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리카르도가 굳은 얼굴로 내 뒤를 쫓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더이상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리카르도.”
황제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온화한 미소를 지은 황제는 친조카가 자신의 연회에 참석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얼굴로 조카를 환대했다. 조명 아래에 있는 황제는 중년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혈색 좋은 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이 연회였지.’
저렇게 건강한 사람이 와인 한 모금으로 식물인간으로 전락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나던 때가.
황제를 꽤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되자, 원작을 알고 있는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느려졌다. 아직 그에게 독극물에 대한 사실을 알리기엔 늦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저번에 생각했던 바와 같이 그 독극물이 설령 발견되더라도 그걸 제보한 나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최소 공범으로 같은 취급을 받으며 심문을 받겠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출처도 모호했다. 미래의 일이 적힌 소설을 발견해서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걸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신분을 숨기고 있는 내가 그 사건에 참견하는 건 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황태자를 보았는데,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그 눈빛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금방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일순 그가 내비친 감정을 읽었다.
‘불쾌함?’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 설마 같이 의무실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는데 내가 한눈을 팔아서 그런 건가?
사람 간의 예의를 생각하면 내가 잘못한 일은 맞지만, 황태자가 기별도 없이 허니문에 방문한 일이 떠오르자 내 표정은 떫은 감을 씹은 마냥 떨떠름해졌다.
‘완전 신분이 깡패여. 아주.’
나와 시선이 마주친 황태자가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언제 그런 감정을 비치었냐는 듯이. 그의 반응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나는 황태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내가 여기서 뭘 하겠어.’
황제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거두기로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했다. 이 사건은 리카르도와 아일라가 알아서 잘 해결해 나갈 것이다.
‘잠깐.’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황태자에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아일라가 이 사건에 관여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는 것.
그녀가 리카르도와 약혼을 치렀어야 할 원작이 틀어진 탓이었다. 그럼 완전히 외부인과 다를 바 없는 그녀가 그 사건에 개입을 할 여지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황제 음독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인물은 아일라였다.
‘내가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원작이 틀어졌으니 어쩌면 황제가 음독으로 쓰러지는 사건 또한 틀어졌을지도 모른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도 원작을 알고 있는 이상 찝찝함을 덜어낼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요?”
아까부터 입을 다물며 머뭇거리는 내가 이상한 모양인지 의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황태자가 물었다.
“아뇨, 별거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의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궁내의가 나왔다. 궁내의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 황태자 전하. 어디가 아프십니까?”
“아.”
궁내의의 존재를 인식한 황태자가 흘긋 문가로 눈짓했다. 그것을 본 궁내의는 발 빠르게 의무실을 나갔다.
의무실에는 나와 황태자, 단둘이 남게 되었다. 한결 대화를 나누기 편해지기는 했지만 조금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이제 단둘이 남았군요.”
황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의미심장한 어투였다. 게다가 대화의 내용도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나는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경계심을 내색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아까는 무슨 생각이셨죠?”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 아니, 카시어스 영애.”
“…….”
그가 내 정체에 대해 짐작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았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니 간담이 서늘했다.
“가면이 답답하지는 않나요?”
그의 시선이 떨리는 내 손끝에 향해 있었다. 그는 굳이 그 시선을 거둘 의향은 없어 보였다.
“별로 답답하지는 않답니다.”
내가 얼굴에 쓴 가면을 만지며 말하자 황태자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그 가면도 있었죠. 제가 말한 가면은 그걸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가 말한 건 로위나 카시어스라는 존재가 세간에서 쓰고 있던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라는 가면이었다. 사실 나는 그가 말하는 바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가능한 이 이야기의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그는 의무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내내 입가에 걸던 미소를 지웠다.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그는 미소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도 그는 늘 웃으며 귀족 영애들을 홀리는 사람으로 묘사되었으니.
“카시어스 부인이 영애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더군요.”
“…….”
그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를 붙잡은 어머니의 손길에서 다급함을 느꼈다. 아마 황태자가 오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로위나라고 부른다면, 만약 내가 로위나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나를 로위나라고 소문을 퍼트렸을 테니 말이다.
사교계는 이다지도 낙인이 찍히기 쉬운 곳이었다.
“꽤 영애가 곤란한 상황에 있는 듯해서 도와드렸습니다.”
황태자는 호의를 베푼 사람처럼 시혜적인 태도를 보였다. 도와줬다는 표현은 틀린 게 없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가 재수 없어 괜히 부정의 말을 툭 내뱉었다.
“전혀 그런 건 없었답니다.”
“그럼 다시 카시어스 공작 부인을 부를까요?”
“아뇨.”
그건 안 되지! 반사적으로 나온 단호한 대답에 황태자가 후후,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런 그를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엘렌의 통찰 능력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싶었다.
‘물론 황족이니 그 능력은 통하지 않겠지만.’
“도와줄까요?”
“네?”
황태자가 불쑥 말했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에 느긋한 태도로 몸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 카시어스 영애로 밝혀지지 않도록 도와드릴까 묻는 겁니다.”
“…….”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방금 그렇게 생각했지요?”
진심으로 그가 내 속마음을 읽은 줄 알고 뜨끔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체면이나 예의를 차리는 일은 시간 낭비였다.
“사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 궁금하기는 해요.”
“의도라는 단어는 꽤 불순해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영애를 도와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저로선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이해합니다.”
이해하는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꾹 참았다. 황태자가 아주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데는 큰 이유가 있지는 않습니다. 영애께만 말하자면-.”
그는 팔걸이에 손끝을 툭툭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익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네?”
나는 그의 말에 머리를 굴렸다. 그의 말은 결국 그가 나에게 한 일련의 행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함이었다는 뜻이었다.
그가 이로써 얻는 이익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당신입니다. 로위나 카시어스 영애.”
“……저요?”
“예, 오늘 카시어스 공자를 보았습니까?”
“아, 네.”
나는 그의 대답에 대해 해답을 찾기도 전에 마찬가지로 그가 내뱉은 질문에 대한 요지를 찾아야 했다.
‘여기서 왜 동생 얘기가 나오는 거지?’
의문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굳이 감출 생각은 없었는지 그는 곧 입을 열었다.
“7살. 어리다고 하면 어린 나이지만, 귀족이나 황족에겐 앞가림은 할 수 있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일반인들은 7살의 아이를 보면 한창 뛰어놀 때라고 생각하는 게 보편적이지만 귀족이나 황족의 아이를 보면 굉장히 성숙하고, 의젓한 애들이 많았다.
“저도 카시어스에 적자가 태어났다고 하기에 많은 기대가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탄생과 동시에 출가한 카시어스 영애의 존재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궁금증이 이제 풀렸으니 된 거 아닌가요?”
“제가 왜 카시어스 적자를 기대하고, 실망한 뒤, 카시어스 영애의 존재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영애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와 의무실에 들어온 사실 자체만으로도 귀족들에게 여러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유부녀라 다행이지.’
서류상으로나마 결혼하지 않았다면 신문 1면에 걸리는 황태자의 다음 연인은 내가 되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여기서 궁금하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무례한 대답이 될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황태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사교계에 두문불출하며 후계자로서 열심히 생활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출가하면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저도 뭐, 영애와 같은 입장이니까요.”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같은 입장이요?”
“어려서부터 완벽한 후계자가 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듯한 훈육을 받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나는 그의 말에 동의의 말을 선뜻 내뱉을 수 없었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아버지의 훈육을 욕보이는 일이 된다. 그러면서도 내 자신이 답답했다. 나에게 그런 짓을 한 아버지의 체면을 챙기는 것이 스스로도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심지어 18년 만에 적자가 태어난 거니, 그동안의 세월로 영애가 얼마나 고통받았을지는 말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