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단장님? 단장님이 누구죠?”
질문하면서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사람이 하나 있었다. 리카르도 에르도안. 그가 내담 시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통솔권은 나한테 있으니 그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마리어스 기사 중 선두에 서 있던 보라색 머리의 여자가 내 질문에 반응하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그들 중에서 가장 대장으로 보였다. 차가운 얼음 도자기같이 무표정한 추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에르도안 공작님이십니다.”
“…그래, 좋아요, 저들이 어딜 봐서 침입자라는 거죠?”
하지만 나는 이 예기치 않은 상황이 불쾌하기만 했다. 아무리 호위라지만 손님으로 방문한 애꿎은 사람을 겁박하는 건 백작 가문을 먹칠하는 일이었거니와 내 사업에도 손해를 끼칠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호위기사라기보단 불한당이라고 정의해야 하지 않나?
“철문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
내 얼굴에 선명히 떠오른 의문에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냐는 듯, 붉은 머리의 여자가 자신의 머리색처럼 붉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반인은 칼로 철문을 부술 수 없습니다. 분명 검에 조예가 깊은 자의 소행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의상을 만들고 있단 얘기는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얘기긴 한데.’
어제 일을 모르는 그들의 입장에선 저 주장은 합리적이고 합당한 말이었다. 그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 있는 나와 리온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우린 잘린 철문이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꺅! 살려주세요! 백작 부인!”
부티크 사람들은 마리어스 기사의 말에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가 바짝 드리워진 칼날에 벌벌 떨며 애걸했다.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얼른 풀어주세요. 저 사람들이 철문 부순 거 아니에요.”
“…그럼 다른 자가 부쉈다는 말입니까?”
처음으로 마리어스 기사들의 철옹성 같은 얼굴이 혼란으로 얕게 물들었다. 그들은 부티크 사람들을 응시하다가 나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누굽니까?”
그럴 리 없다고 고집을 쓸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기사들은 내 말에 수긍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다. 증거도 있었다. 그의 보좌관인 펠릭스가 두고 간 청구서.
“그쪽 단장님이요.”
“…….”
그 말에 마리어스 기사들은 입을 꾹 다물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부티크 사람을 포박하던 줄을 끊으며 칼날을 거두었다. 부티크 사람들은 목에 드리워진 서슬 퍼런 칼날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리온은 빠르게 부티크 사람들을 손님방으로 이끌었다.
그러던 와중, 문득 아일라와 알렉스를 보니 그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슨 문제 있어요?”
“아뇨……. 그 철문이 공작님이 그러신 거였던 거죠?”
“그래.”
내 대답에 알렉스는 긴장이 풀린 듯 길게 한숨을 쉬었고, 아일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귓가가 무슨 일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마리어스 기사들과 대화하는 동안 아일라는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열 있는 거 아니에요? 잠시 얼굴 좀 들어봐요.”
아까 계속 추운 곳에 오래 있어서 그녀까지 감기에 걸린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아일라는 내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더욱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아, 아니에요!”
절대로 고개를 들지 않겠다는 듯 고집을 부리는 그녀의 행동에 조금 놀란 나는 그녀에게 더 말을 거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조용히 시선을 옮겨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알렉스는 딴청을 피웠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아까 그녀가 응접실에 들어올 때 눈이 퉁퉁 부어 있던 것이 생각났다. 테이블에 있던 종을 흔들어 하녀를 불렀다.
“얼음주머니 좀 가져오렴.”
“네, 마님.”
하녀가 가져온 얼음주머니를 아일라에게 건네자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얼음주머니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로 눈에 있는 열 좀 식혀요.”
“감사합니다….”
아일라는 눈에 얼음주머니를 올리며 열을 식히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평소라면 그냥 모른 척 넘어갔겠지만, 그녀의 행동이나 대꾸가 의미심장한 게 느낌상 나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알렉스에게 집요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이죠?’
하는 의미가 담긴 눈빛을 가감 없이 보냈다. 내 눈총에 알렉스는 난처한 듯 얼굴을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휴, 됐어요.”
돌연 생각이 바뀌었다. 아일라가 아까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던 이유가 이 때문이라면 굳이 캐내서까지 알아낼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아일라가 있는 자리에서. 알렉스는 머쓱하게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있는 커피를 보고 있었다.
“이거 마셔도 되나요?”
“그럼요, 혹시 차가우면 새로 타오라고 할게요.”
아까 추운 밖에 고생했을 그들을 위해 미리 하녀에게 내오라고 했던 커피였다.
“아, 아니요. 마실 수 있는 커피면 괜찮아요.”
어감이 이상하게 들렸다. 알렉스는 커피 냄새를 킁킁 맡더니 이내 맛을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커피에 독이라도 타 놓은 듯한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제 하녀가 독은 안 탔을 테니 괜찮아요.”
내가 농담처럼 한 말에 알렉스가 하하, 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말을 이었다.
“마침 잘 되었네요. 드레스도 도착했으니 알렉스도 한번 봐줄래요?”
“제가요? 제가 그런 거 보는 눈이 없어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알렉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 사람의 눈이라도 더해지는 게 훨씬 나으니까요.”
그가 드레스 디자인을 꼼꼼히 판별하고 분별할 수 있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나 또한 후계자로 있을 때 드레스에 대한 건 아예 문외한이었으니 말이다. 그도 연구실에만 있어 드레스를 보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알렉스는 여기에 웬일이에요?”
아일라는 내가 회사에 나오지 않아 걱정되어 병문안을 온 거라면 알렉스는?
내 물음에 알렉스의 시선이 미묘하게 빗겨나갔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을 알아차린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아하. 알겠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알렉스가 황급히 대꾸했다. 간을 보는 말에 바로 반응을 하는 순진한 어린양의 모습에 내 얼굴엔 절로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흐응-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내가 뭘 알겠다고 한 건지 알고 그러나요?”
“…아니요. 저도 사장님이 걱정되어서 방문한 거예요.”
“암, 그렇겠죠.”
“정말이에요!”
놀리는 재미가 있는 아이였다. 알렉스는 부끄러움에 울긋불긋해진 소년의 얼굴로 흘긋 아일라를 보고 있었다. 속마음이 훤히 보이는 이 마법사는 꽤 마음이 들었다.
‘알렉스를 아일라와 함께 연회에 참석시키는 건 어떨까?’
즉흥적으로 든 생각이었으나 꽤 괜찮은 발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외려 마법을 가르치는 사제 사이인 동시에 비슷한 나이의 남녀였으니 나와 아일라가 연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구색도 모양새도 괜찮을 것이다.
그 생각을 아일라에게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싫다는 게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아래로 늘여 트리며 음울히 말했다.
“제가 사장님께 누가 될 것 같다면 그렇게 할게요.”
“전혀 아니에요, 난 그냥 가볍게 권해본 거였어요. 아일라가 싫다면 그리해요. 우리 드레스나 보러 갈까요?”
어디선가 누군가의 기대가 파사삭,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일라의 표정을 본 나는 급하게 말을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언제 어두웠냐는 듯 금방 환하게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네, 저는 좋아요.”
드레스룸과 응접실의 위치는 거의 양쪽 끝이었다. 조용히 곁에서 복도를 걷던 알렉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택이 굉장히 넓네요. 그런데 혼자 살기엔 쓸쓸해 보여요.”
그 말에 아일라가 알렉스를 찌릿 흘겨보았다. 그런 눈치 없는 말을 왜 하냐는 듯한 질책 어린 시선이었다. 나는 사과하는 알렉스에게 괜찮다며 대답했다. 어차피 마탑에 있는 그는 마르그리트 백작 부부가 별거 중이라는 걸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사람은 자고로 넓은 집에서 살아야죠. 그리고 이런 넓은 집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고. 이 넓은 집을 관리할 사람을 고용하려면 돈이 필요해요. 알렉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겠나요?”
“…어, 사랑?”
알렉스의 대답은 세속적인 나와 다르게 낭만이 있었다. 나와 아일라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에게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
아일라는 알렉스의 대답을 곱씹었다. 에르도안 공작과 첫 만남에서 그가 그녀를 충격에 빠트린 말이었다. 그와 다르게 알렉스가 말하니 별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 사랑도 중요하죠. 그러나 돈이 없는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기 마련이에요. 다시 생각해 봐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가족이요?”
“돈!”
정답은 알렉스가 아닌 아일라 쪽에서 나왔다.
“역시 우리 아일라는 똑똑하다니까.”
나는 그녀를 칭찬하며 부둥켜안았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
헉!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했던가.
아일라를 향한 주접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