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64화 (65/124)

64화

쾌청한 하늘 아래, 봄에 핀 매화처럼 새하얀 매화궁은 여전히 깨끗하고 고아한 미가 흘렀다.

나는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일어나자마자 허니문이 아닌, 매화궁으로 향했다.

회사는 결국 쉬는 거로 결정이 되었다. 암만 생각해도 나를 대체할 만큼 신용할 수 있는 직원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장기휴업을 하기로 했다.

‘나도 참 착하다니까.’

어느 회사에서 일반 사원들에게 삭감 없는 유급휴가를 두 달이나 준단 말인가.

과거에 그런 회사가 있었다면 나 또한 바로 입사 지원을 했을 것이다.

‘분명 여기쯤이라고 했었지.’

임시조사단이 있는 사무실의 위치가 그려진 약도를 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매화궁은 모란궁보다는 작지만 황태자가 기거하는 궁인 만큼 객관적인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흡사 미로 같은 복잡한 길에 지도가 없다면 이 미로에서 헤매다가 영원히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너 길 잃으면 굶어 죽겠다, 이 말을 농담으로라도 할 수가 없는 곳이 매화궁이었다.

거의 종이가 뚫릴 듯 약도를 보며 약 10분을 헤매고, 지각이라는 두 단어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

여긴가? 드디어 제대로 사무실을 찾은 듯했다. 눈앞에 작은 새에 둘러싸인 아이 동상이 있었다.

분명 저 동상이 보이는 복도에서 왼쪽으로 돌면 조사단의 사무실이 있다고 했었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한달음에 코너를 돌았다. 그런데 지도 위치상 사무실이 있을 곳의 문 앞에는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맞게 찾아온 것 같은데.’

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이윽고 내 발이 완전히 멈추었다. 그 또한 나에게 시선이 꽂힌 상태였다. 당황한 나는 내 입이 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공작님……?”

리카르도였다. 아침에 허니문이 아닌 곳에서 그를 보는 것이 저번 감기에 걸렸을 때 이어 두 번째였던가?

나는 믿기지 않아 인사도 하지 않고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금방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평소의 그는 스리피스 정장에 단추 하나 놓치지 않고 완벽히 잠그며 소매 끝조차 주름 없이 깔끔한 차림새였다.

그러나 그는 하얀 셔츠에 겉옷만 입은 상태로 안에 입은 셔츠조차 완전히 단추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급하게 이곳에 온 듯했다.

약간 흐트러진 차림을 한 그는 거칠고 야성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어쩌면 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 때문일 수도. 그는 무언가에 화가 나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부디 나와 관련된 일은 아니길 바라고 있는데 그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심연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차가운 색이었으나 그 안에 묻어나는 초조함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다.

“잠시 시간 좀 빌리고 싶군.”

“네? 잠시만요, 공작님.”

“급한 용무가 있나?”

“사실 제가…….”

조사단장이 되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네가 맡을 임무를 내가 맡고 있단다. 남주야….

이 말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오필리아.”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담자 이상하게 오금이 저렸다.

“네, 네?”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대는 알고 있나?”

날 뭐로 보는 건가?

당연히 그 위험성은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귀족들은 이 책임을 떠맡을 희생양으로 조사단장을 고를 것이다.

특히나 작위를 돈으로 산, 허울뿐인 백작 가문의 부인이라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바로 나처럼.

약간 나를 무시하는 건가 싶어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하아…….”

그런데 돌아온 건 걱정 어린 깊은 한숨뿐이었다. 뭐에 대해 그가 걱정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이런 애 취급은 아무리 그라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대는 안셀모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그분에 관한 건 모르지만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비켜주시겠어요?”

지금 네가 비키지 않으면 나는 출근 첫날부터 지각한, 몰상식한 사람이 된단다.

내 인내심은 어느덧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내 짜증이 서린 말투에도 리카르도는 눈썹만 한번 꿈틀할 뿐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 폐하께서 걱정되신다면, 공작님도 들어오세요.”

꿈쩍도 하지 않은 그를 향해 흥, 하고 콧소리를 내뱉으며 말했다.

“제가 태자 전하께 말씀드리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조사단장의 권한으로 말인가?”

“거기까지 알고 계신다면 이야기는 편해지겠네요.”

아일라를 구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두 달.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이러한 사담은 시간 낭비였다.

내 퉁명스러운 말투에는 사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다.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이 이런 위험에 처해 있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좋다. 나도 들어가도록 하지.”

“그럼 얼른 비켜주… 네?”

이미 틀어진 원작에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건만 리카르도는 별다른 고민의 기색도 없이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로써 당황한 쪽은 나였다.

물론 그가 조사단에 들어간다면, 조사단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나만 있는 조사단에 비할 바 없이 커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리어스 기사단을 사적으로 움직인 까닭으로 이 조사단에 배제가 되었다.

그가 왜 마리어스 기사단을 움직였는가.

그 이유를 떠올리자 방금 그에게 짜증을 낸 것이 화풀이나 다름없음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나는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공작님은 그 일로….”

조금 컸던 내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 갔다.

나 또한 그 일에 완전히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그대와 관련 없는 일이다. 신경 쓰지 말도록 해.”

그가 말했다.

“그대는 정말 내가 이런 일로 사건에 배제가 되었다고 생각하나?”

“공작님, 무슨 말씀을…?”

“이치대로 일이 처리된다면 내가 조사단장을 맡는 게 순리였지. 마리어스의 일이 있었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벙찐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거짓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의 미간에 불쾌한 골이 깊게 생겨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엔 중간에 누군가의 개입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

“나에게 그만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그리 많지 않다.”

그리 많지 않다, 그건 점잖은 표현이었다.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가능한 사람은 황제와 그리고.

‘황태자.’

나는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이제 사태가 좀 파악이 되나?”

리카르도가 성큼 나에게 걸어왔다. 단 한 걸음이었는데도 그와 나의 거리가 눈에 띄게 줄었다. 나는 그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건 커다란 짐승 앞에서 작은 토끼가 도망치는 꾀를 부리는 움직임에 불과했다.

“그대는 아주 큰일에 발을 들인 거야. 그것도 위험한 일에.”

“알고 있어요.”

“알면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리카르도가 말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

“아일라 레니에가 그대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녀를 본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 가족도 아닌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그가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나도 뒷걸음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괜히 오기가 일었다. 마치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친 것 같지 않은가. 그런 오해를 사는 건 질색이었다.

“…….”

“그래서 그대가 흥미로워.”

그가 내 턱을 붙잡았다. 그와 어울리지 않은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지 못했다는 쪽이 정확했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얼굴에 열이 잔뜩 몰리는 걸 느꼈다. 턱이 붙잡힌 채 입만 달싹였다.

“고, 공작님. 저, 저. 저는 유부…….”

“흠.”

그가 부드럽게 손을 떼었다.

“그럼 그대가 이러는 동안 그대의 남편을 무엇을 하고 있지?”

“그, 그건.”

그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어떤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은 듯한 그런 종류의.

‘리카르도가 웃고 있어?’

내 머리에는 열이 올라 김이 날 지경이었다. 그제야 아일라와 황태자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러는 동안 그대의 남편은 무엇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건.”

“무얼 할 수가 없겠지.”

리카르도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남편이었으니.”

푸른 눈이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얽매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의 조각 같은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정말 그대는 오필리아 마르그리트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