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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56화 (57/124)

56화

베로니카 황녀도 안 그런 척해도 내내 황제의 상태가 신경이 쓰였는지 침대에서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황태자와 함께 의무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던 찰나에 틈으로 나를 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무언가 이상했다. 아까 미온했던 태도와 달리 한없이 차갑고 시린 시선이었다.

바라던 대로 의무실에 혼자 남게 되었으나 창 너머로 보이는 밖은 해가 저문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칠흑처럼 어두웠다.

‘아일라를 혼자 너무 오래 내버려 뒀어.’

나는 그녀의 존재를 뒤늦게 상기하고 급하게 의무실을 나갔다. 연회장에 사람은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다행히 어머니와 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연회장의 주인공이 독을 마시고 쓰러졌으니 연회가 중간에 중단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일라!”

장내에 아일라가 보이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혹시 먼저 집에 간 거라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큰일이었다.

레니에 후작 가문 사람들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에르도안 공작과 혼인을 올린 그녀를 호시탐탐 노리지 않았는가. 하물며 리카르도의 비호도 없는 그녀는 그들에게 더 만만한 먹잇감일 터였다.

자리를 이렇게 오래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

걱정이 물밀 듯 밀려왔다.

나는 구둣발로 큰 연회장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발이 아려왔지만 그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아일라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의 고집을 꺾고 파트너로 알렉스를 데리고 가는 거였는데, 그라면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우는 일은 없었겠지.

낭패감과 후회로 점철된 얼굴로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겨 연회장을 나와 마차로 향했다. 마차가 주차된 곳에는 두세 대 정도의 마차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서는 별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이미 그녀가 마차 안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급하게 마차 쪽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그런데 누군가가 튀어나와 내 팔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엘렌?”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헤프다고 생각될 정도로 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엔 미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내 발 쪽에 시선이 향해 있었다.

“아프지 않아?”

“아아…….”

아일라를 찾느라 거의 달리다시피 연회장을 돌아다녔기에 한참 전부터 구두 안에 있는 내 발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나는 엘렌의 손을 밀어냈다.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든 잠깐만 미루자. 마차에 아일라가 있을 거야. 그것만 확인하고….”

“레니에 영애를 찾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그가 내 말을 뚝 잘랐다. 나는 다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의문스러운 말을 한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가 농을 던지는 건 아니란 뜻이었다. 그래서 아일라에게 무슨 심각한 일이 생긴 건가, 가슴 한쪽이 선득해졌다.

나는 그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 몰라 마부에게 물었다.

“여기 혹시 아일라가 오진 않았어?”

“아뇨. 지금 저희 마차에 돌아온 건 마님이 처음입니다.”

마부의 확신에 찬 대답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등 뒤에 있는 엘렌에게 서둘러 돌아갔다.

“아일라가 어딨는지 알아?”

“오필, 발 좀 보여줘.”

“무, 뭐?”

“상처투성이잖아. 나한테 발 보여주면 영애가 어딨는지 말해줄게.”

“여기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말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말소리가 없었다면 이곳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을 것이다.

“들킬 게 불안하면 마차에서 치료해줄까?”

“…….”

오히려 마차 안의 좁은 공간에서 그에게 치료를 받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았다. 아니, 그의 말대로 밖에서 하면 누구한테 들킬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 구두를 벗고 그에게 발을 내미는 상상을 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상했다.

“…여기서 하자.”

그래서 고민 끝에 밖에서 치료하는 쪽을 택했다. 굳이 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의 치료를 받겠다고 한 이유는 엘렌의 고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치료를 받으면 말해주겠다고 말한 이상, 치료를 거부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벤치에 앉은 나는 빠르게 구두를 벗었다. 어서 이 일을 끝내고 아일라의 행방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낯부끄러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욕구도 공존했다.

그래서 부러 이 상황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뻔뻔히 턱을 치켜들며 맨발을 그의 쪽으로 쭉 내밀었다.

“얼른 치료해줘.”

지금 보니 내 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무실에서 앉아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보니 구두를 신고 오래 걸을 일이 없어 발이 구두에 익숙해지지 않은 터였다.

단순히 빨갛게 부어올랐다고 생각했는데 피가 나거나 물집이 잡힌 부분이 많았다. 왠지 내 발 상태를 알아차리자 더 발이 아픈 느낌이었다.

“……?!”

엘렌이 빙긋 웃으며 무릎을 꿇고 내 발을 덥석 붙잡았다. 당황한 나는 손을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물론 누가 들을 수도 있기에 내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인데!”

“치료하는 거잖아.”

“마법으로 치료하는 건데 내 발은 왜 잡아?”

그리고 그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실도 심히 부담스러웠다.

“치료마법은 원격이 불가능하거든.”

설령 그의 말이 사실이라도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는 마탑주였다.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발을 도도하게 까닥였다. 민망함을 덜기 위한 행위였다.

“그럼 얼른 치료하고 끝내세요.”

“예, 마님.”

엘렌은 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곧 그가 발을 잡은 손에 붉은빛이 새어 나오며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내 발을 감쌌다. 아까부터 계속 쓰라렸던 발이 언제 통증이 있었냐는 듯 감쪽같이 고통이 없어졌다. 어느새 민망함은 잊어버린 채 나는 신기한 시선으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끝난 치료였다. 다시 내 쪽으로 발을 끌어당기려고 했으나 그는 내 발을 잡은 채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눈썹이 절로 치켜 올라갔다. ‘얼른 그 손 안 떼?’ 하는 시선을 알고 있음에도 엘렌은 딴청을 부렸다.

“오필은 발도 곱네.”

“무슨 개소리야.”

냉담하게 일갈한 나는 빨리 그 손을 놓으라 재촉했다. 엘렌은 아쉬운 얼굴로 내 발에서 손을 떼었다.

“그럼 이제 말해줘. 아일라는 어디 있는데?”

레니에 후작 가문 사람들이 이미 그녀를 후작저로 데리고 간 거라면……. 그러나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영 다른 이야기였다.

“영애는, 지하 감옥에 있어.”

“뭐?!”

나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그의 팔을 거세게 붙잡았다가 금방 내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달며 말했다.

“노, 농담하지마, 농담할 기분 아니야.”

“…….”

피식 웃으며 들켰다며 능청스레 대답할 엘렌은 내 말에도 여전히 무표정했다. 낯설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럼! 그게 진짜란 말이야?!”

그에게 묻는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일라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냥 감옥도 아닌, 지하 감옥에 있단 말인가.

지하 감옥이라 하면은 황궁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대역죄인들이나 갇히는 곳이 아닌가.

“대체 왜, 아일라가 왜?”

그가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작은 빛무리들이 일렁였다. 이어 그것들은 내 앞의 어두운 공간에 모여들어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이건 아일라랑…… 황제 폐하?”

내 말이 끝나자마자 빛무리들이 다시 움직였다. 빛무리들은 한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림 속에는 아일라가 황제에게 와인을 건네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빛무리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가 건넨 와인을 마신 황제가 와인 잔을 떨구며 쓰러진다. 그 광경을 보는데 왠지 숨이 막혔다.

이어 쓰러진 황제를 의무실에 있던 궁내의가 진찰하며 급하게 장 밖으로 이송했다. 황태자는 아일라를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기사들은 명령에 따라 그녀를 연행했다. 혼돈 그 자체였다.

그게 끝이었다.

역할을 마친 빛무리는 허공으로 날아가 흩어졌다.

일련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는데…….

“이게 사실이라고…? 아냐, 아일라가 그럴 리 없어. 우연히 독이 든 와인을 운 없이 건넨 것뿐일 거야.”

“레니에 영애가 건넨 와인에 독이 들어 있던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바보도 아니고, 독을 넣은 당사자가 본인 손으로 와인을 건넨다는 게 말이 돼?”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결론적으로 황제가 쓰러졌으니 당장 그 책임을 물을 희생양이 필요하잖아?”

“그, 그게 아일라라고?”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찼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애가 황제를 음독한다는 게 말이 돼?”

“설사 그 와인을 건넨 사람이 7살 어린애라도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을 걸. 물론 배후가 누구인지 갑론을박으로 이야기를 다투겠지만.”

7살 어린애라고 하자 아까 내 드레스를 붙잡고 엉엉 울던 로디안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얼른 구하자.”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불쑥 내 의견을 앞세웠다. 어서 아일라를 감옥에서 구출해야 한다. 나는 막연히 그런 의지를 불태웠다. 한 달 넘게 하루의 반나절을 매일 같이 보내던 아일라의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회귀하기 전에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도 참 맑고 깨끗한 미소였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녀가 지하 감옥에 있다는 사실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감옥에서 혼자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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