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엘렌?”
초여름의 신록을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가 내 부름에 활처럼 휘었다.
“응, 오필.”
지금의 엘렌은 내 가슴에 닿을 듯한 높이의 키를 가지고 있었다. 아까 눈을 떴을 때보다 더 낯선 위화감이 느껴졌다. 원래 그의 모습은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엘렌이 나에게 쭉 손을 내밀었다.
“이건 뭐야?”
이번엔 내 생각대로 입술이 움직였다. 그가 내 쪽으로 내민 손안에 있는 돌멩이에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건 오필 거야.”
“어… 고마워?”
“응. 이제 얼른 나가자. 이제 곧 공작님께서 돌아오실 거야.”
그가 내 손을 잡고 내 방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분명 그가 나보다 한참 어리고 몸도 작았음에도 나는 그의 손에 속절없이 끌려다니고 있었다. 작은 몸에 깃든 괴력이 엄청났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왜 여기에 들어온… 어?”
그렇게 말하는 도중,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빠르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푸드덕.
내 등 뒤로 새가 날갯짓하며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소리에 흠칫 놀라 등 뒤를 돌아보자 머나먼 곳까지 쭉 나무들이 이어져 있었다.
숲이었다. 이런 곳엔 처음이었다.
“오필, 얼른 와!”
엘렌은 어느새 멀찌막한 곳에 서서 나를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왜인지 모르지만, 그의 뒤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공작 가문에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으니까.
엘렌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이 길이 내 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엘렌이 멈춘 곳은 긴 강이 보이는 곳이었다.
“도착했어. 오필.”
“응.”
맑은 하늘과 초여름의 초록 나무들이 맑은 강에 비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었다.
“나 먼저 던질까?”
엘렌이 묻자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있는 힘껏 돌을 강가로 던졌다. 그가 하던 행동이 이제 뭔지 알게 된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물수제비였다.
그리고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엘렌이 물수제비에 꽤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와.”
내가 멍하게 감탄하고 있자, 엘렌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필도 얼른 해 봐.”
“어, 응.”
나도 엘렌처럼 자세를 잡고, 있는 힘껏 돌을 던졌다. 한껏 진지하게 임한 것이 무색하게 내가 던진 돌은 그대로 강 속에 퐁당 빠져버렸다.
“혼자 돌 던지기 놀이해?”
엘렌이 옆에서 빙글거리며 말했다.
“……아니 뭐.”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그의 말이 맞아서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이어 엘렌은 언제 가져온 건지 모를 강아지풀을 가지고 놀다가 흙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나 또한 그의 옆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있는 구름이 느리게 흘러갔다.
옆으로 돌아누워 멍한 눈으로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보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오필?”
엘렌은 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사람을 본 것 같아.”
“오필!”
엘렌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본능적으로 숲에 있던 아이를 쫓기 시작했다. 아이, 그래, 아이였다. 여기 있는 엘렌보다 더 작은 어린아이.
그렇게 발자국을 좇다가 문득 숲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리고 눈앞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성이 있었다.
카시어스 공작성.
그러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작달막한 손에 시선을 내리자,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건…… 나?”
내 말에 그 아이는 빙긋 웃었다.
그 아이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낯선 목소리가 하늘에 천둥을 치는 소리처럼 내 머릿속에 웅웅- 울려 퍼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오필리아. 오필리아!”
“고, 공작님?”
잠에서 깨자 비라도 맞은 듯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눈앞은 흐릿했다.
드디어 목도하게 된 익숙한 집무실 책상의 모습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아니… 리카르도가 여기 있을 리가.”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멍한 눈으로 책상 위를 훑었다. 그러다 의자 옆 바닥에 시계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을 자는 동안 시계를 책상 밖으로 밀어버린 듯했다.
“빌어먹을 잠버릇 같으니라고.”
시계는 다행히 망가지지 않았다.
나는 주섬주섬 시계를 주우며 시각을 확인했다.
“지금 시간이… 뭐?! 10시 30부운?!”
깜짝 놀라 창밖을 보니, 놀랍게도 하늘은 푸르고 화창했다.
“……와, 시X.”
난생처음으로 평일에 늦잠을 잤다는 생각과 지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욕설을 내뱉었는데, 이곳에 절대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괜찮나? 많이 핼쑥해 보이는군.”
리카르도의 목소리였다. 나는 잠에서 덜 깬 몽롱한 눈으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투피스 정장을 말쑥이 입은 그가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도 꿈인가?”
리카르도가 아침부터 내 집무실 안에 있을 리가 없었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판단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그래! 꿈이었어!’
몽중몽. 꿈속의 꿈이었던 거라면 이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오필리아 마르그리트가 늦잠이랑 지각이라니, 애초에 가당키나 하는 이야기인가?
꿈이라는 결론이 나자 나는 비실비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어라. 의사를 부를 테니……?!”
“그래, 맞아. 이 얼굴이란 말이야.”
나는 덥석 리카르도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의 몸이 딱딱히 굳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대로 그의 얼굴은 티끌 하나 없이 부드러웠고, 반들반들했다.
“흐음…… 꿈 치고는 촉감이나 체온도 너무 생생하지만… 뭐, 어때.”
방금 꿨던 꿈도 돌을 만지던 촉감이나, 숲에서 부는 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느낌도 생생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치부했다.
현실임을 알았다면 절대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하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이따위 말도-
“크으, 우리 남주, 잘생겼다.”
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공작님, 죄송합니다.”
‘뭐? 크으, 우리 남주 잘생겼다?’
정녕 미친 게 따로 없었다.
신분 차이를 불문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만 봐도 지켜야 할 선에서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다. 당장 경을 치지 않는 리카르도가 보살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개를 푹 숙여 사과하고 있어 리카르도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잘생겼더라도 이번만큼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손을 벌벌 떠는군.”
매혹적이면서도 낮은 중저음이 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자, 잡아… 아, 아뇨?!”
그의 말에 깜짝 놀라 대꾸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곧바로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시선을 돌렸지만 왜인지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와 내 시선이 침묵 속에 잠시 얽혔다.
시선을 먼저 피한 건 리카르도 쪽이었다. 그리고 그는 대화를 잇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당황스러워 화제를 전환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황?’
일순 든 생각에 아까부터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며 속으로 스스로를 꾸짖었다.
“아침에 예약된 시간에 사무실을 방문했는데도 그대가 자리에 없더군. 그래서 백작저에 방문했다.”
“아…… 그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업무용 서류는 회사에 있어 백작저에선 상담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리카르도의 눈썹이 노골적으로 꿈틀거렸다.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다. 나는 아까부터 흐르는 식은땀을 소매 끝으로 훔치며 힐끗 눈치를 보았다.
상담을 받지 못하니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그는 내 사과는 안중에 없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백작은 어디 있지? 그런 몸으로 집무실에서 일한다는 건 무리인 듯한데.”
“…네? 아, 그게… 저는 괜찮답니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그의 말대로 내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아까부터 머리는 계속 무거웠고, 눈앞은 흐릿했다.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군.”
그가 그 말을 하자마자 눈앞이 뒤집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고, 공작님?!”
“일단 자리를 옮기지.”
내가 포댓자루라도 된다는 듯 그는 짐 나르는 모양새로 나를 들쳐 메었다.
그리고 방문을 나섰다. 문 앞에는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붉은 머리의 젊은 미남자가 큰 가방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그의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기겁한 그의 표정과 다르게 그가 내뱉는 목소리는 우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미약했다.
“공작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마치 인간말종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설마 하다못해 인간이 지켜야 할 선까지 넘으시려고…!”
“말버릇을 고쳐야겠군, 펠릭스.”
무례하기 그지없는 보좌관의 언행에 리카르도가 살벌하게 일갈했다.
나는 펠릭스의 말에 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정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
“각하, 그래도 사람을 납치하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이번엔 펠릭스의 목소리가 컸는지 집무실 앞 복도를 돌아다니던 사용인들은 가던 발길을 멈추고 휘둥그레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펠릭스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그를 지나쳐 복도에서 우리를 보던 하인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으악!”
하인은 그의 무시무시한 악력에 겁을 먹으며 비명을 질렀다.
“침실이 어디지?”
“치, 침실이요?”
“침실…?!”
하인과 내가 놀란 건 동시였다.
펠릭스는 이미 사탄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리카르도는 오해 어린 시선을 감지하고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쓱쓱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을 수 있는, 따로 마련된 장소도 괜찮다.”
리카르도가 꺼낸 의원의 이야기에 하인은 그제야 내 상태를 발견하고 황급히 내가 머무는 침실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하인은 나와 리카르도의 눈치를 번갈아 보며 침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문을 열자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휑한 방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