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가문 마차를 점검하기 위해 나온 리온은 박살 난 정문을 붙잡으며 우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우는 여자 때문에 쩔쩔매는 남자가 있었다. 갈색 머리에 회색 눈을 한 남자는 파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가 입는 옷임을 한눈에 알아본 리온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한발 물러섰다.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자들이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리고 저분은….”
자신에게 말을 건 남자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주변을 인식했다. 귀족 가문의 기사였던 경험을 떠올리며 여차하면 주변에 있는 기물을 이용해 공격이나 방어할 태세를 갖추었다.
리온의 시선이 여자에게 닿았다. 누가 죽기라도 한 듯 오열하는 여자의 모습은 퍽 처량하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여기가 마르그리트 백작저가 맞나요?”
일행 중 남자가 물었다. 리온은 잠시 입을 다물고 혹시 모를 가능성에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손님이 온다는 연통이나 인편은 받지 못하였다. 아니, 하나 있긴 했다.
카롤라 부티크에서 연회복이 완성되어 오후 중으로 방문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자들은 부티크에서 보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침묵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남자는 안도하며 웃었다.
“아일라, 여기 사장님 댁이 아닌가 봐요! 아무래도 쪽지엔 잘못 적힌 주소가 있던 모양이네요.”
‘사장님?’
아일라라고 불린 여자의 이름이 어디선가 낯이 익었다. 마님께서 회사에 새로운 비서를 두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의 이름이 아마,
“혹시 레니에 영애입니까?”
신문에서도 그녀의 출가로 이야기가 자자했다. 출가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동시에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전까지 세간에선 레니에 후작의 자식이란 에스텔라 레니에와 조르지오 레니에. 그 쌍둥이 남매만을 이르는 말이었다.
“네, 네. 맞아요.”
리온의 질문에 대답한 쪽은 남자였다.
“아! 저는 알렉스라고 해요.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과 계약 문제로 얽혀 있는 사람이죠. 여기가 백작저가 맞다면 하나만 여쭙고 싶은데 백작 부인의 안부는 어떠신지… 어제 회사에 출근을 안 하셨다고 하셨죠? 아일라?”
허둥지둥 말을 잇는 알렉스가 울먹거리고 있는 아일라를 보다가 그녀가 대답할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해명했다.
“수상하게 보이겠지만 저희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수상한 사람이 자신을 수상하다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그런데 이 철문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아일라를 눈물짓게 한 원흉인 철문을 가리키며 알렉스도 울상을 지었다. 리온의 시선이 철문에 닿았다. 그도 어제 오후 깔끔하게 절단이 된 철문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그러다 에르도안 공작이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바로 수긍했다.
“저분이 울고 계시는 이유가 저 철문 때문입니까?”
리온은 기민하게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고 되물었다.
“네! 그래서 여기가 백작저가 맞나요? 제발 말씀해 주세요!”
알렉스는 절박한 얼굴로 리온에게 매달렸다. 커다란 성인 남자가 소맷부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모양새는 누가 보기에도 좋지는 않았다. 그건 리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님의 손님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그는 인내심을 가졌다. 리온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맞습니다.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십시오.”
보통 그의 선에서 불청객을 쫓아 보내지만 척 보기에도 이 둘은 성인과 청소년의 경계에 있는 듯 꽤 어려 보였다. 아무리 불청객이라도 어린 사람을 쫓아 보낼 정도로 리온은 모질지 못했다.
* * *
집무실에서 한창 밀린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나는 리온에게 이야기를 전달받고 깜짝 놀랐다.
“아일라랑 알렉스가? 빨리 들여보내.”
이 추운 날, 정문 앞에 어린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게다가 어제 회사에 오지 않았다고 걱정되어서 백작저에 방문했다니. 얼마나 갸륵한 아이들이란 말인가. 나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마침 방금 오후에 부티크에서 옷이 완성되어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을 전달받았던 차였다. 아일라에게 완성된 옷을 입혀볼 생각에 갑자기 즐거워졌다. 밀린 서류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 순간은 잠시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에 미리 내려갔다.
“벽난로에 불 좀 더 지피렴.”
여기까지 오느라 손발이 얼어붙진 않았을지 걱정되었다. 병문안을 왔는데 환자가 되어 나가게 되면 그것도 안 될 일이지. 반갑게 맞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응접실에 들어온 아일라의 상태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두 눈이 팅팅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 안색 또한 알렉스나 아일라나 말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울고 난리 치는 아일라를 다독이느라 하얗게 질린 것이었지만, 그의 상황을 모르는 나는 단순히 밖에 오래 있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미안해요, 밖이 많이 추웠죠? 두 사람 다 얼른 들어와요.”
“흐윽… 사, 사장니임.”
아일라가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부둥켜 껴안았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놀란 나는 리온과 알렉스를 홉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흐읍.”
“나, 나도요. 아일라도 그간 별일 없었죠?”
이렇게 격한 반가움을 표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당황한 어조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알렉스는 저 멀리서 감동적인 모녀 상봉이라도 보는 듯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상황뿐이었다. 이거 설마 나 놀리려는 몰래카메라 같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된 일이었어요?”
알렉스에게 대충 전말을 들은 나는 아일라의 행동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일라, 요사이 과로 때문에 몸이 안 좋아졌을 뿐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루 쉬었더니 완전히 멀쩡하답니다.”
그런 내 말에도 아일라는 한 치도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내 팔을 꽉 잡아 붙들고 고개를 숙인 채 옆에 앉아 있었다. 마치 어린 동생이 내가 죽는 악몽이라도 꿔서 고집을 부리는 모양새였다. 내 입가엔 난감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알렉스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비단 그런 시선을 보내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리온도 알렉스와 같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두 분… 제가 모르는 더 깊은 사이인가요? 혹시 무례한 질문이라면 죄송해요.”
“네, 무례한 질문이네요.”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는 순진한 낯으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 사람들은 언제 오는 거야!’
이 어색하고 민망한 상황을 파훼해 줄 희망은 완성된 옷을 들고 올 부티크 사람들이었다. 분명 가장 아름답고 시선을 이끄는 화려한 옷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 옷이 도착하면 아일라와 하하, 호호- 정답게 웃음을 흘리며 옷을 입어보고 서로를 칭찬하겠지. 자연스럽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 기대하며 부티크 사람들만 기다리고 있는데 왠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리온에게 슬쩍 시선을 보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상황을 살피러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슨 상황인지는 곧 알게 되었다. 문밖에서 리온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이 들리다가 문이 벌컥 열렸다.
응접실로 들어온 건 리온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들어오는 사람을 막으며 소리쳤다.
“아무리 황궁 기사라도 황실 인장 없이 이렇게 무단으로 들어오면 안 됩니다! 게다가 그런 무기를 들고…!”
리온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팔을 잡고 있던 아일라가 의아한 얼굴로 내 시선을 따라갔다.
“마, 마리어스?”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응접실에 들어온 불청객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리어스 기사단.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금색 갑옷을 입지는 않았고, 기사 제복으로 추정되는 검은 복식을 하고 있었다. 리카르도가 주중으로 마리어스를 보내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아.”
그리고 리온에게 이에 대한 이야기를 언질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미안하다, 리온.’
“리온, 괜찮으니 잠시 나가 있어.”
“예? 하지만 부티크 사람들이….”
“부티크 사람?”
그의 이상한 말에 나는 마리어스 기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사들은 젊은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간의 소문처럼 험악하고 무시무시한 인상이기보단 평범한 청년들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깊은 수렁에 빠진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이 자들이 황제의 최측근 기사단?
“저, 저희는 정말 백작 부인의 주문을 받고 옷을 전달하러 온 사람이에요! 히끅!”
그들 뒤로 이상한 말이 들렸다. 목소리의 근원을 따라 시선을 좇으니 익숙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사벨라 아래에서 옷을 만드는 조수들이었다.
그들로 인해 대략 상황을 유추한 나는 뒷목을 매만졌다. 혈압이 올라 뒷골이 슬슬 당겼다.
“당신들…….”
마리어스 기사들에게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그들이 일제히 도열하였다.
“명을 하달받고 왔습니다.”
깔끔하게 잘린 얼음의 단면 같은 그들의 행동에 리카르도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뭐라 따져야 했는데 그들의 위압적인 기세에 내 기세가 한층 팍 꺾였다.
“그, 렇군요. 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붙잡힌 거죠?”
부티크 사람들은 바로 옆에서 마리어스 기사들에게 포박되어 있었다. 그들은 목 아래에 밀착되어 있는 칼에 몸만 바르르 떨며 간헐적으로 새된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침입자는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포획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누구 명이죠?”
“단장님의 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