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길고 긴 근무시간이 끝났다.
겨울의 해는 짧았다. 벌써 해가 저물고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회사 앞에 대기시킨 마차에 탑승했다. 지팡이로 출발 신호를 보내자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바퀴가 바닥에 맞물려 천천히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우, 피곤해…….”
따지고 보면 앉아서 말만 하는 일임에도 이맘때쯤이 되면 기력을 소진해 몸이 나른하고 피곤했다.
마차가 출발하고 머지않아 푸른 저택이 보였다.
백작 저택에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신호가 들렸다.
마차 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아까보다 하늘은 더 어두워졌고 달빛은 더 빛을 발했다.
백작저 앞에는 리온과 몇몇 하인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그들이 내 뒤를 흘끔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은 엘렌이 백작으로 위장해서 저택에 왔을 때부터 그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주인님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는 건가?
‘진짜 주인은 난데.’
약간 기분이 꽁했다. 일전에 엘렌이 백작으로서 방문했을 때와 같은 기분.
작위와 저택을 사고 하인을 고용한 건 모두 내가 한 건데 정작 이 집의 주인은 가상의 인물인 마르그리트 백작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저택에 들어가자 리온이 뒤따라 붙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사람은 간사하다는 말은 암만 봐도 맞는 말이란 말이야. 걱정 어린 말에 이렇게 기분이 확 풀리는 것을 보아선.
“매일 똑같은 상담과 일과였어. 리온, 오늘 중 처리할 서류는 얼마나 남았어?”
“집무실에 정리해두었습니다만, 마님….”
“보고할 일이 남았어?”
“무례를 무릅쓰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로 서두를 밝히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심 놀랐으나 내색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야기는 해 봐. 무례인지 아닌지 내가 판단할 테니.”
“백작저에서 집무를 맡을 사람을 따로 고용하는 게 어떠실지 싶습니다.”
그리 말하는 리온의 눈빛은 조심스러웠지만 굳건했다. 오랜 고민 끝에 이 이야기를 했다는 듯이.
“무례한 걸 알면서도 왜 그런 말을 꺼낸 거지?”
그래서 그의 말에 화내거나 흘려듣지 않고 물었다. 그의 말대로 무례한 이야기였다. 집안의 대소사에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리온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 원체 드문 일이었기에 그가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꺼낸 건지 궁금했다.
“요즘 들어 마님의 낯빛이 많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니 외부 업무뿐만 아니라 백작저에서의 업무를 모두 전담하셔서 그런 것이 아닐지, 추측했습니다. 섣부른 판단이었다면 죄송합니다.”
“…….”
요새 밤잠을 설쳐서 피곤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업무 때문이 아닌, 여러 일이 복합적으로 얽혀 내 수면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살 목록에 오를 뻔했다는데 두 손 두 발 뻗고 잘 자는 게 이상한 사람이지.’
그 이상한 사람을 세 명이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일라도 황태자비의 모략으로 온갖 암살에 휘말리게 되지만 의연했다. 과연 여주인공다운 품격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이미 한 번 죽은 인생 다시 한 번 더 죽는다고 달라지겠냐는 마음이었던 건지. 그 속을 모르지만 중요한 건 나는 여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흠, 고민해 볼게.”
사용인들이 날 걱정했다는 건 갸륵한 일이지만, 이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예, 마님.”
집무실에 들어오고 문이 닫히자 홀로 남은 공간엔 자연스럽게 정적이 자리를 잡았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압도적인 서류의 양은 익숙하게 여기려고 해도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르그리트 백작령은 가신 가문이 없었다. 그래서 백작 영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젯거리도 모두 직통으로 백작저에 올라왔다.
흉년까지는 아니었지만, 전년보다 수확량이 줄어든 곡식의 양 때문에 그 곡식으로 겨울나기를 해야 하는 농민들의 우는 소리가 민원의 비중을 많이 차지했다.
‘고민이네.’
무턱대고 곡간을 열어 구휼을 감행하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진짜로 곡식이 부족한 농민과 있으면서 없는 척하는 농민을 구별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문득 리온이 꺼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런 일은 보좌관이나 전문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을 영지로 보내 영지민을 사찰하거나 조사해서 정보를 얻어야 했다.
“후우. 진짜 백작저에도 비서나 보좌관을 들여야 하나…….”
리온의 제안에 대해 예전부터 생각하지 않던 건 아니었다.
지금 백작 가문에 있는 사용인들은 대부분 귀족의 생태를 모르는 평민 출신이 대부분이라 주인 없는 저택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일부러 그것을 의도해 그렇게 뽑았고.
하지만 백작의 보좌관을 평민으로 뽑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귀족들 사회에서 원칙이었다. 아무리 보좌관과 돈으로만 얽힌 비즈니스 관계라 한들 주인이 없는 백작 가문을 이상하게 여길 것은 분명했다.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혼자 해봐야지…….”
서류를 처리하는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종이에 있는 글자가 두 글자로 겹쳐서 보이는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종을 흔들어 하인에게 커피를 진하게 타오라고도 명령했고, 팔다리를 꼬집기도 했지만 졸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간 누적된 수면 부족이 후폭풍처럼 몰려온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던 중 문득 잠에서 깨어나 눈을 멍하게 끔뻑거렸다.
“헉! 며, 몇 시야!”
탁상 위에 가득히 쌓인 서류뭉치들이 보였다. 다급하게 탁상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모양이 평소랑 달랐지만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채 시각을 확인했다.
10시 30분.
가슴이 선득했다. 설마 늦잠을 잔 건 아니겠지?
황급히 창문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깊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아직 밤이었다. 그럼 30분 정도 잠이 들었던 건가? 그러면 마저 이 서류들을 처리하고 침실로 돌아가서 잠을….
“그런데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니 이곳은 회사도 내 방도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제일 위에 있는 서류를 들었다.
“레지스강의 어류 포획량과 어류 운반에 드는 인력과 비용?”
책상에 쌓인 서류 더미도 내륙에 있는 백작저에선 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내용이었다. 이건…….
-똑똑
“드, 들어와.”
이게 무슨 일인지 사용인들이나 리온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집무실에 들어온 사람을 알아본 나의 얼굴은 빳빳이 굳어갔다.
“어머니?”
“무슨 일 있었니, 로위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구나.”
“…….”
“휴…… 그건 그렇고, 로위나. 이번에 열리는 티파티에 갈 생각은 정말 없는 거니? 가문 일도 중요하지만, 같은 또래의 영애와 영식들이랑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연을 맺어가는 것도 귀족 사회에선 중요한 일이란다. 심지어 루비엣 영애는 이번에 황녀님의 티파티에 쓰일 꽃장식을 만든다고 하잖니.”
어머니는 과거의 자신처럼 하나밖에 없는 딸이 사교계의 중심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루비엣 영애가 있다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내 입이 먼저 저절로 움직였다.
“이제 다시 일해야 해요.”
“로위나, 어미가 이 일은 네 아버지에게 말해볼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말렴.”
걱정하듯 말하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엔 나는 내 어머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꺼낸 말에 함의된 뜻이 무엇인지.
“본디 숙녀는 집무실보단 정원이나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게 더 어울리고 빛이 나는 법이란다. 네 손을 보렴. 검은 잉크로 얼룩덜룩하잖니. 숙녀가 가질 법한 손은 아니지 않니?”
“…….”
그래서 이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어머니에게 실망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선 울기가 차올랐다.
‘그래서 그렇게 아들을 낳으신 건가요?’
라는 모진 말이 입술 끝까지 맴돌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알겠어요, 이것만 끝내면 시간을 비울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이번에도 내 입은 저절로 움직였다.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몸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하렴.”
어머니는 내 불명확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 끝을 내리고 곧 집무실을 나갔다.
‘이게 대체 뭐야…….’
뭔가 일이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원래 여기 있던 사람인가?
“이제 몸이 움직이네….”
말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내친김에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를 휘적거렸다. 벽지는 하얀 격자무늬에 새빨간 꽃이 그려져 있었다. 숙녀의 꽃이라고 불리는 백일홍. 꽃말은 순결이었다.
이건 필히 어머니의 취향이 가득 담긴 것이 분명했다.
책장에 시선을 돌려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았다.
아주 먼 옛날, 내가 다 읽은 교양서들이었다. 독서를 즐기던 편은 아니었다. 다만 이 책들을 다 읽기 전까지 아버지는 잠을 못 자게 했었다.
나는 그제야 이곳이 이제 어딘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여긴 카시어스 공작 성이었다.
그리고 이 방은 내가 후계자였을 적에 일을 처리하던 내 방이자 집무실.
카시어스 공작 성에는 후계자를 위한 집무실이 따로 있었지만 나에게 그 집무실이 할당되지 않았기에 나는 내 방을 집무실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였었을 적에….”
뭔가 거슬리는 어감이었다. 마치 지금은 내가 후계자가 아니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속 한구석에 해방감이 들면서도 이 미묘한 생각의 원인을 찾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그래서 무작정 집무실, 아니, 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익숙한 파란 머리의 소년이 서 있었다.
양손에 돌멩이를 든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