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나 또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을 내버려 두는 건 마음이 편치 않다. 이쪽에서도 도울 방법이 있는지 최대한 모색해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끝내 명쾌한 답은 얻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였다. 마리어스의 일로 리카르도는 그 사건을 담당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권한으로 돕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제가 쓰러진 일이 아닌가.
애초에 리카르도가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성정은 아니었는데 이 정도까지 대답해 준다는 게 의외였다.
‘하긴 아일라를 시한부로 알고 있으니….’
나는 그가 알고 있는 거짓을 굳이 나서서 정정하지 않았다.
외려 시한부라는 사실이 리카르도에게 그녀를 도울 동기가 된다면 얼마든지 아일라를 시한부로 만들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떠올려 보면 여태까지 그가 나에게 베푼 도움이 이상할 정도로 과하긴 했다.
‘누가 본다면 원작 소설의 여자주인공이 아일라가 아니라 나인 줄 착각하겠네.’
백작저로 돌아가는 마차길에 오른 나는 창가를 보며 어느새 동이 터 어둠이 거둬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신이 없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벌써 아침이네….”
중얼거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갠 새벽하늘은 맑고 아름다웠다. 아일라가 당장 이 하늘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운명에 놓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늘을 보는 내 눈빛은 착잡한 빛으로 물들어갔다.
“도착했습니다, 마님.”
백작저로 들어가자 리온과 하인들이 우르르 나왔다. 밤새 들어오지 않은 내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리온은 밤을 새운 건지 얼굴 안색이 퀭했다.
“!”
모두 내 몰골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험한 일이라도 당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들 중 누구도 쉽사리 나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리온 또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편지.”
“네?”
“편지를 보내야 해. 지금 당장. 집무실로 편지지를 가져와.”
빠르게 집무실로 향하던 내 발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일에 급급해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
“실링 왁스도 준비하고.”
마르그리트 백작 가문에서 보낸 편지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기 위해선 그 가문 고유의 인장이 그려진 실링 왁스가 필요했다.
갑작스러운 일련의 상황에 리온은 당황한 듯했으나 제게 떨어진 명령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편지지를 건네받은 나는 펜촉에 잉크를 묻히고 급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최대한 글자가 단정하게 보이길 바라며.
실링 왁스로 밀봉한 편지에 혹여 실링 왁스가 떨어지지 않을까 확인까지 마친 후, 리온에게 건네었다.
“이걸 황궁으로 보내. 가능한 한 일찍 도착하게끔.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알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달렸다는 말에 얼굴을 굳힌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받고 집무실을 나갔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나는 잠시 책상에 팔을 받치고 머리를 기대었다. 탁상시계의 초심이 오늘따라 유독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늦지 않았을 거야.”
리카르도도 아일라의 신분을 감안해서 금방 처형이 될 리는 없을 거라고 확언했다.
이제 막 편지를 보낸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하루가 지난 것처럼 초조하게 느껴졌다. 그때 감옥에서 아일라를 일단 빼 왔어야 했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일면 들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눈꺼풀은 상황파악도 못 하고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기실 사무실이나 집무실에만 박혀 일하던 사람이 동분서주하며 개구멍까지 기어 다니고, 전전긍긍했으니 몸이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수면욕을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내가 이겨낼 턱이 있을 리가 없었다. 수마에 사로잡힌 나는 이내 잠에 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그리고 꿈을 꾸었다.
‘이건 분명 꿈이야.’
기실 그때는 내가 꿈을 꾸었다는 걸 꿈에서 깨어나고 알았지만, 지금은 꿈을 꾸자마자 확실히 꿈이라는 걸 알았다.
-스스스.
뱀들이 내가 가는 길, 곳곳마다 음산히 혓바닥을 보이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꿈이라는 건 알지만….
‘너무 현실적이잖아!’
행여 뱀이랑 닿을까 나는 까치발을 들며 최대한 뱀이 없는 쪽으로 가려고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신비한 빛깔을 가진 뱀이 눈에 띄었다. 하늘색과 녹색이 섞인 비늘을 가진 뱀이었다.
근데 그 뱀만큼은 사람처럼 말을 건네는 듯한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나 꿈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뱀에게 어떤 남자가 손을 뻗어 잡았다.
‘으아, 맨손으로 뱀을 잡다니.’
나로선 절대 상상할 수도 없는 행위였다. 나는 경이로움 반 징그러움 반이 섞인 시선으로 남자의 행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위협적으로 혓바닥을 뱉던 뱀은 당장이라도 남자의 손을 물 듯 이를 드러냈다.
남자는 맨손으로 뱀의 몸통과 머리를 잡아 뜯어내었다. 기괴한 장면이었다.
뱀에서 분출된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남자는 피로 바닥에 이상한 문양을 그렸다. 엘렌이 종종 보던 마법서에 나오는 문양들이랑 비슷하면서도 뭔가 달랐다.
‘피로 그린 마법진이라니.’
먼 옛날 엘렌이 한창 마법에 흥미를 느낄 때 넌지시 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피를 매개로 하는 마법은 대개 비밀스러운 마법들이야.
-비밀?
-나이든 영감들은 금지된 마법이라 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감이 별로 안 좋잖아? 하여튼 거의 시간이나 공간이랑 관련이 된 마법인데….
그 뒤에 이어진 엘렌의 목소리는 귓가에 웅웅 울리며 바스러졌다.
남자가 그리던 마법진이 완성되자 내 발밑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나는 그 빛에서 달아나려고 도망갔다. 왠지 잡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도망가도 사람이 빛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이내 빛에 잠식된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어?’
바로 지금 내 차림새가 이 세계에서 환생하기 전에 입던 출근복이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단화.
설마 싶은 마음에 나는 내 얼굴에 손을 올렸다. 환생 후엔 눈이 좋아져서 착용할 일이 없는 안경이 내 얼굴에 얹어져 있었다.
“이게 대체…….”
이상한 꿈이었다. 그래, 꿈.
꿈에 불과하나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야겠다는 강렬한 느낌에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쾅쾅! 귓가에 시끄럽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노크 소리에 꿈에서 깬 나는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가 곧바로 정신을 똑바로 챙겼다. 집무실 문을 두드릴 만한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방금 보낸 편지에 대한 회신. 내가 황태자에게 보내었던 편지였다.
“들어와!”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리온이 작은 은반에 편지를 받친 채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은반에 편지를 올려서 가지고 오지는 않았다. 은반에 편지를 올려 가져오는 경우는 딱 하나.
황실에서 온 편지였다.
나는 급하게 은반에 든 편지를 들고, 편지칼로 편지를 뜯어냈다. 최대한 조급하지 않고 차분하게 행동하려 했는데 편지가 이상한 모양으로 잘린 것을 보면 실패한 듯했다.
너덜너덜해진 편지 봉투 안에 담긴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로 글을 읽기는 조금 버거웠지만, 편지의 내용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민하겠습니다,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
편지 안에는 이 한 줄의 내용밖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다라고?’
나는 혹시 숨겨진 내용이 더 있을까 싶어 편지를 요리조리 돌려서 보았다. 그러나 비밀 메시지 같은 건 없었다.
이 내용만으론 입궁을 허락한다는 건지, 아니면 막연히 발이나 닦고 기다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입궁을 해서 황태자와 대담을 나누어야 일이 진행될 터였다.
“마님.”
리온이 나를 불렀다. 그는 너절해진 편지 봉투를 나에게 건네었다.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금색으로 도색 되어 복잡한 문양으로 음각된 자그마한 물건이 있었다.
“명패 같습니다.”
그 명패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린 나는 바로 명패를 챙기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씻고 옷도 깔끔히 챙겨입은 나는 밖으로 나왔다. 명패는 한 손에 꽉 쥐고 있는 채로.
마차에 탑승한 나는 마부에게 일렀다.
“빠르게 황궁으로 가자.”
* * *
명패를 보여주자 입궁은 문제없이 수월했다.
기실 리카르도에게 그의 명패를 빌려달라고 하면, 조금 더 입궁 시간이 빨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를 만나려고 한다는 걸 그가 알면 나를 막을 것이 눈에 선했다.
그는 황태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이.
하지만 나에게 별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미리 황태자가 시종에게 일러두었는지 입궁과 동시에 한 명의 시종이 다가와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또 여기에 올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사방이 하얀 매화궁의 응접실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똑똑.
노크 후, 곧바로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내가 줄곧 기다리던 황태자였다. 개미조차 죽이지 못할 듯한 천사 같은 얼굴은 어제 잠을 못 잤는지 안색이 초췌하고 파리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불렀다.
“태자 전하.”
그는 대답 없이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나를 보는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