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의문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절 도와줌으로써 얻은 이익이 이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궁금했거든요. 외부에 나가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그가 빙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우리 같은 부류의 사람이.”
‘우리 같은 부류?’
그의 말 한마디로 한순간 황태자와 내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말에 찝찝함보다는 궁금함이 앞섰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그 생각을 짐작한다는 듯 황태자가 말했다.
“저 또한 태어날 때부터 홀로 적자였기 때문에 후계자로 내정 받고 많은 교육을 받아왔죠.”
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황자는 언제든 더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주변에서 다른 황자가 태어나기 전에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신물이 날 만큼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시선을 들어 똑바로 나를 응시했다. 아름다운 금안이 나를 탐색하듯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얘기라면… 아무래도 가문에서 출가했다는 이야기겠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접하고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저와 신분과 성별만 다를 뿐, 알고 보면 저희보다 비슷한 처지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후계자 하나만 보며 앞만 보고 달렸을 영애가 그렇게 동생한테 던지다시피 후계 자리를 포기하고 출가했으니, 한편으론 혼자서 얼마나 잘살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카시어스 영애는 혼자가 아닌, 외간 남자랑 정분이 난 걸로 소문이 나지 않았나요?”
“나는 내 앞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묘하게 재수가 없어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한 말의 뉘앙스도 조금 이상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보단 정분이 났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황태자가 과장하여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담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은 관찰력도 뛰어나군요.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그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 하나에 모든 걸 포기하는 이야기는 통속소설이나 연극에서만 있을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고요.”
아침마다 염문설로 신문 1면에 실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냉담한 시선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시나요?”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낭만을 챙기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영애의 사업이 성공한 이유도 그에 대한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예리한 지적이었다. 표면적으로 낭만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들 귀족들은 뼛속까지 실리주의였다. 그래서 내 사업이 성공하게 된 것이고. 그러나 원작에서 속없이 바람이나 피우던 그의 이미지가 내 안에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꽤 놀랍게 느껴졌다.
“그럼 하루 걸러서 연인이 바뀌시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이 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터.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내 말에 황태자는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히며 입을 다물었다.
‘말 못 할 심각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긴장 어린 시선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에 바짝 힘이 들어간 내 어깨는 허무하게 축 내려갔다.
“없습니다.”
“네? 없다고요……?”
“적어도 영애가 생각하는, 심각한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욕구와 열락 정도가 되겠군요.”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에 대한 이미지를 전면 수정할 의향이 있던 내 의지는 놀랍도록 빠르게 식어갔다. 짜게 식어가는 내 모습에 황태자가 손바닥을 짝, 맞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만들었다.
“아, 그래서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재밌는 발상을 떠올린 건가요?”
“네?”
“내가 허니문에 방문하는 이유가 다른 혼처를 찾기 위해서라는 건 당사자인 나도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화난 고티에 황녀를 어르는 일은 꽤 힘들답니다.”
갑자기 의무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 이야기가 이 순간에 나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 소식에 떡밥을 준 건 내가 맞지만 그렇게 해석을 한 건 오로지 황태자비, 본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기에 내 눈동자는 갈 길을 잃고 정처 없이 의무실 안을 헤매었다.
그런 나를 보던 그는 빙긋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영애. 너무 경직되어 있는 듯해서 내 딴엔 농담을 해 봤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군요.”
갑자기 얼굴이 시원해졌다. 눈 깜짝할 사이 그가 내 가면을 벗기고 자신의 얼굴에 쓰고 있었다.
“영애를 탓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는 이런 무례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을 겁니다.”
푸른 보석으로 장식된 여우 가면이었는데 나보다는 그가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우리 관계에 신뢰를 더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언제든 말할 수 있죠.”
나는 의무실 흰색 벽에 달린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나눈 지 10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이렇게 그와 단둘이 의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계속 그에게 휘둘리는 느낌이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황태자가 가지는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자신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결국 나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 같기는 한데….’
하지만 그게 나를 도와줄 동기는 되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해 드는 생각을 솔직히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황태자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영애, 어떤 큰 착각을 하나 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제가요?”
“내가 영애를 도와주는 데 큰 노력이나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아니지만…….”
“영애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영애는 모르겠지만 이미 중앙 회의에서는 마르그리트 백작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는 발언도 나오고 있고요.”
“…그렇군요.”
백작이란 작위를 받고 궁내 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상태니, 귀족들이 의구심을 갖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나 또한 얼른 백작으로 세울 사람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내 증언 한마디면 간단히 풀릴 문제입니다. 마르그리트 백작에 대한 것도, 동시에 영애가 로위나 카시어스가 아니라는 것도.”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황태자였다. 그런 그가 마르그리트 백작과 나에 대해 해명해 준다면 귀족들의 의심은 사르르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그는 가면을 쓴 채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의 금안이 가면 안에서 요요하게 빛났다.
“나는 영애가 그 일을 관두지 않길 바랍니다.”
“왜요?”
“아깝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힘들게 키운 사업일 텐데 혈육에 얽매여 7년의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리고 노력해서 열심히 모은 자산으로 산 작위를 손 하나 보태지 않은 남이 가져야 한다는 것도 분통이 이는 일이었다.
“태자 전하가 이렇게까지 저를 생각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영애보다는 나를 생각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영애의 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 순간, 의무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문이 돌연 열렸다. 황태자가 급히 가면을 벗어 나에게 다시 씌워주었다.
“안셀모.”
문이 열린 순간은 가면을 벗은 상태였기에 나는 딱딱히 굳은 채 문에서 등을 지고 서 있었다. 그런데 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였다.
황태자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여자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황후, 황녀, 그리고….
‘황태자비.’
제발 내 등 뒤에 있는 사람이 황태자비는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괜히 없는 사실이 만들어져 남의 치정 싸움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쥐뿔도 없었기 때문이다.
문틈 사이로 들리는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얽혀 부산스럽게 느껴졌다. 으레 연회장에서 들리는 소음이라기엔 혼란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가면을 고쳐 쓴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총명하게 빛나는 짙은 청록색 눈동자가 나를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황제의 첫째 딸이자 황태자의 누이 베로니카 황녀였다.
황태자비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베로니카 황녀의 시선이 황태자에게 향했다.
“폐하께서 쓰러지셨어.”
“……뭐?”
베로니카 황녀의 말을 전해 들은 황태자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나 또한 놀라 굳어 있었다.
‘원작이 진행된 건가?’
“그래서 지금 상태는?”
“궁내의가 살펴봤는데 별로 안 좋아, 기사들은 네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어.”
기사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면 단순히 황제가 병으로 쓰러진 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한편, 그녀의 말에 황태자는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그를 따라 의무실을 나가려고 했지만 왜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따라 의무실을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황녀는 내 예상과 달리 외려 문을 닫고 의무실에 들어왔다. 아까는 황태자였는데 이번엔 황녀라니.
‘이 상황 또 뭐야.’
베로니카 황녀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은 예전부터 바라온 바였지만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궁에 초대를 받거나, 티타임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였지.
황제가 쓰러진 상황에서 그녀와 단둘이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베로니카 황녀의 안색도 황태자와 같이 창백하고 핏기가 없었다.
파리한 얼굴을 한 그녀는 피곤한 기색으로 그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야트막한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하지.’
아버지가 쓰러진 상황인 만큼 일단 안심시키는 말을 건네는 게 낫겠지. 사람을 위로하거나 안심시킬 때 하는 말은 절대로 허투루 내뱉어선 안 되는 법이었다. 급하게 머리를 굴려 그나마 괜찮은 말을 꺼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침묵보다 나은 말을 찾지 못했다.
그 고민이 무색하게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눈을 감고 있던 베로니카 황녀가 침묵을 깼다.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
“네, 황녀 전하.”
“…….”
그녀는 이마를 짚은 채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아까 연회장에서 느꼈던 시선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당신 정체가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