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게 상사의 뒷담화를 하다가 걸린 기분일까. 간담이 서늘했다.
아주 예전에 내 뒷담화를 하다가 걸린 신입사원이 어떤 기분일지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아버린 느낌이다.
“어, 어서 오세요. 공작님. 노크라도 하셨으면 미리 커피를 준비했을 텐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횡설수설 말을 내뱉자 리카르도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아하…….”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눈만 굴리고 있는데 어느새 아일라가 사라져 있었다. 코코아를 타오겠다는 구실로 혼자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왠지 야속한 기분이었다.
단둘이 사무실에 남자 나는 이 어색하고 민망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식은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리카르도였다.
“궁금한가?”
그는 아까 대화에 대해 끄집어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흘긋 살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표정이 없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로 아까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그럼 사과를 해야 할까?’
분명 뒷얘기를 한 건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리카르도한테 사과를 할 때마다 그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물어보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도 저렇게 말하는 걸 봐선 대답할 의향이 있다는 뜻이겠지.
……지금 나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거 아니냐고?
“네.”
“그렇군.”
네? 설마 이게 끝? 나는 리카르도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각같이 잘생긴 입술이 보였다. 나는 저 닫힌 입술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설마 여기서 ‘그렇군.’이라는 대답으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설마가 설마인 모양이었다.
‘지금 장난하나.’
대답해줄 것처럼 말을 꺼내놓곤 사람을 놀리는 건가?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을 여과 없이 보내도 리카르도는 내 마음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특유의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문틈으로 이 상황을 몰래 보고 있던 아일라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코코아를 내왔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혼자 도망가서 죄송해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귀여워서 뭐라 질책할 마음도 말끔히 사라졌다. 한숨을 푹 내쉬며 다음엔 그러지 말라고 속삭였다. 아일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리카르도가 꺼낸 얘기의 주인공은 아일라였으나 그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얘기하고 있었다.
“네, 맞아요. 공작님도 이미 알고 있으시군요.”
“그럼 연회에 참석할 때 보증인을 파트너로 세우는 게 낫지 않나.”
그의 시선이 아일라에게 옮겨갔다. 리카르도는 간접적으로 내가 그녀의 파트너로 참석하지 않는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 말뜻을 알아차린 아일라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이미 참석한다고 약속했는걸요.”
“약속이라.”
리카르도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는 새삼스럽기만 했다. 연회 전날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그에게도 나에게도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내가 연회에 참석하면 안 되는 이유가 갑자기 생긴 게 아니고선.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심증만 있을 뿐이다.”
“심증이라도 저와 관련된 이야기면 저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일러.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생기면 그때는 꼭 말하도록 하지.”
이렇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놓고는 확실하지 않으니 말을 못 해 준다? 답답해서 절로 인상이 써졌지만 애써 인상을 펴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지 않은 일로 제가 연회에 빠질 수는 없답니다.”
“꼭 빠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나도 연회에 참석하니.”
“제가 참석하는 거랑 공작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전혀 관련성이 없는 얘기지 않은가?
“아무리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라도 안심할 수는 없지. 그리고 마리어스는 초대를 받은 신분이 아니라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럼 호위 반경에 한계가 있어.”
“그럼 절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라고요?”
“…….”
그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사업 파트너라고 하지 않았나?”
리카르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의 말에 나도 마주 활짝 미소 지었다. 역시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주변 조연의 목숨까지 걱정해줄 정도로 의리도 멋졌다. 알렉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일라의 짝으로는 역시 리카르도가 어울린단 말이야.
리카르도가 사무실을 떠나고 아일라와 단둘이 남았다. 나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아일라에게 말했다.
“정말 멋있지 않으신가요?”
“네? 아, 공작님요?”
“공작님처럼 지위 높고 바쁜 사람이 주변 사람을 일일이 걱정하고 챙기시는 거 흔하지 않아요.”
“아… 네.”
차가운 외모와 다르게 주변인을 챙기는 리카르도의 모습을 보면 아일라가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너무 미적지근하네.’
아직은 섣부른 기대였나보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는 일렀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각을 잡고 리카르도에 대한 장점을 어필해서 어떻게든 서로에게 호감을 만들어내야 했다.
“저라도 사장님이 위험해지면 도와드릴 것 같아요.”
작게 미소를 지은 아일라가 찻잔을 치우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대답에 열었던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리카르도 얘기는 다음에도 할 기회가 있겠지.
* * *
퇴근 후 백작저의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홀로 남은 방에서 높게 쌓인 서류를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을 배회하며 엘렌을 부를지 말지 고민하기도 여러 번. 평소라면 고민도 없이 그를 불러서 내일 연회 때 얼굴을 바꿔 달라고 부탁할 텐데 쓸데없이 고민만 길어지고 있었다.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가 종종 나에게 짓궂은 거짓말을 할 때는 있었지만 그 모든 건 장난들이었다.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일 그가 작정하고 나를 속이려 했다고 하더라도 내 귀에 카시어스 부부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은 금방 닿을 걸 알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엘렌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가 평범한 마법사라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부르는 걸 고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불렀다간 내가 생각하는 바를 모두 읽어버릴 것이다. 그놈의 통찰.
어떻게 막을 수도 없고, 이 순간만큼은 통찰이 통하지 않은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게 한이다.
‘착각했던 것일지도 몰라.’
내게 알려줄 때까지만 해도 엘렌은 카시어스 공작 부부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철석처럼 믿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거겠지.
그렇게 결론 내리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도 그를 부르는 소환 주문만큼은 입에 담기 싫었다.
“게으르고 못생긴 엘렌 나와라.”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
“…….”
미친.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엘렌이 책상에 삐딱한 자세로 기대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왜 네가 여깄어?”
“나 찾는 거 아니었어?”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내 물음에도 엘렌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긴 하지만… 소환 주문이라는 게 이렇게 막 바꿔도 적용이 돼?”
손을 휘휘 저으며 질문하는 나에게 엘렌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래는 안 되지만 오필이니까 특별히 서비스 해줬어.”
“아하… 이게 특별 서비스라고?”
정말 이렇게 반갑지 않은 특별 서비스는 처음이었다.
“너…….”
이미 생각을 읽은 사람한테 속마음을 숨기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었다. 나는 바로 엘렌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카시어스 사람들이 연회에 참석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
“응.”
“아, 그래.”
그가 너무 순순히 긍정하니 도리어 추궁하던 내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녀석 진짜 뭐 하는 놈이지?
“문제 있어?”
“어, 문제 많아. 왜 이 중요한 사실을 나한테 숨긴 거야?”
“만약 내가 사실을 말했으면 오필이 참석하지 않을 테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여태껏 신분을 숨겨왔는데 설령 가면을 쓰고 있더라도 그들 앞에 등장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엘렌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필, 그때 기억해? 네가 가문에서 출가하던 날.”
“응. 넌 내 출가를 반대했었지.”
평소 엘렌이라면 다 때려치우고 자신이랑 같이 놀면서 살자고 말할 거라 생각했다. 근데 가문에서 나오겠다는 말에 엘렌은 그런 나를 말렸었다. 하지만 끝내 내 결심을 꺾지 못해 그는 뒤에서 나를 종종 도와주었다. 엘렌은 그때를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그땐 오필의 소고집이 굉장했었지. 고집불통으로 유명한 우리 아버지도 한 수 접으셔야 할 정도였다니까.”
“네 아버지 고집을 네 고집으로 꺾은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반드시 장남을 후계로 올리겠다는 알렉산드로 대공의 고집을 꺾고 마탑으로 홀연히 사라진 엘렌이 내 고집을 운운한다는 게 웃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