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49화 (50/124)

49화

언뜻 들으면 칭찬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욕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꽤 여러 의미가 압축된 욕이었다.

유행도 잘 모르거니와 철이 지난 유행에 어울리는 낡은 사람으로 전락해버렸다. 이 말 하나만 놓고 본다면 웃음만 나오지 나에겐 그다지 타격을 주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무리가 평소 나 같은 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삽시간에 구려졌다.

‘여기서 또 급을 매긴다, 이거지.’

함의된 말을 귀신처럼 알아차린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델라 부인. 어차피 유행은 돌고 도는 거니까요.”

나는 델라 부인을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훑어보고 그녀가 쓴 머리 장식이 어울린다며 칭찬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다음 유행은 델라 부인이 머리에 쓴 진주 장식이 될 수도 있죠.”

“…고마워요.”

나 또한 그녀가 나한테 한 화법을 그대로 써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내 말뜻을 파악한 델라 남작 부인은 떨떠름히 고맙단 인사를 했고, 그들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떠났다.

오래 있어 봤자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것처럼 안부를 묻는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입속이 모래라도 씹은 마냥 까끌까끌했다.

‘대체 이런 곳이 뭐가 좋으시다고.’

어머니가 사교계에 나가라고 채근하던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아일라와 내 사업을 위해 사교계에 나왔지만 처음 참석하는 사교계는 생각보다 별거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일하면 직접 만질 수 있는 돈이라도 생길 텐데!

그러나 나의 부재로 회사는 임시 휴업을 한 상태였다.

‘그래, 장기적으로 생각하자… 오필리아.’

직장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연회장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달랐다. 회사를 쉰 만큼 윗전에 얼굴도장이라도 찍어 본전을 뽑으리라.

그런데 당장은 아일라부터 챙기는 게 일이었고,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말을 거는 귀부인도 더 이상 없었다.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던 귀부인들도 막상 연회장 같은 공개적인 곳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은지 나를 발견했음에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진작 번듯한 사람으로 남편 대역 좀 세워 놓을 걸 그랬나.’

예전에 나에게 자주 했던 어머니의 조언이 생각났다.

대외적인 남편의 지위는 사교계에서 부인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 근거하면 아무래도 마르그리트 백작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이 나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그럼 내가 뭘 하든 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잖아.’

막상 생각해 보면 부인 쪽의 평판이 좋지 않아도 남편에게 그 영향이 가는 경우는 잘 없었다.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평소에는 주말만 기다리던 내가 처음으로 출근을 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아일라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영식들에게 둘러싸여 그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달라진 거라면 주변에 어린 영애들도 무리에 합세해서 기웃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인파를 뚫고 아일라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많은 인파가 양옆으로 갈라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리카르도 에르도안 공작님과 에스텔라 레니에 후작 영애가 입장합니다!”

연회에 초대된 귀족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장내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까 나와 아일라가 들어왔을 때도 장내가 조용했었지만, 지금의 정적은 사뭇 달랐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느낌이었다.

“사, 사장님.”

어느새 좌우로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 인파에서 벗어난 아일라가 핼쑥한 얼굴로 내 옆에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내 쪽으로 잡아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네…. 다행히 질식사는 면한 것 같아요.”

그녀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우리 주위가 불안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아일라도 그걸 느꼈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등 뒤쪽에서 청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일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아일라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이미 숱하게 들어온 목소리일 것이다. 듣자마자 자신을 부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던 아일라는 차가운 눈으로 에스텔라를 마주했다.

분홍색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는 검은색 연미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리카르도가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긴 했으나 리카르도를 본 나는 조용히 속으로 주접을 떨었다.

‘크, 역시 우리 남주, 꾸미니까 더 멋있네!’

비주얼만 봐도 아일라와 리카르도는 이미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다.

‘근데 왜지?’

그들이 어째서 아직도 따로 떨어져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로맨스 소설은 서로 첫눈에 반하는 게 정석이고 불문율이 아니던가?

서로 말고는 눈이 차지 않을 정도의 미모들인데 정작 건더기와 국이 따로 노는 국밥처럼 행동하니 아쉽기만 했다.

홀린 듯 리카르도를 보던 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어느 누구도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편이 나한테는 훨씬 편했다.

아까 아일라에게 몰려든 귀족들 때문에 숨이 막혀서 죽을 뻔했으니까 말이다.

슬쩍 리카르도의 옆을 바라보았다. 에스텔라 레니에가 아일라와 똑같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앙증맞은 입술과 보기 좋을 만큼 내려간 눈꼬리가 귀여운 소녀였다. 아일라가 동화에 나오는 요정 같다면 이쪽은 귀한 집에서 금지옥엽 자란 고명딸 느낌이었다.

처음 만난 누구라도 그녀에게 쉽게 호감을 품고 다가갈 것이다.

그녀가 아일라에게 한 일을 알고 있는 나와 엘렌, 그리고 당사자인 아일라를 제외하고선.

아일라와 에스텔라 사이에 여전히 미묘하게 시선이 오가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조금 궁금해서 몰래 리카르도를 살펴보려고 했는데 바로 그가 시선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줄곧 나를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뭐지?’

몰래 훔쳐보다가 들킨 사람처럼 눈이 마주치자마자 피하는 게 왠지 그답지 않았다. 그래도 눈이 마주쳤으니 예의상 그에게 인사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으나 에스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딨었어?”

아일라와 에스텔라, 어느 쪽도 쉽게 입을 열지 않는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쪽은 결국 에스텔라였다.

입을 연 그녀는 아일라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리카르도에게 집중되던 시선이 에스텔라에게 우르르 옮겨붙었다.

“…….”

“아일라, 갑자기 집을 나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별안간 에스텔라가 아일라를 와락 껴안았다.

워낙 에스텔라의 행동이 빨라 피하지 못한 아일라는 딱딱히 굳은 채 서 있었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핏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레니에 후작 부인이 사무실에 찾아왔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도 내 앞에서는 아일라를 아끼는 양 행동했으나 그때는 이런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라 금방 본색을 드러냈었다.

에스텔라도 좋은 의도로 아일라에게 접근한 건 아닐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끼어들 여지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목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가까이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옆을 바라보니 리카르도도 나처럼 그 둘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 보였다.

‘아닌 척해도 아일라한테 관심이 있었나?’

그런 생각에 괜히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나는 그 둘을 보는 리카르도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아일라가 아닌, 에스텔라에게 꽂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설마 에스텔라한테 관심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이 들자 아까 나오려 했던 웃음기가 도로 쏙 들어가 버렸다. 널리고 널린 사람 중에 리카르도가 에스텔라를 좋아한다는 건 절대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에스텔라가 아일라를 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었다.

‘그때랑 상황은 똑같은데.’

하지만 상황만 같을 뿐이지 아일라를 보는 두 모녀의 눈빛이 미묘하게 조금 달랐다.

아일라를 보는 레니에 후작 부인의 눈빛은 차갑고 싸늘했다. 성가시고 귀찮다는 걸 본다는 듯이.

반면에 아일라를 보는 에스텔라의 눈빛은 조금 열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장난감을 드디어 찾은 듯한 어린애처럼.

‘이쪽이 훨씬 더 위험해 보여.’

내가 그녀를 보고 느끼는 바가 모두 기분 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한편 아일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 광경을 조용히 긴장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중 에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빛이 일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착각이라고 생각될 만큼 순간의 일일지라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이거, 왠지 불길한데.

에스텔라가 천천히 아일라를 품에서 떼어냈다. 언제 차가웠냐는 듯 녹음이 떠오르는 녹색 눈동자를 따스하게 빛내며 에스텔라는 나를 보고 다소곳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묘하게 아일라가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부인.”

“반가워요, 에스텔라 영애.”

“……아.”

그녀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사실 그녀가 당황한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물었다.

“아뇨…. 절 그렇게 부르시는 분은 처음이라.”

엄연히 레니에 가문의 첫째는 아일라였다. 기실 가문의 딸이 두 명 이상이라면 첫째를 가문의 이름으로 부르고 나머지는 본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게 예법이었다. 그리고 이 예법은 꽤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아일라는 여태까지 레니에 영애로 불린 적이 없었다. 세간에선 레니에 영애는 곧 에스텔라를 의미하는 거였으니까.

나는 당연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앞으로는 익숙해지셔야 할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