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중앙 귀족들과 레니에 후작 부인.
나는 펠릭스의 말을 듣자마자 근거는 없지만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서로 같은 사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까. 펠릭스와 나는 테이블에 있는 차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단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지금 그 사건을 지휘하는 건 태자 전하일 겁니다.”
“그렇겠죠…….”
리카르도에게도, 마리어스 기사들에게도 지금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황태자의 도움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황궁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나 같은 귀족에게 황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권한은 없을 터.
막막한 기분이었다. 펠릭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색이 어두웠다.
그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백작 부인. 그런데 저택엔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지금 문지기가 각하의 심부름을 가서 자리를 비웠을 텐데….”
“아, 그게…….”
차마 개구멍 같은 곳을 통해 들어왔다고는 실토하지 못해 말을 흐렸다. 내 어색한 반응에 펠릭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짙게 물드는 순간, 구세주처럼 응접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방문할 사람은 없는데…… 설마!”
펠릭스가 급하게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연 그의 눈이 커졌다. 나 또한 엉거주춤 일어나 문틈으로 누가 왔는지 살펴보았다.
제도 사람보다 훨씬 키가 크고 오늘처럼 깊은 밤을 떠올리게 하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미남자. 그리고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
‘리카르도!’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심문을 받고 있단 소식에 황궁에 오래 잡혀 있을 줄 알았는데 신분이 신분인 만큼 금방 풀려난 모양이었다.
“공작님!”
리카르도는 내가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내 드레스에 닿은 이후로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나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내 행색을 뒤늦게 살펴보았다.
‘완전 엉망이네.’
넝쿨 사이에 있던 개구멍으로 들어왔기에 드레스는 흙과 나뭇잎으로 더러웠고, 머리 또한 거칠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다가왔다. 싸늘히 굳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그, 그게.”
드레스에 꽂힌 시선의 의미는 분명했다.
급하게 개구멍을 통해 들어온 것이라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못한 내 눈은 정처 없이 응접실 안을 헤매었다.
“소식을 접하고 너무 놀라서… 길바닥에 한 번 나뒹굴었어요.”
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지어낸 말에 불과하지만 내 입으로 말하니 우스꽝스러워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이걸로 분위기가 환기되었겠지.
그리 생각했는데 펠릭스와 리카르도의 표정은 더 딱딱히 굳어 있었다. 이게 아닌데…?
“다친 곳은 없나?”
“약이랑 붕대를 챙겨오겠습니다”
“괜찮아요! 저 다친 곳 없는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펠릭스는 붕대를 챙기러 응접실을 나갔다.
그로써 응접실엔 나와 리카르도만이 남은 상태가 되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왜 또 사과하는 거지?”
내 사과에 곧장 심기가 불편해진 듯 리카르도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보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리카르도는 늘 내 사과에 거북해했다.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 아이처럼.
이다지도 사과를 싫어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참 별난 사람이 아닌가.
“심문을 받으셨다고…….”
“아아.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리카르도는 고개를 저으며 응접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의 얼굴엔 피곤함이 얕게 묻어 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 또한 그 사건으로 심문을 받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었을 터다.
나는 곧장 리카르도의 맞은편에 앉았다. 피곤해 보이는 그를 두고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다친 곳은 없는 건가.”
나른히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사지 멀쩡하답니다.”
내가 싱긋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때와는 달리 리카르도의 심각한 표정은 펴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안셀모가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리카르도의 입에서 뜻밖의 물음이 나왔다.
의무실에서 황태자는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리카르도가 질문한 의도에는 ‘아니오.’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리 대답해야 했거늘 리카르도가 이 순간에 황태자를 언급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지 고민하는 사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카르도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 홀로 결정을 내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 공작님? 어디 가세요!”
나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여 리카르도를 붙잡았다. 그가 어딘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엉겁결에 그의 팔을 붙잡은 나는 이 손을 놓아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대로 잡은 손을 놓으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나는 더욱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미쳤지! 오필리아!’
타인의 접촉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주의 팔을 붙잡다 못해 늘어지다니. 이렇게 끈질기게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 것마저 지뢰를 밟는 행위와 진배없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나에게 분노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 저랑 대화는 끝내고 가셔야죠.”
고작 나온 말이 이따위 당돌하기 그지없는 말이라니 이제 리카르도의 분노를 한몸에 받겠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리카르도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잔잔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할 말이 남아 있나.”
그의 말에 나는 급히 본론을 꺼내었다.
“아일라가 위험해요, 염치 불고하지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요?”
“……그 일로 아일라 레니에가 수감 되었었지.”
그제야 그도 내가 이곳에 온 까닭을 파악한 듯했다. 리카르도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단순한 움직임이었으나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나는 그 반동으로 인해 균형을 잃고 몸이 기울었다.
“!”
꼼짝없이 바닥에 처박힐 거라 생각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
대신 진한 머스크 향기와 함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슬쩍 눈을 뜬 나는 널찍한 품에 안겨 있다는 걸 눈치채고 화들짝 놀랐다. 그의 품에서 얼른 벗어나기 위해 바동거리는데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러다 또 넘어지겠군.”
“…….”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약과 붕대를 가지러 간다던 펠릭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리카르도에게 푹 안겨 있는 상태였다.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었다. 아마 내 낯빛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 오해예요.”
점점 얼굴에 열기가 몰려 홧홧하게 타올랐다.
“그대 말대로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군.”
리카르도가 뭉근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쳐다본담.’
그의 시선에 괜스레 부끄러워진 나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런 시선은 아일라에게만 보여주겠니, 남주야. 오해할 뻔했단다.
“바닥에 넘어지지 않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펠릭스가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길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리카르도는 고개를 까닥이고 소파에 앉았다. 다행히 자리를 뜨는 건 막은 듯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펠릭스가 타온 차를 한 모금 마신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아일라 레니에 영애에 관해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하지만 그 상황에선 그녀가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반면에 혐의점은 짙었지. 수감하라고 명한 안셀모의 판단은 타당하다.”
“단순히 와인을 건넨 게 혐의점이 있다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요?”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폐하께서 그 와인을 마시고 쓰러졌다는 게 문제지.”
“…….”
“그 와인을 조달한 시종은 이미 고문실에서 갖은 고문과 문초를 겪고 있는 상태야. 빠르면 수일 내로 죽고, 살아남는다 한들 고문 후유증으로 인간 구실은 힘들겠지. 아무리 황실이라도 명분 없이 평민 한 명을 그리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반란군 때문인가요?”
리카르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반란군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 황실에서 허튼사람을 고문하거나 죽이게 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그만큼 이 일은 경중이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멍한 얼굴로 찻잔에 담긴 물을 바라보았다, 맑은 찻물에 내 얼굴이 비쳤다. 연회를 위해 발랐던 립스틱은 볼품없이 번져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일라를 꺼내는 건 무리란 말씀이군요.”
맥이 탁 풀렸다. 무력감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처음부터 리카르도와 아일라를 이어주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하지만 나는 노력했는데. 나보고 더 이상 어쩌라는 거야.
후회와 분노가 얽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아일라의 편이 되어 주어야 할 남주인 리카르도는 제삼자처럼 굴고, 서브 남주인 엘렌은 본인 볼일에 급급해서 사라져 버리고.
섭섭하고 화가 났다. 원작 소설에서 알콩달콩했던 아일라와 리카르도를 흐뭇하게 읽던 추억은 재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순간, 한 남자의 목소리가 녹음기에 재생되듯 머리에 울렸다.
-도와드릴까요?
-영애의 모습이 마치 나처럼 느껴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