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덥수룩한 갈색 머리가 익숙한 뒤통수였다.
마차에서 내리자, 저택 앞에서 기웃거리던 남자가 뒤로 돌았다.
예상대로 알렉스였다. 나를 발견한 그가 반가움 반 걱정 반이 뒤섞인 얼굴로 나에게 뛰다시피 다가왔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그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알렉스! 괜찮아요?”
“으으… 네.”
내 부축을 받고 일어난 알렉스가 넘어질 때 벗겨진 안경을 다시 주워들었다.
“이런 다 깨졌네요…….”
멀리서 봤을 땐 그렇게 심하게 넘어진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지금 보니 안경알이 깨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있었다.
“하하. 그러게요!”
알렉스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의 추레한 행색을 잠시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경 살 돈은 있어요? 엘렌이 하는 것 봐선 연구비용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던데….”
“…돋보기를 쓰면 되지 않을까요? 하하.”
결국 안경을 살 돈이 없다는 얘기였다.
연구하는 사람이 안경 같은 기본적인 도구도 없이 어떻게 연구를 한다는 건지.
“그냥 내가 사줄게요. 알렉스.”
“아, 정말 괜찮은데…….”
“어허. 원래 어른이 사준다고 하면 받는 거예요.”
어린애 취급하는 내 농담에도 알렉스는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알렉스가 여기엔 웬일이에요?”
내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다가왔다. 심히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오늘 수업 일인데 아일라가 오질 않았어요! 그녀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아는 건 사장님 집밖에 없어서…….”
“아, 알겠으니까 좀…….”
떨어질래? 완전히 말을 잇지는 않았으나 알렉스도 자신이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는 걸 깨달았는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추운데 들어가서 얘기해요.”
나는 알렉스를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가 여기 온 이유가 수업 일에 아일라가 오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니.
그제야 주말마다 아일라가 알렉스에게 마탑에서 수업을 받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곁눈질로 힐끔 내 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사장님, 혹시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는 주말에 불쑥 나를 찾아온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예의도 바르지.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일라가 수업에 오지 않았다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알렉스는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분명할 터였다.
또래 친구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안다면 분명 큰 충격에 빠지겠지.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으며, 여러모로 고민이었다.
알렉스와 나는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얼마나 기다렸어요?”
“제가 오자마자 사장님이 오셨어요.”
“거짓말. 손이 새빨간데. 왔으면 문이라도 두들기지 그랬어요. 그럼 리온이 문을 열어줬을 텐데 말이에요.”
“그 생각도 못 한 건 아닌데 고민만 하다가…… 하하. 그래도 사장님이 빨리 오셔서 다행이에요.”
알렉스가 보기보다 소심하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급한 일이 있으면 바로 문 두들기세요. 추운데 고생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이래서 아일라 양이 사장님을 좋아하나 봐요.”
“네?”
“사장님은 모르시죠? 아일라 양이 수업 때마다 저한테 사장님 칭찬을 얼마나 하는지 몰라요.”
알렉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 반응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기뻐할 만한 이야기였지만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지금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저 알렉스.”
알렉스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빛으로 똘망똘망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를 어쩐담.
“…한동안 수업은 없을 거예요.”
“네? 왜요? 아일라가 아프대요?”
알렉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여는 그에게 나는 거짓을 말하는 것을 택했다.
황제의 음독 사건은 외부에 비밀이었다. 그로 인해 아일라가 수감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주 잠깐, 그에게도 사실을 알릴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금방 바람처럼 사라졌다.
‘알렉스에겐 미안하지만.’
그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아일라가 한동안 바빠서 힘들 것 같다고 얘기하자 알렉스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는 무사히 마쳤나요?”
“……그럼요.”
“다행이네요! 아일라 양이 사장님께 폐가 될까 봐 많이 걱정했었는데 일이 잘 풀린 모양이네요.”
거짓말을 하는 내 가슴은 양심의 가책으로 콕콕 쑤셨다. 내 말을 온전히 믿는 듯한 천진난만한 그의 태도가 더욱 그랬다.
그는 아일라가 왜 바쁜지 궁금한 얼굴이었지만 끝내 그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나로선 거짓말을 얹을 필요가 없어지는 일이기에 다행이었지만.
“그러면 언제쯤 수업이 재개될까요?”
“음……. 아일라가 괜찮아지면 따로 마탑에 연락을 보내도록 할게요.”
재판은 두 달 뒤에 시작하지만 그 재판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나 또한 알지 못했다. 으레 이런 큰일은 금방 판결이 내려진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유죄가 확정되어 처형이 선고되었을 때였다. 내 입장에선 어떻게든 재판 기간을 늘리는 게 좋았다.
‘하아.’
이게 전부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래서 다 꿈만 같고, 현실감이 없었다.
아일라가 황제의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잡히고, 내가 그 사건을 맡는 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니.
아무리 원작이 틀어졌다고 해도 그로 인해 여주인공이 죽을 위기에 있다는 건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
내 표정에서 이상한 걸 감지했는지 알렉스의 밝은 표정도 서서히 어두워졌다.
“많이 심각한 일인가요?”
그가 불안한 손짓으로 알이 깨진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표정 관리에 실패한 듯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기력을 모두 손짓한 탓이었다.
알렉스는 주춤 몸을 세웠다.
“사장님 그러면 저는 이만 마탑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일라 양을 만나게 되면 안부 전해주세요.”
“잠깐만요, 알렉스.”
마탑. 나는 그의 말에 응접실을 나가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엘렌은 어젯밤부터 뭐 하고 있나요?”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설마 황태자비인 에테르나와 한가롭게 하하 호호 티타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엄밀히 따지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보다는 서브 남주가 이 사건에 더 신경 쓰고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닌지, 괜스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필 생각난 상대가 에테르나라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만약 엘렌이 내 속을 읽게 되면 설마 질투하는 거냐고 유난을 떨 일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엘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있다면 이 사건은 해결된 것과 진배없으니까. 그리고 나 혼자 이 일을 짊어지기엔 너무 무게가 무거웠다.
“마탑주님이요?”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님이 아시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요?”
나는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젯밤 그를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일이 생겼다며 눈 깜빡할 사이에 마법으로 사라진 사람을 내가 어찌 막을쏘냐.
기실 엘렌이 사라진 건 어젯밤이었다.
그런데 그 하룻밤의 공백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이상했다. 이렇게 사라지면 지금이라도 불쑥 튀어나와서 ‘나 기다렸어?’ 하고 특유의 말투로 내 속을 뒤집어야 했는데.
유난히 조용했다. 왜 하필 이런 때에.
“제가 알기론 어젯밤에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마탑주님이 그러시는 건 흔한 일이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군요.”
“원래 외박이 잦으신 분이라….”
“뭐……. 어렸을 때부터 그러긴 했어요.”
어려서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아주 어릴 적엔 자고 일어나니 옆에 엘렌이 자고 있어서 귀신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애라지만 너무나도 순수히 자기 욕망으로만 마법을 활용하는 엘렌에 알렉산드로 가문 사람들은 걱정했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 가문 사람들은 그를 바꾸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썼지만 보기 좋게 실패.
나의 아버지인 카시어스 공작조차 한 수 접는다는 알렉산드로 대공의 고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꺾은 이가 바로 엘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겠지…….”
엘렌의 부재가 괜히 걱정이 되었다. 내 혼잣말을 들은 알렉스가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듯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마탑주님이 아니라 그 상대방 쪽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네요.”
나는 부정 없이 곧바로 긍정했다.
엘렌이 어떤 일에 당하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알렉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자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금방 돌아오겠지.’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그 후 엘렌은 일주일이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탑에서도, 백작저에도, 대공 가문에도. 내 앞에서도.
그 어느 곳에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