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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40화 (41/124)

40화

커튼이나 의자, 침대와 같은 가구들은 고급스러우나 특유의 사람 사는 느낌이 느껴지지 않는 방이었다.

기실 가문을 나오면서 쉬는 날 없이 일하기만 했기 때문에 이 방은 잠을 자는 용으로만 쓰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손님에게 이런 방을 보여주니 괜스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삭막하죠?”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여상한 어투로 펠릭스가 대꾸했다.

“아닙니다. 딱 ‘부부가 사는 침실’처럼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이 드는군요.”

어쩐지 묘한 악센트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부부가 사는 침실처럼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

그 말의 뜻을 정반대로 뒤집으면 그게 바로 이 방일 것 같은데 말이죠?

“호호, 그렇죠…?”

사실 나나 방을 청소하는 사용인을 제외하곤 발을 들인 적도 없는 방이었다. 리카르도는 펠릭스의 말에 눈썹만 올리고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그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아까 무지막지한 힘으로 난데없이 짐짝인 양 들어 올릴 때는 언제고, 나를 침대에 내려놓은 손길은 신줏단지 모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이 상황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이불을 덮은 채 눈만 끔뻑였다. 리카르도가 온 것은 차치하고, 그의 보좌관까지 저택에 온 이유는 뭐지?

펠릭스는 아까부터 들고 있던 큰 가방을 옆에 있던 협탁에 올려놓고 열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청진기가 나왔다.

내 의아한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목에 청진기를 쓰며 말했다.

“저희 가문이 대대로 대신전에서 일하던 의사였습니다. 진찰하다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안심하고 진료를 받으셔도 됩니다. 부인.”

“네, 네?”

방금 말끝에 이상한 말이 붙은 것 같은데. 내가 뭐라 지적하기도 전에 펠릭스는 내 몸에 체온계를 끼우곤 청진기를 갖다 대었다.

“열감기군요. 며칠간 푹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도로 커다란 가방에 청진기와 체온계를 넣었다. 저렇게 커다란 가방을 청진기와 체온계만 들고 다니기 위해 사용했다고 하기엔 모양새가 꽤 묵직해 보였다.

“그리고 외부나 내부 일에 관한 고민이나 잡념도 회복하시는 동안은 잠시 접어두거나 잊으시는 게 좋습니다.”

환자한테는 그런 사소한 것들조차도 해악이 되기도 합니다.

펠릭스가 가방 문을 닫으며 담백한 말투로 말했다.

이어 그는 종이를 한 장 꺼내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 인위적이고 어색해 보이는 미소였다.

“혹 저희에게 청구할 금액이 있다면 이 주소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청구요?”

‘필요하신 곳이 있을 겁니다.’라는 의문스럽기 이를 데 없는 말을 남기곤 하늘에 예쁜 노을이 깔렸을 때 리카르도와 그의 보좌관은 저택을 떠났다.

굳이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여기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리카르도를 펠릭스가 반쯤 끌고 나갔다는 것이 정확했지만.

그들이 떠나고 시간이 더 흐른 시점인 지금은 완전히 해가 저물어 하늘은 어둑해졌고, 광원이 없는 방에는 밖보다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홀로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생각했다.

‘열감기라.’

타고나길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던지라 어렸을 때 집무실에서 난롯불에 불이 꺼졌는지도 모르고 밤을 새우며 일하다가 앓았던 적이 자주 있었다. 왠지 옆구리가 허전했다. 옆에서 어머니가 밤새 간호를 해 주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플 때마다 달큼한 호박 스프를 손수 만들어 먹여주시곤 했었지.’

아직도 그때 먹었던 스프의 맛이 기억에 생생했다.

아파서 그런 건지, 과거 일을 떠올려서 그런 건지.

괜스레 외롭기도 하고, 울적하기도 하면서 그립기도 했다.

‘그립다고?’

절대로 평소라면 들지 않았을 감정이었다. 일순 든 감정에 더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그 감정을 떨치듯 이불 속에 머리끝까지 파고들었다. 몸살이 단단히 들었는지 이불로 뒤덮여 있음에도 몸이 으스스 떨렸다.

“으으… 진짜 보좌관을 구해야 하나.”

하루 안에 회사 일에 이어서 백작 가문의 일도 처리하는 게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일이긴 했다.

최근 들어 늘린 사업 때문에 할 일이 더 많아져 머리는 터질 듯 복잡했다.

현실을 생각하면 리온의 말대로 보좌관을 새로 구하는 것이 현명했다. 어쩌면 훨씬 전부터 구하는 것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태까지 백작 가문에 보좌관을 들이지 않은 것은 나의 정체가 탄로 난다는 이유보다 더 원초적이고 감정적인 연유였다.

단순히 말하자면 외부인에게 가문의 내사를 맡긴다는 것이 껄끄럽고, 믿음이 안 갔다. 나는 이불 안에서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런 거 보면 나도 아버지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니까….”

아버지는 가까운 친인척에게조차도 가문의 내사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국에 있는 공작 중에 유일하게 보좌관을 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카시어스 가문의 일은 오직 아버지와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그런 아버지의 아래서 자라서 그런지 나 또한 보좌관을 고용할 마음을 쉽사리 먹기가 힘들었다.

‘아까 펠릭스가 이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었지.’

그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식었던 머리가 저런 생각을 하자마자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 *

-퉁!

제도에 있는 에르도안의 임시 가택에 도착한 펠릭스는 리카르도와 단둘이 집무실에 남자 테이블에 큰 가방을 올려두었다.

“후.”

한숨을 길게 내쉰 펠릭스가 바지춤에서 손수건을 꺼내었다. 북부의 날씨에 익숙한 그가 꽤 얄팍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음에도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 가방 속을 속속히 살펴본다면 의사들이 사용하는 웬만한 종류의 의료기구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가방을 든 그의 곁에 마차에 치인 사람이 생긴다면 완벽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열감기 하나를 진료하려고 이런 짐을 들고 다녀야 했다니.’

이건 펠릭스가 자발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오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중매 회사에서 사택으로 돌아온 각하는 어딘가 불안정하고 다급해 보였다. 펠릭스가 에르도안 공작 가문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각하의 모습이었다.

“다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채비를 꾸려라. 위험한 일이 생긴 것 같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실내를 무겁게 잠식했다. 펠릭스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북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웬만해선 ‘위험한 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각하의 말에 펠릭스는 질문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채비를 꾸리러 집무실을 나갔다. 그게 실수이자 착오였다.

펠릭스가 준비한 가방과 짐을 본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이번에도 펠릭스는 군말 없이 다시 짐을 꾸렸다. 한층 묵직해진 무게와 커진 크기의 가방을, 끽해야 서류뭉치만 들던 자신이 드니 압박감이 굉장했다.

하지만 의사였던 그에게 이 정도의 준비성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 위중한 환자나 부상자가 있다는 뜻일 터.

펠릭스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불평하지 않고 각하를 따라 발걸음을 바삐 놀리며 함께 가문 마차에 탑승했다.

잠시 후, 마차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펠릭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길은 북부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가 묻자, 리카르도는 그제야 행선지를 밝혔다. 이야기를 들은 펠릭스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입을 떡 벌렸다.

“마르그리트 가문에 연통은 넣고 가는 겁니까?”

펠릭스는 물어보면서도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다.

리카르도는 그의 물음에 흘긋 시선을 던졌다가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저건 명백히 모르쇠였다.

펠릭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공작 가문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차치하고, 엄연히 주인이 있는 집에 연락도 없이 방문하다니.

뒤통수가 얼얼했다. 느닷없이 사기를 당했는데 이중고까지 겹친 느낌이었다.

그는 표정을 굳히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각하께서 백작저에서 난동을 부리시면 어떡하지?’

저번에도 백작저에 간다고 했을 때 극구 말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다행히 상을 치르는 일 따위 생기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모를 일이었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사후 처리까지 고안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마차가 푸른 벽돌로 지어진 저택 앞에 멈추었다.

마르그리트 백작저였다.

“이런 곳에 집이 있었군요.”

펠릭스는 안경을 고쳐 쓰며 주위를 살폈다. 마차를 타는 내내 들렸던 사람들 소리가 언제 들렸냐는 듯 사그라들었다.

가까운 거리에 시가지가 있는 좋은 위치의 저택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집 근처는 인적이 드문드문했다.

게다가 주변에 저택보다 큰 건물들과 커다란 덩굴이 자리를 잡고 있어 무심한 사람은 이곳에 저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나갈 성싶었다.

누가 본다면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자리를 고의로 잡은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이 또한 섣부른 추측에 불과하지만.

“…….”

펠릭스와 리카르도는 백작저의 정문 앞에 서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답답한 상황에 펠릭스의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연통도 없고,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데 어떤 핑계를 대며 백작저로 들어갈지가 난관이다.

심지어 으레 있어야 할 문지기도 없었다.

제도엔 사병을 쉽게 들이기 힘들어 병사인 문지기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펠릭스는 뒤늦게 상기했다.

‘이를 어쩌지.’

정문에서 백작저까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를 지른다고 한들 집 안에 있는 사용인들에게 닿지는 않을 것이다.

-스릉.

바로 지척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펠릭스가 놀라 소리쳤다.

“각하!”

리카르도가 어느덧 칼집에서 칼을 빼서 들고 있었다. 칼날에는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오라였다.

“남의 집 정문을 부수면…!”

“문제 있나?”

“없습니다만….”

자고로 칼을 든 사람은 건들지 않는 거라고 했다. 펠릭스는 칼에 찔려 들것에 실려 온 환자들을 돌보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펠릭스는 다시 각하에게 설득을 시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각하, 이 방문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백작 부인께서 다른 사적인 사정이 생겨 회사에 오지 않으신 걸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바로 마차로 각하를 데리고 가 사택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게 백작과 백작 부인께 무슨 민폐란 말인가?

그리고 중간에 끼일 저는 무슨 개고생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단연코 후자였다.

다음 날 실릴 신문 헤드라인에 걸릴 문구도 문제였다.

<특보! 에르도안 공작과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의 숨겨진 치정 관계! 에르도안 공작과 백작, 한 여인을 두고 혈전을 벌이는데….>

길게 본다면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굳이 길게 보지 않고, 가까운 미래를 생각한다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각하의 칼날에 너절해진 정문을 본 펠릭스의 등줄기는 서늘하기만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각하의 상태가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일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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