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는 느닷없이 옛날얘기를 꺼내는 그의 저의가 궁금했다.
‘내가 가문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건가?’
그러면 그의 행동이 일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나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날카롭게 물어보자 엘렌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가문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건 아냐. 다만 오필이 후회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거든.”
“내가 왜 후회를 해?”
“지금도 후회하고 있잖아. 오필.”
엘렌의 시선에 당황한 얼굴을 한 내가 비치고 있었다. 내가 왜 당황하는 거지?
‘이러면 마치 정곡에 찔린 사람 같잖아.’
시선을 의식한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그의 말에 대꾸했다.
“후회 안 해. 내가 왜 후회를 해.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진심이야?”
“진심인지 아닌지 넌 알고 있잖아.”
내 말에 엘렌이 어울리지 않게 세상의 모든 근심은 다 떠안은 양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의 태도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
“아, 그래! 사실 조금 후회했어. 어머니랑 대화라도 한 번 나눠보고 나오는 게 나았을 텐데, 종종 그런 생각하기는 해! 근데 그게 내가 연회에 참석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후회하지 않을 것 같으면 내가 레니에 영애 파트너로 참석하면 되지. 그럼 문제 해결?”
그가 경쾌한 얼굴로 엄지와 중지를 마찰시키며 활짝 미소지었다.
“문제 해결은 무슨.”
그리고 그건 진짜 내가 후회할 것 같거든? 대체 아일라가 무슨 죄가 있다고 엘렌과 파트너가 되어야 하나. 아일라를 불쌍하게 만드는 일에 불과했다.
“그럼 다른 파트너를 구하든지?”
바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초인적인 힘으로 억누르며 내가 말했다.
“이건 네 잘못이니까 내일 연회 참석하기 전까지 내 외모, 완전히 바꿔놔.”
“알겠어. 오필.”
엘렌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와 있으면 화만 더 나서 그에게 이제 가라고 휘휘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으로 집무실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용건이 더 남아 있어?”
“오필.”
그가 웬일인지 웃음기가 싹 빠진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당분간 조심하는 게 좋아. 내 보호 마법이 있더라도 그게 완전히 절대적이진 않거든.”
“…나한테 위험한 일이 생긴다는 말이야?”
“확실히 말해줄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지. 위험하다 싶으면….”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소환 주문 알지? 특별 서비스는 이번 한 번뿐이니까 주문은 제대로 외워줘. 그럼 내일 봐, 오필.”
“엘렌!”
의문스러운 말만 남기고 사라진 그에 결국 남은 건 찝찝함뿐이었다. 그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기도 잠시. 갑자기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문이 벌컥 열렸다. 연이어 쾅! 소리가 집무실에 크게 울렸고, 갑주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마리어스 기사들이었다.
순간 엘렌이 경고하던 일이 일어난 줄 알고 깜짝 놀랐다가 낯익은 갑옷에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바짝 긴장했다. 설마 백작저에 무슨 일이 생겼나?
“바이올렛.”
선봉에 있는 보라색 단발머리의 여인은 지금 백작저에서 마리어스 기사단을 대장으로 이끄는 기사 바이올렛이었다. 그녀 뒤에는 마리어스 기사들이 딱딱하고 싸늘한 얼굴로 군집해 있었다. 저 사람들은 저 표정 하나밖에 없는 건가.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이제 발견했는데 문짝이 너덜너덜하게 부서져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심각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어, 어머.”
바이올렛이 다가와 내 몸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진지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에 뭐라 항의할 새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바짝 굳어 있었다.
“신변은 이상 없음. 침입자였습니까?”
“잠시만요.”
“이 방에 침입자가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아, 아뇨.”
떠밀리듯 대답을 내뱉었다. 내 대답을 들은 바이올렛은 고개를 돌려 명령을 내렸다.
“혹시 모르니 도청기나 수상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라.”
“예.”
도청기?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한 얼굴로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집무실에 도청기가 있어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녀의 단호한 말에 시선을 돌려 처참히 부서진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 단장에 그 부하라는 건지. 그쪽 단장은 철로 된 정문을 종이 찢듯 칼로 쪼개더니 이쪽은 방문을 박살 내 버렸다.
“…그런데 문은 왜 부수고 들어오신 거죠?”
“집무실 안에 두 명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침입자가 없었습니까?”
그녀가 거듭 묻는 말에 나는 대답하기를 갈등했다. 두 명의 기척이라면 나와 엘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근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둘의 관계를 모르는 그들이 이상한 오해를 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어,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다른 변명거리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이올렛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부서진 문에 다가갔다.
“집무실 안쪽에서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네?”
“노크를 했는데도 대답이 없어 문을 열려고 했는데 문이 열리지도 않았습니다.”
“문이 잠겼었나 보네요.”
난 또 뭐라고. 몸에 긴장을 완전히 푼 나는 여상히 대꾸했다. 그러나 여전히 바이올렛은 의문이 남은 눈치였다. 그녀가 말했다.
“문이 잠기기보다는 마법으로 문이 열리는 걸 막은 듯했습니다.”
“…….”
바로 상황을 알게 된 나는 욕을 퍼붓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이 상황을 알면서도 유유자적 마탑으로 떠난 한 사람에게.
* * *
“후우, 왜 이렇게 어색하담.”
연회에 가기 전, 드레스룸에서 나는 옷매무새를 살피며 한숨을 쉬었다.
긴 거울 앞에는 어둡고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웬 낯선 여자가 있었다.
‘아일라도 괜찮다고 했었는데.’
이번에 드레스를 입을 때 도와주던 하녀들도 어울린다고 거듭 나를 칭찬했다. 아일라는 몰라도 그들의 립서비스는 믿을 게 못 돼서 애써 괜찮다고 자기 위로를 해도 드레스를 입을 일이 손에 꼽았던 탓인지 폼이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엘렌은 언제 오는 거야.”
황족들이 연회에 참석하기 전에 귀족들은 최소한 한 시간 전에는 참석하는 게 예의였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30분 안에는 엘렌이 와야 연회에 갈 수 있었다. 이미 가문 마차는 아일라가 묵고 있는 숙소로 가서 그녀를 백작저로 데리고 오고 있을 것이다.
“설마 이대로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는데 방 안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렌인가?’
반색하며 입을 열려고 했으나 엘렌이 고상하게 노크를 두들기며 침실에 들어오는 애가 아니란 것을 상기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역시나 방에 들어온 건 엘렌이 아닌 리온이었다.
“연회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그게… 연회에서 착용할 장신구를 뭐로 할지 좀 더 고민해 보려고.”
그 말에 리온의 시선이 천천히 테이블로 옮겨갔다. 그런데 곧 그의 눈에 가벼운 의문이 서렸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장신구가 있는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근데 목걸이랑 귀걸이 각각 하나씩밖에 없었다.
“……그게 차고 갈지 말지 고민 중이라는 얘기였어.”
“그렇군요. 마님. 저번에 명령하시던 일에 관해 보고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보고가 연회가 끝난 후에 전달되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냐. 그런 얘기는 한시라도 빨리 듣고 처리하는 게 나아. 지금 얼른 보고해.”
“없습니다.”
“단 한 명도?”
“네, 모두 평민 출신이라 귀족 아래에서 서류 일을 해 본 경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리온은? 리온은 기사 가문 출신이잖아.”
“정확히는 수련 기사에 불과합니다. 기본적인 서류 처리는 할 수 있지만 백작저의 일을 처리할 역량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 말은 서류 처리는 가능하다?”
리온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정확히는 부담스럽다는 얼굴이었다. 능력 밖의 일과 마주친 것처럼.
“달마다 처리하는 서류 양에 따라 추가 인센티브.”
“…….”
대답은 없었으나 이미 거의 넘어온 얼굴이었다. 우리 가문 사람치고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니까. 아니, 애초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나는 리온의 어깨를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내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엘렌, 이 자식은 언제 오는 거야!’
이대로 무턱대고 기다리다간 연회에 지각해버리는 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일단 나는 가면을 챙기고, 급하게 문밖으로 나섰다. 정문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마차의 문을 벌컥 연 나는 깜짝 놀랐다. 숨이 안 쉬어졌다.
“설마 아일라?”
이건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야, 요정! 어두운 밖에 두면 그녀 혼자 달의 요정처럼 고고히 빛이 날 것 같았다. 이런 요정이 나보고 가진 돈을 다 내놓으라고 하면 간이고 쓸개고 모두 빼다 바쳐서 이미 나는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사장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어머, 요정이 말도 하네?”
내가 그녀의 뺨을 툭 건드리며 말하자 아일라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연회에 참석하면 곧 그녀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무사히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아일라, 잠깐 귀 좀 막을래요?”
“네?”
“아주 잠깐이면 돼요.”
천사 같은 아일라는 내 이상한 부탁에도 순순히 자신의 귀를 막았다. 순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요?’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조용하면서 빠르게 속삭였다.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똑똑하며, 잘생긴 마법사님. 얼른 제 앞에 나타나 주세요.”
그리고 제발 아일라가 이 주문을 듣지 못했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