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고요한 표정이었지만 금색 속눈썹 아래 감춰진 눈동자는 나의 작은 반응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묘하게 고압적인 분위기라 함부로 입을 열기도 망설여졌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녀에게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는 이유가 어딘가 있을 것이다. 설마…….
별안간 ‘황녀도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자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다.
단순히 얼굴을 감추기 위해 썼건만, 가면은 표정을 감추는 데 더 실용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질문을 바꿀까요?”
황녀의 눈에 감추어지지 않은 귀찮음이 묻어났다. 그녀는 왜 자신이 이런 곳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 말이야.’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베로니카 황녀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시종일관 무감하고 무표정한 얼굴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부인은 안셀모와 무슨 관계죠?”
“황녀 전하께서 무슨 상상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그런 관계가 아닌….”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갑자기 말이 짧아졌다. 황태자비도 아닌, 황녀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기에 한편으론 당황스러우면서도 황당했다.
“안셀모가 리카르도를 제외하고 다른 누구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부인이 처음인데.”
“태자 전하라면 많은 영애에게 관심을 주지 않나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베로니카 황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서서 뭉근히 나를 응시했다.
다시 지독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제 나는 연회고 뭐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침묵이 감도는 사이, 나는 가면 아래로 황녀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황후 쪽을 닮은 황태자와 달리 그녀는 황제 쪽을 닮았다. 특히 무표정할 때 은근한 위압감을 주는 인상이 그랬다. 언제든 본인이 원할 때 눈앞에 있는 것을 사냥할 수 있는 배부른 사자와도 같은 여유로움도 공존했다.
지금은 세상만사가 귀찮은 듯한, 무심한 표정이나 그 아래엔 숨은 열기가 엿보였다. 저 눈빛이 뜻하는 바를 잘 알았다. 나 또한 사업을 시작했을 때 저런 눈빛이었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무감한 표정에도 리카르도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베로니카 황녀가 싸늘히 읊조렸다. 그녀가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속으로 뜨끔하다가 베로니카 황녀가 문 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말의 대상은 내가 아닌, 황태자라는 것을.
“마르그리트 부인.”
“네, 전하.”
그녀의 부름에 나는 일단 꼬박꼬박 대답했다. 연회에 참석한 이유도 그녀와 연줄을 만들기 위함이었으니, 가능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이미 좋은 인상을 남기기엔 늦은 것 같긴 하지만….’
황녀가 황태자와 내가 단둘이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 그거 하나는 알겠다. 그렇다면 황녀가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정보가 없는 나는, 우선 원작에서 황녀와 황태자의 사이가 어땠는지를 떠올려보았다.
원작에서 황녀의 비중은 그리 크진 않았다. 황제의 붕어 후에, 황태자가 황위를 물려받고, 황녀는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시기가 조금 묘하긴 하지.’
동생이 황위를 잇자마자, 누나가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갔다는 사실은 피치 못할 이유가 있지 않고선 둘의 관계가 삭막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베로니카 황녀는 조금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로 얽혔든 정리하는 게 좋아요. 둘이 정을 통하는 관계라면 안셀모 쪽에서 빠르게 정리하겠지만.”
나는 그녀가 왜 이 이야기를 꺼낸 건지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녀는 나에게 경고해주고 있었다.
“참견은 여기까지예요.”
그녀가 나를 스쳐 지나가 의무실에 있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건지 물어도 대답해주진 않겠다는 무언의 대답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죽은 듯 누워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졌는데 이곳에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이 생각은 그녀가 의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줄곧 내 머릿속에 머물러 있었다.
“…….”
하지만 누워있는 그녀의 혈색은 창백했고, 환자처럼 보였다. 누구보다도 의무실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몸이 좋지 않았나 보네.’
그럼 의무실에 나와 같이 있는 게 그녀에겐 불편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다가 조용히 의무실을 나가야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데 작지만 또렷한 말소리가 들렸다. 베로니카 황녀였다.
“여자끼리 파트너를 한 발상은 독특했어요. 소문으로 들었지만 설마 정말로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 네.”
“재밌었어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조금은 인심 쓰듯 건네는 말 같아서 온전히 칭찬으로 듣기에 미묘한 느낌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욕은 하지 않으니 감지덕지라고 해야 할 마당이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정해놓은 암묵적인 규율을 깬 나를 향한 힐난의 시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녀의 말로 아까 연회장에서 그녀가 보낸 시선을 비로소 이해했다.
나와 아일라가 파트너로 참석한 것이 독특하고 재밌다니.
‘독특한 건 내 쪽이 아니라 그쪽 같은데.’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고고한 황족이 처음 보는 남 앞에서 간이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 독특한 일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운 행동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다시 말을 걸었기에 이렇게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뒤로 돌아 아까 황녀가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저쪽은 누워 있는데 나는 앉아도 괜찮겠지.’
그녀와 만날 기회도 이번이 아니라면 거의 없을 것이다. 베로니카 황녀는 활발하게 사교계에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차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이걸 기회로 삼는 게 나한테 이득이었다. 내가 그녀로 제일 큰 이득을 취하기 위해선 국혼이 최고의 시나리오이긴 한데.
여기서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혼처를 구하는 중이냐고 묻는 건 미친 짓이었다.
“예전부터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 영광이었습니다. 전하.”
내 말에 황녀의 눈이 번뜩 뜨였다. 말간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 빛난 채 나를 응시했다.
“왜 보고 싶었는데요?”
“그야…….”
예의상 던진 말을 이렇게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다.
베로니카 황녀는 끈질긴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보고 싶었는지 기필코 들어야겠다는 눈빛에 당혹스러웠다.
‘여기서 잘 대답해야 하는데.’
그녀에게 점수를 딸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부티크 사람들에게 건너 들은 그녀의 외모에 관한 찬탄뿐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주변에서 숱하게 들어왔을 터.
제아무리 입에 발린 소리라도 똑같은 소리만 내리 들으면 식상하게 들리는 게 사람의 심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 그 점을 공략하자!
“워낙에 폐하께서 금지옥엽으로 아끼시느라 베일에 싸인 황녀님이 어떤 분일지 줄곧 궁금했답니다.”
“금지옥엽…….”
베로니카 황녀는 내 말을 한번 되뇌며 중얼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게 금지옥엽 키워진 딸이 아버지가 쓰러졌는데 여기에 누워 있으면 보기 좋아 보이진 않겠어요. 부인.”
“…….”
어디서 꽈배기라도 잡수고 오신 모양이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으나 베로니카 황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반짝이는 눈을 눈꺼풀 아래로 숨겨버렸다.
오늘 이 연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나는 그녀가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몰랐지만, 지금은 알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마도 그 말 속에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아뇨, 폐하를 도와드리고 싶어도 황녀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방금 베로니카 황녀가 동생을 호출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에겐 통솔권이 없어서 안셀모를 불러야 했을 상황은 그녀에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렇게 나와 같이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이판사판으로 솔직한 내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
베로니카 황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에 속이 타는 건 나였다.
‘아, 괜히 이런 말을 했나.’
황녀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니, 그런 말은 조금 다르게만 생각하면 굉장히 무례하고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었다.
구구절절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해명해야 하나 싶을 때, 베로니카 황녀가 입을 열었다.
“……안셀모가 왜 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지 모르겠네요.”
별로 좋은 의미로 말한 것 같지 않아서 ‘그, 그런가요.’ 하고 떨떠름한 대답만 내뱉었다. 베로니카 황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다음에도 만날 일이 있으면 좋겠어요. 나도 부인에게 관심이 생겼으니.”
“…감사합니다.”
당최 생각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 그녀가 면전에서 칭찬을 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분간하는 것을 포기했다. 역시 사람은 나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게 제일 마음 편하다니까.
-벌컥.
아까처럼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황태자였다. 창백한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노크도 할 줄 몰라?”
베로니카 황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에 띄게 경직된 모습이었다. 황태자의 유려한 얼굴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 모란궁으로 가야 돼.”
그의 얼굴엔 평소의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폐하께서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