱 하나.’
순간 리카르도가 내 얼굴을 만지던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이걸 어쩜 좋아.’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면 아일라의 결혼 계약서를 거절했던 처음 상황부터 차례차례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힐끔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미온한 미소.
차라리 뭐라 말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네 대답을 듣겠다는 관조적인 반응이라 그게 더 날 두렵게 만들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조사단에 배제된 사람인, 리카르도를 다시 단원으로 추천하는 게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그 때문에 자연스레 황태자의 반응에 촉각을 세웠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맞아요, 제가 공작님께 조사단으로 들어오시라 했어요.”
“왜입니까?”
이유라면 만들 수 있지만 그걸 황태자가 받아들일지는 누구도 몰랐다.
“제가 조사단장이니까요. 물론 태자 전하께서 뽑으신 조사단원들도 훌륭한 인력이지만 저는 저와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해요.”
“조사단원들도 부인과 원만히 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저는 낙하산…….”
“낙하산?”
황태자는 생소한 말을 듣는다는 듯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심결에 나온 말버릇에 혀를 씹으며 수습했다.
“궁에서 일하지 않던 제가 갑자기 전하의 천거로 조사단장이 되면 단원들이 그리 좋은 시선으로 볼 것 같진 않아서요. 그래서 공작님을….”
나는 리카르도를 흘긋 보며 뜸을 들였다. 그러자 황태자는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에르도안 공작이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감히 부인께 뭐라 할 조사단원은 없겠지요. ”
“과연 이해가 빠르세요.”
놀라울 정도의 이해력이었다. 원작에서 그저 리카르도를 질시하는 멍청한 황태자라고 묘사된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애초에 그 사람과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여색을 밝힌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황제의 조카를 방패막이로 쓴다…… 역시 부인은 재밌는 사람입니다. 나조차 떠올리지도, 하지도 못할 발상이군요.”
이건 욕을 하는 건지 칭찬을 하는 건지.
나는 민망한 미소만 흘렸다. 그 방패막이를 뜻하는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뭐가 된단 말인가.
슬쩍 리카르도의 표정을 살폈으나 다행히 불쾌한 얼굴은 아니었다.
“상관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진실’이니까.”
황태자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진실’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이 들어간 말이었다.
‘범인이 누군지만 알아내면 된다는 건가.’
자연스레 사건을 떠올리며 황태자가 말하는 진실이 진범을 찾는 일이라고 추측했다. 맥락상 그렇게 해석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한 명 있었다.
아까부터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던 리카르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진실입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 사건에 관해서지.”
“…그렇습니까.”
리카르도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빛이었다. 황태자는 ‘또 저러는군.’ 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공, 매사에 신중을 기하고 의심하는 태도는 좋지만 과하면 안 하느니만 못해.”
“동시에 조사단에 필요한 인재죠.”
나는 그의 말에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 새가슴이라는 걸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미 심장은 내 의지를 반하고 벌렁거렸다.
긴장한 나를 보는 황태자의 눈빛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그렇군요. 뭐, 그런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과 달리 말투는 미묘했다.
이 사람이 나를 비웃는 건지 아닌 건지.
그와 대화하고 있자면 기분이 나쁠 듯 말 듯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 능숙한 사람이야.’
나는 그를 그렇게 정의 내렸다.
“그러면 이 저주받은 정원에서 그만 나가도록 할까요?”
황태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주받은 정원?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몇 차례 시신이 묻혔던 곳이다.”
“……여기가 묘지였나요?”
풋, 하고 어디선가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고 리카르도를 쳐다보았다. 그 또한 내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가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묘지… 묘지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군.”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냥 확실히 말해주면 뭐가 덧나는지. 다들 하나같이 모호하게 말을 돌리는 것이 선수였다.
“여긴 과거에 암투가 일어났던 장소입니다. 암투에 희생되었던 사람들이 몰래 여기에 묻히고는 했었죠. 아마 묻힌 사람들 숫자만 두 자리가 넘어갈 겁니다.”
섬뜩한 이야기였다. 핼쑥해진 내 얼굴을 본 황태자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이 많이 답답해하는 듯해서 말했는데 실수였나 보군요.”
“아, 아뇨. 그냥. 혹시나. 혹시나 하고 여쭙는 건데, 제 발아래에도 사람이 묻힌 건 아니겠죠?”
“궁금하면 한번 파볼까요? 옆에 마침 삽도 있는데.”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에는 정말 커다란 삽이 세워져 있었다.
“네, 네?!”
내가 기겁하며 대답하자 황태자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부인은 내가 그걸 실천에 옮길 정도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나요?”
아니,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단 말인가.
사실 조금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걸 황태자의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나 할까.
곤란한 표정을 짓는 내 얼굴을 보고 황태자는 더욱 즐거워진 듯했다.
‘아오, 얄미워!’
짓궂은 장난이란 걸 알자 괜스레 짜증이 일었다. 동시에 엘렌이 나에게 장난을 치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엘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러는 사이 황태자의 질문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답했다.
“충분히.”
리카르도였다. 정말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그는 굵고 짧게 응수했다.
* * *
“……이러저러해서 조사단장을 맡게 된 오필리아 마르그리트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어 미안해요. 그리고 이쪽은…… 늦게 합류하게 된 신입이에요.”
조사단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급하게 만들어진 조사단이라 분위기도 어수선했고, 그 와중에 큰 사건을 맡아 경직되고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그에 조금 아연한 기분이었다.
‘이 인원으로 범인을 잡았었다니.’
과연 원작의 아일라가 얼마나 큰일을 해낸 건지 이번 기회로 여실히 깨달았다.
‘이런 기회는 필요 없는데.’
나는 주춤 리카르도의 앞에서 물러나며 그를 조사단원들에게 소개했다. 리카르도는 무심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리카르도 에르도안.”
“…….”
간결한 걸 넘어서 성의까지 없어 보이는 인사지만 그걸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가운 냉기를 풀풀 풍기는 리카르도는 여기서도 어김없이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둘 다 20대 중후반 정도로,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녀였다.
그들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시선은 리카르도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저는 루체 이반스예요. 잘 부탁드려요.”
긴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 얼굴에 주근깨가 박혀 있어서 명랑한 소녀 같은 인상이었지만 차분한 표정에 그러한 감상은 곧 사라졌다.
“애스터 러셀입니다.”
어깨까지 오는 은색 머리에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그는 선이 고와 짐짓 귀족 영애라 착각할 만큼 유려한 미남이었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조사단원들의 신분도 만만치 않았다.
이반스 백작 가문과 러셀 후작 가문.
내가 후계자로 있을 적에도 이 두 가문에 관한 이야기는 건너 들려왔다.
‘아버지는 앞으로 공작위를 물려받는다면 종종 만나게 될 가문이라 말했었지.’
하지만 후계위를 동생에게 넘기면서 그들을 만나게 될 날은 오지 않았다.
그래, 방금까지는.
이름을 듣고 조사단원의 멤버는 원작과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몇 명이 빠진 것 같은데.’
설마 이 자리에 있는 네 명이 조사단 멤버의 전부일 리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질문했다.
“이 인원이 전부예요?”
“다른 단원은 외근을 나갔습니다.”
어이가 없어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외근을 나갔다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 지시도 없이?”
“…그게.”
그제야 그들도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단장의 명령으로 움직여야 할 단원들이 멋대로 움직인다. 그것도 첫날부터.
머리가 지끈 아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