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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61화 (62/124)

61화

기시감이 드는 눈빛이었다.

마치 황태자가 나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눈빛.

‘처음…….’

불현듯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리카르도에게 빌레드를 선물 받았을 무렵이었다. 퇴근 후 날아온 입궁 명령서에 급하게 매화궁으로 향했다.

그때 만난 황태자는 홍차를 훔친 범인을 잡기 위해 나를 황궁으로 초대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연을 시작으로 그는 내가 일하는 회사에 찾아와선 부인 없이 부부 상담을 혼자 받으러 오곤 했었다. 뭐, 결국은 아일라의 손금만 열심히 봐 주고 갔지만.

‘그리고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었어.’

황궁에서 일어난 사건을 모를 리 없는 리카르도가 그런 사건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말했었다.

그럼 황태자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게 된다.

그가 왜 만난 적도 없는 나에게 거짓말을?

이제 와 새삼스럽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부터 황태자는 나를 보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나 또한 방금 든 생각에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그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생활 소음조차 없는 적막에 찻잔이 접시와 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 나도 모르게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차가 식을 것 같습니다, 부인. 어서 앉으세요.”

“아, 네.”

황태자의 말에 어색히 소파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기분 좋은 홍차 향이 입안을 가득 감쌌다.

“피로 회복에 좋은 홍차라고 합니다. 부인도 간밤에 잠도 못 자고 바쁘게 돌아다니었으니 나와 같은 것으로 가져오라 했습니다.”

마치 내가 어제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찻잔을 든 내 손이 순간 얼음처럼 굳었다.

‘설마 지하 감옥에 들른 것까지 들키진 않았겠지……?’

아니야, 아니겠지.

지하 감옥에 허가 없이 들어가는 건 중죄였다.

암묵적으로 수감 된 죄수를 감옥 안에서 꺼내려고 하는 행위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제의 일이 들켰다면 황태자는 입궁을 허락하는 편지를 보내는 것 대신에 위병대를 보내 나를 체포했을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짐짓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닌지 순간적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 일을 상기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폐하께선 괜찮으신가요?”

“…….”

내 물음을 들었을 텐데 그의 입이 바로 열리진 않았다. 다만 어두워진 그의 얼굴에 나는 황제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원작에선 이 일이 황제가 붕어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상태가 괜찮을 리가.

원작에서 아일라가 해독약을 만들어 내긴 하나 이미 치명적인 독에 당한 황제는 쇠약해진 뒤였고, 그대로 황태자에게 황위를 준 후 여생을 보내다가 독의 후유증으로 죽게 된다. 결국 음독 사건이 황제의 명을 재촉하게 된 것이다.

황태자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궁내의가 해독약을 조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독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독이 어떤 재료로,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꽤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배합된 약인 것 같더군요.”

“배합법…….”

원작의 아일라가 그 배합법을 알게 된 것엔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 열심히 홀로 고민한다. 그러다가 여러 귀부인이 월경통으로 고생한다는 걸 알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다가 약초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게 꽤 그녀의 적성에 맞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가 데뷔식 날 황제가 음독으로 쓰러지고, 남주 리카르도를 따라 조사단의 일을 돕고 배합법까지 알아낸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 배합법을 알아낼 사람이 감옥에 있다고 말하면 황태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를 감옥에서 꺼내주기만 한다면, 마음 같아선 모든 걸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믿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오히려 그녀가 배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의심을 얹어주는 격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뭔가 아는 눈치군요.”

나를 보는 황태자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흡사 먹잇감을 앞둔 독수리처럼 집요하고 맹렬한 시선이었다. 이거 큰일이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저 폐하가 걱정되어서 어떤 방법이 없을지 생각했답니다.”

“그렇군요. 혹시 좋은 방법이 떠오른다면 바로 말해주세요.”

이곳에 들어오고 처음 보는 그의 미소였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에 깔린 그림자는 여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입술은 열릴 듯 말 듯 벌어졌다. 사실 아까부터 언제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이야기를 질질 끌 수는 없는 법. 황태자도 바쁜 와중에 온 건지 차를 마시며 힐끔 시계를 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 태자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일라 레니에.”

“……!”

“그녀에 관한 이야기겠지요?”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낙관적으로 해석하기는 힘든 냉소적인 미소였다. 허니문에 올 때 아일라의 손금을 봐 주겠다며 그녀에게 수작질을 걸던 그 황태자가 맞는 건지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 아버지가 쓰러졌으니까.’

호감 있던 여인이라도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면 저런 얼굴을 하는 게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왠지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체 왜일까.

“전하도 아시다시피 아일라는 폐하를 해칠 이유가 없어요.”

“그저 폐하께 와인을 건넨 것뿐.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겁니까?”

“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있나요?”

“근거요?”

황태자가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에겐 아일라 레니에가 폐하를 해칠 이유가 없다는 건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합니다. 조금 더 눈에 보이는 증거나 근거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그런 건 누구도 증명할 수가…!”

만약 그 와인을 건넨 게 나였다고 하더라도 황제를 음해하지 않을 이유 같은 걸 증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를 해칠 동기나 이유를 찾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르면 2주, 늦으면 한 달 후. 재판이 열릴 겁니다.”

“아일라가 재판에 회부가 되었다,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당장은 처형당할 일이 없을 거라는 얘기였다. 다행히 리카르도의 말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아일라가 황제를 해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되는 걸까.

아니면…….

“그 사이에 진범을 알아내면 되는 거죠?”

진범은 이미 원작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반란군의 부대장…. 이름은 뭐였더라? 이름이 나오긴 했는데 잠깐 얼굴만 비추다가 처형당하는 엑스트라였다. 엑스트라의 이름을 누가 기억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걸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나였다.

‘이럴 거면 전부 메모 좀 해둘걸!’

원작의 이야기는 나랑은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려서 대충 줄거리 정도만 파악하면 내 인생에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범인의 정체는 알고 있다는 것.

독의 배합법으로 그의 소행이라는 걸 알아낸다는 것도 아는데, 문제는 내가 그 배합법을 몰라 그의 소행이라는 걸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빨리 약초 공부라도 해야 되나?’

여주 버프도 없는 내가 과연 약초 공부를 한다고 반란군의 복잡한 독 배합식을 알아낼 수 있을까?

골이 아픈 여러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어 앉았다.

“진범을 알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보이는군요, 부인.”

“아… 그게 시간만 있다면요.”

이딴 입이라도 털고 보자. 아일라를 살릴 수 있다면 뭔들 못 하겠나.

‘그리고 내가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시간만 있다면 누군가가 아일라의 무고를 밝혀낼지 모른다. 가령 엘렌이라든가, 리카르도라든가!

내 말에 황태자는 깊이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그의 반듯한 입술이 움직였다.

“시간이 있다면 알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의 입술이 불길한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난 것 같다고 생각하면 착각이겠지?

“네? 네. 마, 맞아요.”

“좋습니다, 부인.”

뭐가 좋다는 거죠?

그런 물음만 입안에 뱅뱅 맴돌았으나 이상하게 물어보지 못하고 홍차로 입만 축였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금 황궁에서는 폐하의 음독 사건을 맡을 임시 조사단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마시던 차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미소도 그렇고, 하필 이 이야기가 나온 타이밍도 그렇고, 여차하면 나한테 조사단에 들어가라고 할 것 같은 흐름이었다.

“조사단에도 부인같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사람만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흐름이 확실해졌다. 나는 그의 속뜻을 파악하고 버벅거리며 말했다.

“저, 전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그럼요. 부인이 방금 말한 건 농담이었나요?”

황태자의 눈은 웃고 있었으나 눈빛은 급속도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 아뇨.”

맞다고 하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내 빠른 부정에 황태자도 언제 차가운 얼굴을 했냐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부인은.”

“네?”

“막무가내로 아일라 레니에를 꺼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조사단에 들어가서 그녀의 무고를 밝히겠다니 얼마나 바람직하고 멋진 일인가요? 아일라 레니에도 이걸 알면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겁니다.”

“아, 네.”

순식간에 내가 조사단으로 들어가는 게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게 황태자가 나를 황궁으로 초대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무서운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예상을 하고, 이런 상황을 유도했다는 게 되어 버리니까.

“그럼 잘 부탁합니다. 조사단장.”

그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심결에 그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한 나는 그가 덧붙인 말을 뒤늦게 깨닫고 기함했다.

“네?! 조사단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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