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만약 엘렌의 말마따나 황제의 음독 사건에 대한 책임자로 아일라가 잡혀 들어갔다면 그녀의 목숨은 당장 내일이라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구하자고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내가 지하 감옥이 어딨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지하 감옥을 알 만한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관계자뿐이겠지.’
관계자라 하면 황족과 황실의 기사들이었다.
그중 나랑 안면이 있는 사람은 리카르도와 마리어스 기사들.
……그리고 아일라를 가두라고 명한 당사자인 황태자였다.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해도 지금 시간에 리카르도가 어딨는지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설령 운 좋게 리카르도를 만난다고 한들, 그에게 무슨 말로 아일라를 꺼내 달라고 부탁한단 말인가.
심지어 황제를 음독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들어갔기에 리카르도가 내 부탁에 승낙한다고 해도 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리어스 기사도 마찬가지일 테고.
나를 돕고 싶다며 미소를 짓던 황태자가 선명하게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일라를 잡아넣은 장본인이, 다시 아일라를 꺼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
나는 슬그머니 가늘게 뜬 눈으로 엘렌을 보았다. 어쩌면 엘렌을 알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황궁의 지하 감옥은 비밀스럽고 미지의 공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엘렌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그런 곳.
그의 성향으론 한 번쯤 지하 감옥을 들어가서 약도까지 그렸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은 사실이었다.
나는 녹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의도가 분명한 시선이나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외면했다.
“왜, 왜. 갑자기 왜 피하는 건데.”
나는 급한 마음에 엘렌이 고개를 돌린 방향을 좇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다시 내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에 삐진 듯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문제 있어?”
“…오필은,”
그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감옥에 갇혀도 구해줄 거야?”
“……그걸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거야?”
나는 허탈한 얼굴로 그를 째려보았다.
지금 한시가 바쁜데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다니!
그런 의미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아도 그는 진지하게 내 입술만 보고 있었다. 대답을 듣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정말?”
내 심드렁한 어조에도 엘렌은 기쁜 얼굴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슨 어린애가 부리는 투정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에 입가에 있던 웃음기는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방금 내 대답은 진심이었다. 엘렌은 누구보다 내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친구…… 당분간은 그걸로도 좋겠지.”
그가 뭐라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으나 발음이 뭉개져 확실히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팔을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기에는 지금 당장 닥친 일이 너무 급했다.
엘렌은 그제야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연두색 눈동자가 신비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으악!”
나는 갑자기 바뀐 풍경에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엘렌이 장난스레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겁쟁이 오필, 놀랐어?”
그걸 말이라고! 마치 63빌딩에서 낙하산도 없이 추락하는 아찔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약간의 멀미도 느꼈다.
‘알렉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잠깐 알 것 같아…….’
그도 자신의 연구실에서 열심히 연구하다가 엘렌에게 내 사무실로 끌려온 적이 있었지. 원인만 보자면 나로 인해 끌려온 것이었기에 그에게 더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어둡고 음습한 곳이었다.
“설마 여기가…….”
내가 엘렌에 의해 끌려온 곳이 어딘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감옥이었다.
나는 흡, 하고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정말로 여기가 지하 감옥이라면 내 목소리에 간수들이나 기사들이 침입자를 붙잡으러 달려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괜찮아, 오필. 우리 목소리랑 모습은 남한테 보이지 않는 상태거든.”
“그, 렇구나.”
그것은 참 다행인 일이었지만, 마법으로 이런 짓도 할 수 있다니. 여러모로 위험하게 악용이 될 수 있는 마법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 마법을 쓰는 사람이 엘렌이라면 더욱…….
“응? 왜 오필?”
“아무것도 아냐. 아일라를 얼른 찾자.”
지하라 그런지 왠지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그가 살짝 내 어깨를 잡더니 내 몸에 따뜻한 온기를 채웠다.
“고마워.”
“별말씀을. 그런데 오필.”
“응?”
“여기서 레니에 영애를 구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
그의 말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한 치 앞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를 구출한 후, 다음의 일.’
그녀를 성공적으로 감옥에서 구출한다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후에 벌어질 일이 더 큰 문제였다.
황실은 탈옥한 그녀의 목에 현상금을 걸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일생을 숨으며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하고, 비참히 여생을 보내야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내 섣부른 판단으로 그녀의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게 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멍청한 오필리아, 그렇게 자책하며 나는 해결책을 고심했다.
원작에선 이 사건은 반란군의 소행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하지만 아일라가 반란군과 손을 잡지 않았다는 건, 원작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원작에선 그녀가 독극물의 배합법을 알아내 그게 반란군이 사용한 독이란 걸 알아냈었지.
하지만 그게 아일라를 꺼낼 해결 방법은 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황실 측에 아일라를 꺼내 달라 얘기한다면 미친 소리로 치부하며 앞으로 내 얘기는 들어주질 않은 공산이 컸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와인에 독을 타서 황제에게 건네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내야 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일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 그때야말로 최후의 수단으로 아일라를 탈옥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걸 내가 무슨 수로 밝혀내….’
아일라에게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의무실에만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한 번 자책하는 나를 보는 엘렌의 시선이 미묘했다.
“의무실…….”
“무슨 짚이는 데가 있어?”
내가 묻자 엘렌이 고개를 갸웃하며 천연덕스레 말했다.
“왜 하필 황태자랑 오필이 같이 있던 사이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조금 이상하지 않아?”
그의 말을 나는 천천히 곱씹었다. 조금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의무실로 들어가기 바로 전에 황제는 건강한 혈색으로 자신이 제왕임을 보여주듯 느긋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내가 황제의 미소를 보게 되는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줄이야.
그러나 나는 황태자와 내가 의무실에 들어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 그 일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연. 그거 하나밖에 설명이 되지 않은 상황. 한편으로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엘렌의 얼굴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 * *
다행히 감옥에서 만난 아일라는 그리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모진 일은 당하지 않았는지 감옥 바닥에 의해 조금 더러워진 드레스를 빼고는 연회장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많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태일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일면 불안감을 비추긴 했으나 아일라는 무언가 생각에 사로잡힌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였다.
“아일라, 얼른 구해줄게요.”
그녀는 엘렌의 마법으로 나를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내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시선이 순간 내 쪽을 향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감옥을 나왔다.
당장 감옥에 쳐들어가서 아일라를 빼내 온다는 계획은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다다랐으므로 다른 도움이나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런데 마법으로 감옥에 나온 후, 엘렌은 돌연 ‘잠시 일이 있어서.’라는 말과 함께 증발했다. 홀로 연회장 문 앞에 남은 나는 망연자실했다.
나 혼자 황궁에 들어갈 권한은 없거니와 순간이동 마법 같은 것도 없기에 황태자를 만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게 아일라보다 중요하다는 거야?’
일단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기에 마차를 타고 리카르도의 사택으로 향했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백작 가문의 마차를 타고 중간에 마리어스 기사들이 있을 여관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이미 사라진 채였다. 아마 황궁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다시 복귀 연락을 받았겠지.
나는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도에 있는 리카르도의 사택에 다다랐다.
이렇게 미리 연락도 없이 그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두 번째였다.
‘무례하다고 꾸짖어도 할 말 없는 상황이네.’
하지만 아일라의 목숨과 비교할 바는 못되었다.
나는 고민 없이 사택 앞에 있는 대문을 쾅쾅 두들겼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경비를 서는 기사마저도.
초조해진 마음에 연신 대문만 두들기는데 순간 옆에 개구멍 같은 게 눈에 띄었다.
“이건…….”
무슨 이유로 만들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었다. 나는 빠르게 개구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연회를 위해 입고 나온 드레스가 너무 거추장스러웠지만 지금 당장 옷을 갈아입을 여유는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으나 이 순간, 황태자가 조금만 심사가 뒤틀린다면 아일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그렇게 개구멍으로 간신히 리카르도의 사택 안쪽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왠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불법적인 일이 맞아…….’
그에 대한 사과는 리카르도를 만나고 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은 아일라를 구하는 게 우선이니까. 나는 사택의 현관을 두들겼다.
“공작님! 공작님! 저 오필리아 마르그리트예요!”
안에서 대꾸가 없었다. 한참을 문을 두들기다가 이윽고 문이 열렸다. 저번에 백작저에 리카르도와 함께 온 보좌관, 펠릭스 에드워드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져 있었다. 심각한 표정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듯했으나 나는 다급히 본론을 꺼냈다.
“에드워드 자작, 한밤중에 실례지만 공작님 좀 불러주시겠어요? 급한 용무랍니다.”
“공작님은 현재 안에 안 계십니다.”
“네?!”
나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가 여기 없다면 어디 있다는 거지? 펠릭스는 내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철부지 상사를 모시는 듯한 애환이 짙게 묻어 있었다.
“연회에서 벌어진 일은 알고 계시나요, 부인.”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펠릭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각하께서도 책임자로서 황궁에서 심문을 받고 계십니다.”
“잠시만요.”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그의 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작님이 심문하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