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밤이 깊어가던 시각이었다. 새벽의 어스레한 빛이 아슴푸레하게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노크 소리에 잠을 깨고 비몽사몽 눈을 떴다.
“들어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짙은 남색 머리를 가진 장신의 남자가 방에 들어왔다. 리온이었다. 늘 단정한 미소를 달고 다니던 그가 웬일인지 흐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일에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같았다.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몽롱하고 무거운 몸을 억지로 곧추며 똑바로 앉았다. 뭐가 되었든 중요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이 자리에 들릴 리 없는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누워 있어, 오필.”
설마 내가 아파서 헛걸 듣는 건가? 하지만 내 생각을 비웃듯 리온의 뒤에서 엘렌이 나왔다.
정확히는 마르그리트 백작으로 변장한 그가.
나와 비슷한 블론드 금발을 한 채 엘렌은 천천히 침대로 다가오며 흘긋 시선을 던졌다. 시선을 받은 리온은 자리를 비켜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 방을 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방을 나가는 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 미쳤어? 들키면 어쩌려고!”
그와 단둘이 방에 남게 된 나는 이 황당한 상황이 꿈이 아니란 것을 알자마자 경악했다. 물론 밖에 들려도 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원래도 상식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오밤중에 백작으로 위장을 하고 백작저에 들어오리라곤 가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엘렌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플 때 혼자 있는 거 싫어했잖아.”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푸른 머리는 창문 틈에서 부는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태평스러운, 어쩌면 그답다는 생각이 들 만한 대답이었다. 대책 없는 말에 뭐라고 잔소리는 해야 하는데 그가 한 말이 신경이 쓰여 다시 입을 다물었다.
꿍하게 그의 말을 곱씹었다.
‘아플 때 내가 혼자 있는 걸 싫어했다고?’
“내가 언제 외로워했다고 그래. 어떤 상황이 되었든 이런 방식으로는 오지 마.”
어떤 이유에서인지 신기할 정도로 삽시간에 머리끝까지 몰렸던 열이 픽 식어버렸다.
“앞으로 외롭지 않게 종종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오필.”
생긋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내 말을 귓구멍으로 들은 거 맞아?”
나는 퉁명스레 말을 툭 던지고 엘렌을 등진 채 누웠다. 아까부터 볼이 뜨끈했다. 이게 감기 때문에 열이 올라서 그러한 건지 부끄러움 때문에 그러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잠들기 전까진 외롭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속마음을 들켜…? 혹시 또 허락도 없이 읽은 거 아니야?’
퍼뜩 그런 생각이 스치자 다시 몸을 움직여 돌아누웠는데, 옆에 엘렌이 누워 있었다. 그것도 나를 보는 방향으로.
“뭐, 뭐야.”
얼떨결에 누운 채로 그와 정면으로 시선을 맞부딪치게 된 나는 깜짝 놀라 흠칫 몸을 굳혔다.
“어디 아파?”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엘렌이 천덕스럽게 물었다. 착하고 순진하게만 보이는 그의 얼굴에 이 상황이 순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딜 가나 이런 인상을 한 사람은 위험했다. 이런 미남이라면 사업할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저런 얼굴에 끔뻑 속아 넘어가 누가 봐도 불공정인 계약서를 쓰거나 사기를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니까.
“아니. 네가 왜 여기 누워 있어?”
게다가 편하게 누워 있는 모양새는 본인이 이 방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입은 옷도 어렸을 때부터 잘 때 입는, 그와 어릴 때 자주 같이 잠을 자던 나에겐 익숙한 털 잠옷이었다. 저건 언제 갈아입은 거야?
“음… 앉아서 밤샐 수는 없으니까?”
“왜 네가 여기서 밤을 새우는데!”
그의 대답에 대답하는 내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가 방문 밖에 누가 들을세라 뒤늦게 다시 볼륨을 낮추었다. 누가 듣는다면 정말 부부싸움이라고 오해할 소리였다. 나는 한층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무슨 꿍꿍이야.”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의식하자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어색하게 들렸다. 나란히 침대를 공유하게 된 이 상황 자체도 당혹스러웠으니 말이다.
“오늘은 오필의 남편으로 왔으니까 아픈 아내 옆에 있는 게 당연한 거지.”
“…….”
그의 말에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어디서부터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 상태로 대화를 이어가면 나만 피곤해지는 일이었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를 찌릿 흘겨보았다. 한편, 엘렌은 자신의 말이 지당하다는 듯 혼자 말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이편이 오필한테도 적적하지 않고 좋지 않아?”
“너… 설마 읽은 건 아니지?”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아, 이 방에 혼자 있다면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뻥 차버릴 텐데. 엘렌의 대답에 확신을 얻은 나는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 한편으론 조금 놀랍기도 했다. 그가 내뱉은 말에 내포한 의미를 생각하면.
“네 입에서 그런 인간다운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 지금 대공 부인께서 널 보시면 감동하셔서 눈물을 흘리실 텐데 말이야.”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에서야 바보처럼 헤실거리지만, 어렸을 땐 가문에서나 밖에서나 늘 무미건조하고 웃질 않아 대공 부부가 엘렌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가 인간다운 모습을 보일 때는 거슬리는 사람에게 못된 장난을 할 때뿐이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철이 든 거야?”
“보시다시피.”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대꾸한 엘렌이 말을 이었다.
“오필, 읽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원하던 대답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찝찝했다.
“그렇다면 왜….”
아는 척 말했던 건데, 하고 말하려고 했던 내 입이 이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읽지 않았다고 하면 그렇게 남겨두는 게 내 쪽에서도 마음이 편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엘렌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순 거짓말쟁이 같으니.’
나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붉어진 얼굴을 이불 속에 감추었다. 어디선가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나무 냄새만 나던 내 방에선 낯선 향기였다. 이 향기의 원인을 의식하자 다시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어릴 때도 종종 있던 일이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엘렌은 대공저에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종종 내 침대에서 자다가 집에 돌아간 적이 많았다. 그럼 지금 상황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과거가 떠오르자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엘렌이 자세를 바꿔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웠다. 밤이라 어두운데도 나를 보는 그의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이 났다. 마치 나른하게 잠을 자듯 누운 고양이가 눈만 뜬 채 시선으로 주인을 좇는 모습 같았다. 그의 미묘한 질문에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리고 내 생각 안 읽고 있었다면서? 그러한 의미가 담긴, 불만 어린 시선을 지그시 보냈다. 그러자 엘렌은 돌연 하품하며 눈을 감았다.
“나 졸려, 오필.”
길게 뻗은 속눈썹 끝에 대롱대롱 눈물까지 달며 졸린 낯을 하고 있었다. 말을 돌리는 수작이 빤히 보였지만 모르는 척했다.
“환자가 안 자는데 너는 자려고? 병간호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는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장난기가 엿보였으나 불길한 느낌이 들어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필은 잠이 안 와?”
“어… 그렇다면?”
“이런. 아픈 어린이는 잠을 자야 낫지.”
순식간이었다. 내 이마에 그의 차가운 손이 닿은 것은.
그대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잘자, 하고 인사하는 엘렌의 말이 아득히 멀어지듯 귓가에 스치고 지나갔다.
저 망할 자식….
* * *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귓가엔 참새가 짹짹거리는 앙증맞은 소리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엘렌이 이마에 손을 짚었을 뿐인데 눈을 뜨니 벌써 한낮이 되어 있지 않은가. 옆자리의 온기는 차가워진 채였다. 엘렌이 이 방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의미였다.
“며, 몇 시야.”
어제와 같은 선득한 느낌에 서둘러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7시. 아직 아침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아으. 아파.”
팔을 꽉 꼬집으니 아팠다. 내심 이번에도 꿈이고, 현실은 오전 10시쯤 되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출근하기 위해 침대 옆 당김줄을 잡아당겼다. 언제 몸이 아팠냐는 듯 몸 상태는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그래서 꿈일 거라 거의 확신하고 억세게 팔을 꼬집었던 탓에 지금도 그 꼬집힌 부위가 얼얼했다.
‘이렇게 열감기가 하루아침에 낫는 병이었던가?’
엘렌이 이마에 손을 올린 순간 수면 마법만 아니라 다른 마법도 함께 걸었던 게 아닐까,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내렸다.
그런데 방에 들어온 사람은 평소 옷 시중을 들던 하녀가 아니었다.
“리온?”
그녀 대신 들어온 리온의 얼굴은 어제 새벽과 달리 핼쑥하고 어두웠다. 그늘이 진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 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어제 일? 아….”
아침에 그가 하녀 대신 내 방에 들어온 이유를 비로소 알아차렸다. 어제 있던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어깨너머, 문틈으로 이쪽을 흘긋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평소 옷 시중을 들던 하녀 리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리체가 머뭇거리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뒤늦게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리온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 아니… 흐윽… 저 때문이에요… 마님.”
방 안에 들어온 리체는 리온 앞에 서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제, 제가 아침에 침실만 살펴보고… 크흡… 출근하셨다고 경솔히 판단해서… 흐윽.”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하는 하녀 옆에서 리온은 이내 침착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아침에 가문 마차가 백작저를 떠나지 않았다는 걸 유심히 확인하지 않은 제 책임이 큽니다. 엄중히 벌을 내려주십시오. 가문을 떠나라고 명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