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화끈했던 얼굴이 놀랍도록 빠르게 식어 내려갔다. 나는 차갑게 굳은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알고 있어……?’
그가 하는 말은 단 하나의 사실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절대로 내가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
그가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인가?
그가 어떻게?
설마.
연회장에서 불안할 만큼 로디안을 바라보던 끈질긴 시선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거 하나로 저런 확신에 찬 눈빛을 하는 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세상엔 피가 섞이지 않았으나 놀라울 만치 닮은 사람이 종종 있지 않은가.
다른 가능성은…….
머리가 점점 아프기 시작했다. 뇌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일조차 거부하는 것처럼.
“괜찮나?”
나를 보는 리카르도의 푸른 눈이 걱정의 빛으로 물들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 흔들리는 눈으로 그가 등지고 있는 사무실의 문을 보았다.
어서 그를 보낸 후, 이 문을 열고 맡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데…….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팔을 꽉 붙잡고 사무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아무 저항 없이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중간에 궁인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까 두려웠지만 지금 더 큰 문제가 내 머릿속을 지배한 상태였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복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한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궁에서 거의 초행이나 다름없는 내가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을 알 턱이 없었다.
당장 생각나는 곳이 황태자와 대화를 나눴던 응접실밖에 없는데 거길 어떻게 간단 말인가.
정처 없이 일단 발길이 닿는 대로 자신 있게 그를 이끌었으나 내 속은 이미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궁인이 점점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고 있던 나로선 반길 일이었으나 어쩐지 그와 동시에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상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리카르도는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몇 분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방치된 정원처럼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겨울인데도 황궁의 보온 마법 때문에 이 정원에 있는 풀들은 봄의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정원엔 잡초가 무성했다.
관리가 되는 정원이 아닌지 수풀이 높게 우거져 지나가는 사람은 우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황궁에 이런 장소가 있다니.’
아무리 후미진 위치에 있다지만 보이지 않는 곳까지 열심히 관리가 될 듯한 황궁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게 의외였다.
“…….”
정원 안쪽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리카르도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잡혔던 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팔을 잡은 건 죄송해요.”
푸른 눈동자가 말없이 나의 얼굴로 옮겨졌다.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이 말이 나오기까지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7년 전.”
“자, 잠깐.”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바로 막았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무례였으나 지금은 예의를 차리기는커녕 내 정신을 차리는 것도 급급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거잖아!’
7년 전이라면 내가 카시어스 공작 가문에서 나왔을 때였다.
이 상황에서 리카르도가 7년 전을 언급한다는 것은 의미가 명확했다. 내 과거에 대해 말을 하려고 했었겠지.
타인의 입으로 면전에서 내 이야기를 듣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처음 이상한 걸 감지한 건 그대의 남편이라는 자를 보았을 때였지.”
리카르도가 내 남편을 보았을 때라면 엘렌이 잠시 대역을 맡았던 당시를 이르는 말이었다. 낭패감이 짙게 밀려왔다.
한편으론 그가 그때부터 의심했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사업으로 성공한 자수성가라고 보기에는 많이 무리가 있더군. 오히려 있는 사업도 말아먹었다는 이야기 쪽에 믿음이 갔을 인물이야.”
그 짧은 만남에 리카르도는 엘렌의 성향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의 말대로 엘렌은 사업에 소질이 없었다. 언제는 내가 사업을 운용하는 게 재밌어 보였는지 엘렌은 어디선가 큰돈을 가져와 사업을 시작했고, 그 족족 망해버렸다.
애매하게 망한 것도 아니고, 정말 폭삭 가라앉았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따라서 그의 사업은 회생도 불가능했다.
웬만해선 돈 버는 일에 관대한 나조차 그가 사업을 하는 걸 말리는 정도였으니.
리카르도는 불쾌한 듯 인상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엘렌의 인상이 좋지 않게 남은 듯했다. 백번 이해가 되었다.
“궁금한 게 있다. 그럼 그자는 누구였지?”
리카르도가 엘렌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렇게 흉흉한 눈빛을 하고 있으면 곧이곧대로 엘렌이라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돈으로 고용한 사람이에요.”
“…돈으로 고용했다라.”
리카르도가 나른한 몸짓으로 팔짱을 꼬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보기 좋은 모양으로 살짝 올라갔다. 나는 그가 이다지도 표정이 다양한 사람임을 처음 깨달았다.
“그 말을 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
그의 말에 나는 아까 한 말에 어떤 부분이 이상했는지 곱씹었다. 그러나 걸리는 부분이…… 많구나.
“조금… 독특한 사람이긴 했는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사람이 엘렌이라는 걸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지금은 모르쇠로 나가야 했다.
“말하기 싫다면 더 묻지 않겠다.”
리카르도는 순순히 물러났다.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나는 왜인지 모르게 찝찝함을 느꼈다. 마치 그러한 사실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는 듯 보였다.
“왜 더 안 물어보시나요?”
“그대가 묻길 원하지 않는 듯해서.”
“공작님이 그리 배려 있는 분인 줄은 처음 알았네요.”
“기분이 상했군. 오필리아.”
“…이 얼굴로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겠죠.”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배려를 해줄 거라면 끝까지 나의 정체에 대해 알더라도 모른 척해주면 안 되는 것이었나.
나는 정원에 있는 잡초들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불쾌한가?”
그 말에 시선을 올려 리카르도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쩐 일인지 섭섭한 듯한 리카르도의 표정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침울해지는 걸 보고 나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진심이었다. 놀랍게도 그가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을 비쳤을 때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그걸 빌미로 어떤 요구를 한다면 나는 그의 요구를 거절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리카르도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작님이 그 이야기를 꺼낸 저의가 궁금해요.”
“그대는 참 눈치가 없군.”
면전에 대고 그런 얘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어이가 없어 뭐라 반박하고 싶어도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오필리아가 아니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아니. 그건 그대의 착각이다.”
아니, 아까부터 너무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리카르도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언제 그런 미소를 지었냐는 듯 차갑고 냉기가 흘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뭐가요?”
“…….”
리카르도가 입을 열다가 말고 뒤를 흘긋 보았다.
“여기도 그리 장소는 좋지 않았던 모양이군.”
그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지나지 않아 바스락, 풀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내가 방해했나?”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에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밝은 금발에 금안을 가진 미남자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황태자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아까 리카르도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말 황태자가 의도적으로 내 뒤를 쫓는 걸까.
“부인….”
황태자의 시선이 나를 꿰뚫어 볼 듯 직시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갈린 눈매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각입니다.”
“네?”
그가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사무실에서 30분째 기다려도 오질 않아 직접 찾으러 왔습니다.”
헉.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헛숨을 들이켜며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정확히 들어야 하는데!
황태자의 등장 때부터 줄곧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던 리카르도가 말했다.
“저도 조사단에 들어가겠습니다.”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다니, 과연 리카르도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야기가 빨리 속행이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슬쩍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그 말을 듣는 황태자의 시선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마치 당연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이런 상황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이.
황태자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옮겨붙었다.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는데, 이건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가 나에게 물었다. 리카르도가 아닌.
리카르도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둘의 중간에 낀 나는 식은땀만 흘렸다.
왜 상황이 또 이렇게 전개가 된단 말인가.
설마 이 짓을 두 달 내내 해야 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느낌에 몰골이 선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