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황태자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간 침묵했다.
어안이 벙벙하다. 본래라면 그 직무는 리카르도가 맡아야 했다. 그런 리카르도가 멀쩡하게 있는데 내가 조사단장이라고?
“잠시만요,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정확히 ‘조사단장’을 맡으라 하셨나요?”
그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문제가 아주 많은데요.
“원래라면 리카가 맡을 예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저희 쪽도 많이 난감했습니다.”
“리카요?”
“에르도안 공작의 애칭입니다. 귀엽죠?”
황태자가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원작에서 리카르도와 결혼했던 아일라도 그를 그렇게 부르진 않았던 것 같은데.
황태자가 빤히 보고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네요.”
마치 5살배기 어린아이에게나 붙여주는 애칭 같았다.
리카르도와 리카.
얼굴이 절로 일그러지는 괴리감이 느껴지면서도 어느 부분에선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할 노릇이었다.
‘리카르도.’
리카르도가 마리어스 기사단을 사적으로 이용한 이유로 조사단에서 배제가 된 모양이었다.
그 이유로 조사단장이 공석으로 남은 상태고.
하지만 나 말고도 황궁엔 많은 인재가 있을 텐데 조사단장을 맡을 적임자 하나 없었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나에겐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조사단장의 직함은 양날의 검이었다.
아일라를 구제하는 데 용이하게 권한을 이용할 수 있지만, 반면에 진범을 밝히지 못하면 온전히 내 책임이 되어버리는 검.
반란군의 소행임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아일라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뿐만 아니라 모든 책임, 구정물을 뒤집어쓸 수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저인가요?”
왜 하필 나란 말인가. 그게 꺼림칙했다. 황태자가 나를 조사단장으로 임명한 의도가.
열심히 조사에 임할 것 같다고 갑자기 조사단장이라니.
식당이 열심히 일할 것 같다고 직원을 고용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어느 식당이 열심히 일할 것 같다고 신입을 쉐프장으로 만들던가?
이곳이 황궁인 이상 그건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아니, 가장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건 황태자가 첫 만남에 나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했던 것이냐, 그것이었다.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 나를 만나려고 했던 것.
“왜 태자 전하께선 그때 거짓말을 한 거죠?”
그 의문이 속으로만 머물지 않고 기어코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왜인지 이 의문을 풀어야 할 강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거짓말을 한 쪽은 저쪽인데.’
왜 이쪽에서 물어봐야 할지 말지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황태자의 얼굴에서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에 대한 답을 한다면 조사단장을 맡아주는 건가요?”
황태자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나는 놀란 눈을 뜨며 되물었다.
“저에게 선택권이 있었나요?”
“당연합니다. 앉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힐 수는 없으니까요.”
황태자가 빙긋 웃었다.
“내가 강압적인 사람으로 보였군요. 부인.”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아무래도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어차피 숨길 만한 이유도 아닙니다. 단순히 호기심이었거든요.”
“호기심이요?”
“리카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흔치 않아서 말입니다. 그의 관심을 독차지한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이 두 눈으로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군요.”
리카. 참으로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이었다. 그러나 호칭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거짓말의 이유가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리카르도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런, 모르셨나 봅니다. 부인.”
나를 보던 황태자가 난처한 듯 눈썹을 휘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 또한 비밀로 해야겠네요.”
“비밀이요?”
“재밌는 비밀이죠. 이걸로 의문은 해결되었습니까?”
“지금 막 더 큰 의문이 생기려고 하는데요.”
“유감스럽지만 이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타인이 마음대로 발설할 수는 없는 것인지라.”
‘아, 예.’
황태자는 진정으로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내가 바보도 아니고 아까의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전하께서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
“……오해?”
황태자의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흥미로운 것을 본다는 시선이었다. 이게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말을 한 나는 진심이었다.
아일라도 그렇고, 황태자도 그렇고 다들 왜 이런 오해를 한단 말인가.
아마 그들은 리카르도가 허니문에 꾸준히 방문한다는 것을 보고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이유는 원작에도 나오다시피 나 때문이 아니라 표면상 북부의 안주인을 들이기 위함이었다. 더 나아간다면 여주인공인 아일라를 만나기 위한.
‘그런데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져 버릴 줄은 몰랐지.’
어디선가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가 큭큭, 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부인은 재밌는 사람이네요.”
“가, 감사합니다.”
“기뻐해도 좋습니다. 내가 타인에게 칭찬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거든요.”
오만의 극치였으나 그 또한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닌지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대대손손 자랑으로 삼을게요.”
나 또한 그에 장단을 맞추었다. 아, 사회생활 역시 힘들다.
힘없이 내뱉은 내 말에 그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내 대답이 그의 마음에 든 눈치였다. 나는 그가 기분이 좋아진 틈을 타 슬쩍 입을 열었다.
“하오나 태자 전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일라 레니에를 빼달라는 얘기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뜨끔.
그런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맥락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
“재판일이 빠르면 2주, 늦으면 한 달이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그때까지 손에 물 한 번 묻혀 본 적 없는 귀족 영애가 지하 감옥같이 가혹한 환경을 버틸 수 있을까 싶어요.”
물론 아일라는 레니에 가문의 허드렛일까지 맡으며 자라왔지만, 이 상황에선 목욕도 혼자 할 수 없는 영애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부인의 말은?”
“재판까지만이라도 지하 감옥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온전히 재판이 진행되기 위해선 죄인의 참석도 필수인데 그 전에 무슨 변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를 죄인으로 말하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런 건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던 아일라가 더 중요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의 사활이 걸린 사건이었다. 그런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달라는 주장.
그의 입장에선 나에게 크게 화를 내도 지나친 게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도리어 내 요구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역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뭔가요?”
“부인이 조사단장을 맡아준다면 아일라 레니에는 재판까지 귀빈실에 묵게 하도록 허하겠습니다.”
“…….”
죄인이 귀빈실이라니. 파격적이다 못해 의심이 가는 제안이다.
“제가 그렇게까지 조사단장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인의 입으로.”
“뭘요?”
“시간만 있다면 해결이 가능하다고, 부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내가 직접 조사해서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조사단에 있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런 확언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저녁 임시담장에 맡기려고 했던 사람에게도요. 나는 그런 확답을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부인.”
“하지만 저는…….”
“아까 말했듯이 나는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나 말장난을 싫어합니다.”
“…….”
아까와 같은 상황이었다.
방금 그 말이 내가 해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하면 꼼짝없이 내가 말장난을 하게 된 꼴이 되겠지.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데, 죄인을 귀빈실로 옮기는 일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황태자의 미소가 활짝 피었다. 만약 그의 미소가 꽃이었다면 진한 꽃냄새가 풍겼을 것이다.
* * *
백작저로 돌아가는 길.
나는 황태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렸다.
‘출근은 내일부터 하면 됩니다. 매화궁으로.’
내일부터 황궁으로 출근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지금 내 회사가 마음에 걸렸지만 금방 머리를 털었다. 사람 목숨이 달려 있는데 회사가 뭔 대수인가.
‘아니, 대수는 맞지.’
누구한테 회사를 잠시 위탁해야 하는데… 직원 중 한 명에게 맡기면 되려나.
이 또한 마뜩잖았다. 좀처럼 내 자리를 맡길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 짧은 기간도 아니었다.
내가 조사단장을 맡는 조건으로 재판일은 미뤄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필요해요.
-얼마나 말입니까?
나는 황태자의 물음에 정확히 ‘두 달’을 말했다.
원작에서 아일라가 사건을 해결하기까지 걸린 시간의 딱 두 배였다.
최대한 시간을 많이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황태자를 생각하면 모호한 대답보다는 확실한 날짜를 주는 게 타협하기 쉬울 듯했다.
‘두 달.’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머리가 멍했다. 잠을 이상하게 자서 그런지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흐릿했다.
내가 지금 할 일이라곤 원작을 되짚는 일밖에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진범을 밝혀내야 할지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덧 마차가 백작저에 도착했다. 뒤늦게 마차의 문을 열고 나온 나는 저택의 지척에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