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런 상황에선 보통 부모님이 누구인지 물어보고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아이의 부모를 알았다. 그래서 그 얘기만큼은 꺼낼 수 없었다.
“아이가 부모님을 잃어버렸나 봐요.”
아일라가 말했다. 그녀가 아이를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굽히자 붉은 드레스에서 사락 접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내 옷에 매달린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나는 뻣뻣하게 서 있는 채로 아일라에게 물었다.
“혹시 아는 아이인가요?”
나는 내 행동이 최대한 자연스럽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일라는 예상대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필리아를 닮았군.”
이쪽을 보고 있던 리카르도가 돌연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말에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상황에서 당황하면 그게 더 이상해 보인다는 걸 알지만 생각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그런가요? 저 어릴 때 이렇게 안 생겼었어요.”
아니, 그렇다고 고작 하는 말이 이따위인 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스스로가 황당했다.
“맞아요, 사장님 쪽이 훨씬 귀여웠을걸요?”
아일라가 배시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녀가 나를 좋게 봐준 건 고맙지만 리카르도의 말은 정확했다. 내가 어릴 적 잃어버린 쌍둥이 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남자아이와 나는 닮아 있었다.
이 순간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우리의 대답에 리카르도가 그 아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왠지 불길했다. 그의 검은 속눈썹이 아래로 드리워졌다. 그 안에 있는 푸른 눈동자는 그 아이에게서 떼어질 줄을 몰랐다. 심각하게 아이를 바라보는 리카르도에게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아, 아이가 겁먹어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리카르도에게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급하게 아이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내 말에 리카르도가 멈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
내 말을 들은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묘하게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에이, 설마.’
내 기분 탓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리카르도가 놀라울 만치 아이에게 집요한 관심을 보내지 않는가. 의아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이었다. 그건 나에게 몹시 곤란했다.
“머리색이랑 눈이 확실히 닮았어.”
게다가 그 관심이 쉬이 꺼지지도 않았다. 내가 가진 금발과 다홍빛 눈동자는 드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너무 확신에 차서 말하니 아일라도 ‘그런가?’ 하는 얼굴로 아이를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말에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할지 곰곰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디안!”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로디안.’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자아이를 낳는다면 이 이름으로 짓겠다고 미리 약속한 이름이었다. 나는 일부러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에서 등을 진 채 모른 척하였다.
“엄마!”
로디안이 쪼르르 자신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슬쩍 상황을 보니 눈물겨운 모자 상봉이라도 이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디안. 연회에서 얌전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부인, 이래도 이 아이를 이런 곳에 데려올 거요?”
‘이런.’
나는 이어 들리는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에 슬며시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였다.
‘여전하시네.’
만으로 6살밖에 되질 않았을 아이에게 어른다운 사고와 행동을 요구하는 건 분명히 내가 알던 아버지가 맞았다.
갑자기 사라진 로디안을 꾸짖는 아버지와 로디안을 변호하는 어머니. 별안간 대립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것도 황제가 주최한 연회장에서.
보통은 연회장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떤 귀족이 나서서 그들의 행동을 지적했을 테지만, 이 자리에서 감히 카시어스 공작 부부에게 품위나 예의를 운운할 귀족은 없었다.
유일하게 그 둘을 중재할 수 있는 리카르도는 가만히 있을 뿐,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그 세 사람으로 인해 조금 어수선한 모양새를 띠었다.
기회였다. 나는 재빨리 인파 속으로 숨기 위해 타이밍을 엿보며 눈알을 굴렸다. 그런데 좀처럼 그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지금 자리를 피하면 바로 눈에 띌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모습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일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전생을 기억하여 성인의 사고를 가진 채 카시어스 공작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갓난아이 시절의 기억도 갖고 있었다.
내가 7살일 때도 아버지는 지금처럼 나에게 어른처럼 행동하길 바랐다. 그리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성숙한 어른을 연기했다.
분명히 어린아이에게 좋은 훈육은 아니었지만, 그걸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이런 상황에서 선뜻 나서는 귀족조차 없는데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 무슨 배짱으로 카시어스 공작을 말린다는 말인가.
유일하게 그를 말릴 수 있는 나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조용한 시선으로 방관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뭐지?’
그녀는 적극적으로 로디안을 감싸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갑자기 속이 안 좋았다. 리카르도의 말대로 의무실이라도 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세상일이 내 뜻대로 돌아가는 게 왜 하나도 없는 건지-
“으앙!”
둘 사이에서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던 로디안이 급기야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내게로 달려왔다.
‘뭐?’
그가 아까 부모님을 잃었을 때처럼 내 드레스를 붙잡고 늘어졌다. 당황한 나는 그를 내 옷에서 떼어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저, 공자님. 이러시면 곤란하답니다.”
마음만은 이미 욕이 한 바가지 쏟아져나왔다. 이 무슨 지독한 악연이란 말인가. 그의 탄생으로 나는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고, 지금은 그로 인해 정체가 밝혀질 위기에 처했다.
“흐엉.”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내 드레스에 얼굴을 더욱 파묻었다. 가면을 쓰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마 가면을 벗고 있었다면 그 누구보다 내 표정은 야차처럼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내 드레스!’
그가 눈물만 흘린 게 아니라 콧물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드레스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먼 강을 건넌 상태였다.
어머니 옆에 있던 하녀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급하게 로디안을 떼어내기 위해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부인.”
그녀는 나보다 더 부드러운 말씨로 타이르듯 로디안을 채근했다.
“도련님, 어서 저한테 오셔요.”
“싫어. 또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있어야 되잖아.”
로디안은 웅얼거리듯 내 드레스를 꽉 붙들며 말했다. 어린애가 손아귀의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로디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공자님, 그렇게 행동하시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신답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막 가출을 했을 때는 훗날 동생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할지 한가득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대부분은 모진 말이었다. 내가 고생한 만큼 되돌려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 동생인 로디안을 만나니 그런 말들이 입안에 도달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부모님의 말조차 듣지 않는 아이가 내 말을 들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로디안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감해하는 나를 본 아일라도 로디안을 설득했다.
“맞아요, 공자님. 그리고 우리 사장님도 곤란하게 되시잖아요.”
“사장님……?”
로디안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름이 사장님이에요?”
그는 순진한 눈빛으로 나에게 그리 물었다. 아일라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귀여우신 분이네요.”
나는 그 말에 로디안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뽀얀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일라의 말대로 그는 틀림없이 귀여운 아이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었다.
그리고 저 분비물이 내 드레스를 잔뜩 적셔 놓은 상태였다.
“하아…….”
내가 나직이 긴 한숨을 쉬자 그가 내 눈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 또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가 왜 이 애를 신경 쓰는 거야.’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완벽히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을 연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목소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카시어스 공작님과 공작 부인. 안녕하세요.”
이럴 땐, 괜한 오해를 사지 않게 정면 돌파였다. 가급적이면 마주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아이를 억지로 떨쳐내고 달아나는 게 더 수상해 보일 것이 확실했으니 말이다.
나는 흘긋 로디안을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면 아래에 가려진 내 시선을 그가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필리아 마르그리트랍니다.”
“민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오.”
다행히 나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버지는 마뜩지 않은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그에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내가 떠나기 전보다 주름지고, 머리숱도 그 전보다 줄어 있었다.
‘7년이 그렇게 긴 시간이었던가.’
출가를 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시간을 보냈던 탓에 나는 이 7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조금이나마 세월을 실감하게 되었다. 뭐, 새삼스러운 감상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