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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52화 (53/124)

52화

“저는 괜찮답니다. 공자님이 아주 귀여우세요.”

여전히 아버지는 내가 로위나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서 한결 마음이 편해져 나는 평소 귀족들을 응대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로디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조마조마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완전히 극진하게 생각하시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조금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나에 대한 존재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아니, 완전히 잊지는 않으셨겠지.

내가 출가한 것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티파티나 연회에 나가지 않고 저택 안에만 있으셨으니.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지금의 내 모습은 생각 외로 자연스러웠다.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를 마주하게 된다면 뻣뻣하게 굳어만 있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건 기우로만 그친 모양이다.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가까스로 로디안을 드레스에서 떼어낸 나는 찬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져 테라스로 나갔다. 그 뒤를 아일라가 쫓는 것이 느껴졌다. 리카르도도 나를 쫓아오려는 눈치였지만 내가 고개를 저어 만류했다.

테라스에 남녀 둘이 들어가는 게 목격되기라도 한다면 이상한 소문이 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미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적지 않은 상태였다. 뒤쫓아온 아일라가 미리 챙겨온 숄을 내 몸에 얹었다.

“고마워요.”

“주변에 들리는 얘기론 카시어스 소공작님이 연회에 나오신 건 처음이래요.”

“그래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카시어스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는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행여 누가 들어올까 봐 테라스 입구 쪽을 잠시 살펴본 뒤, 나는 가면을 벗었다.

‘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아일라는 그런 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라 내가 먼저 물으니 아일라는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 어떻게 아셨어요?”

“어떤 거요?”

“저랑…… 에스텔라의 사이요.”

아까 에스텔라를 대하는 내 태도로 아일라는 내가 에스텔라와 그녀 사이의 일을 알고 있다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추측은 정확했다.

‘나야 원작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원작의 에스텔라와 조르지오는 아일라를 의붓남매로 생각하지 않고, 장난감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점점 그녀에게 기이한 집착이 생기고 말았다.

마치 남에게는 자신의 장난감을 빼앗길 수 없는 아이들의 투정처럼.

그러나 아일라는 내가 자신과 에스텔라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혹시 제가 에스텔라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있던가요?”

그녀의 질문에 과거에 그녀가 나에게 에스텔라는 물론이거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는 걸 상기하고 아연해졌다.

“저번 후작 부인의 방문으로 대충 짐작하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런데 자식이라고 아일라에게 호의적이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군요.”

아일라는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아래로 축 처진 은색 속눈썹이 달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조차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그녀를 보니 아일라가 여자주인공이라는 게 더욱 실감이 났다.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던 아일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 * *

연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르익었고, 술에 취한 귀족들도 몇몇 나왔다. 하지만 분위기는 대체로 좋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로 귀족들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분위기였다. 경쾌한 음악에 춤을 추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몇몇 보였지만 첫 춤은 황제의 것이었기에 춤을 추는 사람은 없었다.

때마침 시종이 황제와 황후의 입장을 알렸다.

장내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양옆으로 펼쳐진 인파 사이에서 황제와 황후가 보였다.

황제는 이제 곧 반백의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그 옆에 하늘색 머리를 올린 황후는 미남미녀로 유명한 황태자와 황녀의 어머니인 것을 증명하듯 아름다우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내 목표는 그들이 아닌, 황녀 베로니카였다.

그들 뒤로는 황태자와 황태자비, 그리고 황녀 베로니카가 있었다.

혼기가 찬 베로니카 황녀가 혼처를 물색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이 기회를 발판으로 황실과 연을 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왕 시작한 사업이니까 제국에서 최고는 먹어야지.’

그렇게 야심만만한 생각을 하며 황녀인 베로니카를 관찰했다. 밝은 금발 머리를 길게 한쪽으로 땋은 황녀는 연회에 관심이 없는지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무심한 표정 아래에 있는 청록색 눈동자는 총기가 흘렀다.

보자마자 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돈이 걸리면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리카르도와 있던 일은 논외다.

‘아니지, 그 둘도 언젠가는 내가 이어줄 텐데!’

항만지분이 걸린 일이었다. 물론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계륵 같은 돈이나, 아일라와 리카르도, 둘의 행복한 결말을 이미 원작을 통해 알고 있던 나는 사적인 감정으로라도 그 둘을 이어주고 싶었다.

‘행복한 결말….’

정말 행복한 결말이 존재할까?

이미 원작이 틀어질 대로 틀어져 버렸는데 결말만큼은 원작처럼 똑같이 행복해질까?

과연 이대로 내가 이어준다고 한들 원작대로 그 둘이 백년해로하며 행복하게 지내리란 보장은 누가 해주는 거지?

순간 많은 의문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이어주는 일일 뿐이라며 가볍게 생각했는데 아일라와 리카르도의 인생이 걸린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제는 섣불리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일반적인 상황만 되짚어봐도 그랬다.

회사에서 알선한 중매에서도 귀족들이 결혼 후, 갖가지의 일로 파경을 맞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대로 그 둘을 이어주는 게 맞는 건지.

아일라가 내 팔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조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봐요.”

그녀의 시선 쪽엔 베로니카 황녀가 있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 황녀는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끌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아일라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분들이 하셨던 말은 저 기분 좋아지라고 했던 말이었네요.”

부티크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황녀님보다 예쁘다며 칭찬했던 말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나는 원작에서 아일라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말을 삼키며 멀찍이서 황족들의 행차를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어머니였다.

‘설마.’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어머니가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져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황녀에게 깊은 관심이 있는 양 베로니카 황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아일라와 속닥거렸다.

베로니카 황녀가 이쪽을 바라본 것 같았다.

“이쪽을 쳐다보시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아일라에게 물었다.

“…네, 사실은 저도 느꼈어요.”

아일라까지 그렇게 느꼈다면 착각은 아니었다. 서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잠시 이야기 가능해요?”

내 팔을 붙잡은 사람은 어머니였다. 순간 숨이 멎었다.

안 된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주변의 시선이 많았다. 곤란하고 난감했다.

손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마 가면 아래에 있는 얼굴도 땀이 흥건해졌을 것이다.

대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아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시어스 공작 부인은 긴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보고 알아차렸다.

‘이미 날 로위나라고 생각하고 계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을 연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그 오해를 풀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술이 떨렸다.

“오랜만입니다, 백작 부인.”

누군가가 어머니가 붙잡지 않은 다른 쪽의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눈을 반달로 휘며 반가운 얼굴로 나에게 아는 척했다.

“화, 황태자 전하.”

어느새 내 주변은 아일라와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일라는 놀란 눈으로 나에게 말을 건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최대한 어색해 보이지 않게 그에게 인사했다. 황태자는 내 인사에 대답하듯 빙긋 웃고는 카시어스 공작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그간 건강하셨는지요? 제 아버지께서 옛 친우를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황제와 카시어스 공작 부인이 어릴 적 소꿉친구였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송구하네요.”

“아버지와 한번 대화를 나눠보시는 것이 어떠신가요? 저는 마르그리트 부인과 따로 할 말이 있어서.”

“자, 잠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초조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그녀와 대화를 이어갈수록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나요?”

“네, 전하.”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만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그가 팔을 내밀자 나는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설마… 팔짱을 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내가 그런 시선을 보내자 황태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팔을 도로 아래로 내렸다. 어이없게도 내 생각이 정확히 적중한 모양이다.

‘저 미친놈.’

저기서 황태자비가 서슬 퍼렇게 눈뜨고 이쪽을 보는 게 보이지도 않나?

“이런, 부인. 안색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으니 의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군요.”

가면을 쓰고 있는데 안색이 안 좋은지는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목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그의 말을 따르는 게 나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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