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앞으로 동업을 할 알렉스에게 이런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가 도망갈세라 뒷덜미를 잡고 놓지 않는 엘렌에게 말했다.
“정말 마탑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 맞아?”
나의 합리적인 의심에 엘렌이 알렉스의 뒤에서 속삭였다.
“한가하지?”
여전히 목덜미를 놓지 않은 채였다. 아무리 봐도 불한당 같은 그의 작태에 나는 쯧쯧, 혀를 찼다.
“그런 거 물어보려면 그 손은 놓는 게 낫지 않겠어? 꼭 한가하지 않는다면 죽일 것 같잖아.”
“히익!”
내 말에 더 겁을 집어먹은 알렉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하, 한가합니다! 아주 한가해요!”
“…….”
얼떨결에 엘렌의 협박을 기정사실처럼 만들어 버린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겁먹을 필요 없어요. 바쁘다면 보내줄게요.”
“저세상으로?”
엘렌이 덧댄 말에 알렉스는 히익! 몸을 발작하며 바르르 떨었다.
“엘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제야 자신을 붙잡은 사람의 정체를 깨달은 알렉스가 용기를 내 뒤를 돌아보았다.
“에, 엘렌? 설마 마탑주님?”
엘렌을 보고 긴장이 풀렸는지 그는 다리에서 힘을 뺐다. 맨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십 년은 감수한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상황을 파악한 나는 기함하며 엘렌에게 항의했다.
“설마 아무 설명도 없이 여기에 데려온 거야?”
어쩐지 그를 데리고 온 시간이 너무 빠르다 싶었다.
“오필이 만나고 싶다 하지 않았어?”
이렇게 천진무구한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불식 간에 납치당한 불쌍한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창백히 질린 얼굴엔 땀으로 갈색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얇은 테의 동그란 안경을 삐뚤게 쓴 알렉스를 보며 아일라에게 말했다.
“마실 것 좀 가져와 줄래요?”
“네? 네!”
아일라가 또랑또랑하게 대답하며 다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힐긋 본 엘렌이 말했다.
“괜찮겠어?”
“뭐가?”
“뭐든.”
엘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난 이제 할 일이 있어서 가 볼게, 다음에 보자. 오필.”
“뭐…?! 잠깐…….”
그를 붙잡으려던 내 손은 허공만을 붙잡았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일은 으레 있는 일이라 익숙했지만, 그가 남긴 말은 의뭉스럽기 그지없었다.
“뭐가 괜찮냐는 거지….”
나는 바닥에서 책상에 기대 골골거리는 젊은 마법사를 펜으로 툭툭 건드렸다.
“으응.”
그러자 알렉스는 일어나지 않고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다. 몰골이 불쌍해서 이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이제 곧 다음 내담자가 방문할 시간이었다.
“알렉스? 일어나 보세요. 잠시만… 킁킁.”
그를 흔들어 깨우다가 다실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냄새에 몸의 온기가 싹 달아났다. 익숙한 냄새였다. 그녀가 내 요구에 물을 내어 오리라고 생각했던 내 예측은 보란 듯이 빗나간 것이다.
“으으… 커피….”
논문에 시달린 대학원생처럼 초췌한 낯으로 알렉스가 비실비실 눈을 떴다. 커피 냄새를 맡은 것이다.
“커피 나왔습니다~!”
그 순간, 아일라가 과일처럼 상큼한 목소리로 다실에서 나왔다.
‘아, 안 되는데.’
말려야 하는데 알렉스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급하게 아일라가 타온 커피를 마셨다.
“아, 뜨거우실 텐데.”
“쿨럭!”
커피를 마신 알렉스가 돌연 세게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일라는 그것이 사레가 걸려 그런 것이라 생각해 알렉스의 등을 두들겼다.
‘…….’
아까보다 더 창백한 낯이었다. 그가 왜 커피를 마시자마자 기침을 뱉은 건지 경험으로 알고 있는 나는 난감한 미소만 흘렸다.
불쌍한 알렉스.
* * *
“……이러저러하게 되어서 알렉스한테 마법사로서 아일라의 보증인을 맡기고 싶어요. 물론 맨입으로 해달라는 건 아니고, 금전적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하세요.”
금전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아일라는 죄책감을 느끼는지 표정이 침울해졌다. 기실 그녀는 타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외려 타인이 자신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익숙하면 익숙했지.
“아일라, 나 돈 많아요.”
하지만 그녀가 부담감을 느낄수록 내 기분도 그렇게 편하진 않았다.
“네? 아….”
“아마 아일라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을 테니까 이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
이 이상 일언반구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가 뺨을 붉히며 작은 입술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왜인지 토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기분을 헤아릴 여유는 없어 나는 다시 알렉스에게 시선을 맞췄다.
“알렉스. 아일라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시간이 없다면 서류에만 이름을 남기는 형식적인 관계도 괜찮아요. 혹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미안하지만 많이 주지는 못하니까 빠른 시일 내에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한답니다.”
아까 막 사무실에 왔을 때보다는 정신을 차린 듯 흐리멍덩했던 그의 회색 눈이 맑아져 있었다.
“혹시 금전적인 것 말고 다른 것도 가능합니까?”
잠시간 고민하던 알렉스가 이윽고 입술을 떼었다. 착각인 건지 그의 눈이 과하게 반짝거리는 듯했다.
그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마탑에 연구비가 부족하다고 해서 금전을 요구할 줄 알았던 그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다른 거요?”
“예, 그게 아일라 양을 가르치기 위해선 제 연구시간을 할애해야 해서…. 그 시간을 조금 빼고 싶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의 연구시간을 빼달라는 말이라면 그건 내 관할 범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듣기론 알렉스가 마탑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나요?”
그 사실의 출처가 엘렌이라는 게 썩 신용이 가지는 않았지만.
“예에?! 그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가요.”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는 내 얼굴을 힐긋거리곤 점차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 인상이 험악해진 걸 발견한 탓이었다. 기실 그 때문에 인상을 쓴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렇게 그를 데려와 놓고 사라진 한 사람 때문이었지.
그런 주인을 데리고 있는 마탑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지, 그게 참 신기하고 기묘한 사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알렉스의 연구시간을 빼는 건 미안하지만 제 권한 밖이랍니다.”
“예? 하지만….”
알렉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직시했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내렸지만.
“성함이 ‘오필리아 마르그리트’가 아닌가요?”
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급해 이름을 소개하지 않았던 점을 상기했다. 근데 어찌 된 일인지 알렉스는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않은가.
“네,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의 입가가 살짝 풀리며 작은 곡선을 만들었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걷히고 미소가 떠오르자 비로소 제 나이가 드러났다.
대충 어림짐작하면 아일라와 또래로 보였다.
‘이거 청소년 노동 착취 아니야?’
이렇게 어린애를 좀비가 될 정도로 굴리고 있다니. 여느 블랙 기업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마탑에 관해 심각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작 장본인인 알렉스는 표정이 밝았다. 마치 놀이공원에 놀러 가는 듯한 소년처럼 설레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충분히 가능해요.”
“뭐가요? 설마 내가 당신의 연구시간을 뺄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죠?”
“계약서는 어디 있어요?”
“자, 잠깐만.”
그의 빨라진 행동을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어 당황스러웠다.
“아, 알렉스?”
“여기 있군요!”
누가 마법사가 아니랄까 봐. 서랍에 넣어둔 계약서를 금방 찾아내었다. 볏짚처럼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던 알렉스가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기간은 1년… 조금 더 늘릴 수는 없나요?”
“하지만 이 이상 늘리면 알렉스의 경력에도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요?”
마법사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법사에게 연구 성과나 실적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어린 마법사였다. 한창 선배마법사 아래에서 수련해야 하는 마법사.
…아마도?
“알렉스, 올해 몇 살이 되죠?”
“왜, 왜요?”
알렉스는 들고 있던 계약서가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품에 꼭 쥐고 있었다. 원하던 장난감을 빼앗길세라 전전긍긍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계약에 신원을 파악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 신원도 모르는 사람이 계약을 이행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알렉스 사무엘입니다.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열여덟 살이죠!”
내가 회의적인 말투로 이유를 설명하자 그가 곧바로 우렁차게 자신의 신상을 읊었다. 예상대로 아일라와 동갑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엔 동의하지 못할 성싶었다.
‘아까 골골거리던 모습은 별로 건강해 보이진 않던데.’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그런데, 그의 성이 조금 독특했다.
“사무엘? 흔한 성은 아니네요.”
“선조가 신앙심이 깊으신 분이셨거든요.”
“그럼 사무엘로 부를까요?”
그의 성을 알지 못해 계속 이름을 불렀었지만, 애초에 처음 만난 사람을 칭할 때는 성으로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고 예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할게요.”
“전 괜찮아요, 앞으로도 알렉스로 불러주세요.”
숫기 없어 보이던 첫인상과 다르게 붙임성 있는 성격인 듯했다. 그렇다면 내 쪽에선 일 처리가 편해진다.
“좋아요, 그럼 알렉스. 일단 지금은 1년으로 계약하고, 나중에 가서 괜찮다면 기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해요. 이 순간에 기간을 늘린다면 나중에 가서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말을 이을 듯 말꼬리를 늘인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알렉스의 연구시간을 빼는 건 확신하지 못해요. 그 점 유념해 주었으면 하네요. …아?”
책상 위에 어느새 ‘알렉스 사무엘.’이라는 성명이 적힌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괜찮아요. 저도 그럼 오필리아라고 불러도 될까요?”
“…알렉스가 편한 대로 하세요.”
어쩐지 일이 이상하리만치 술술 풀렸다. 알렉스의 얼굴을 보니 그의 회색 눈동자가 어느덧 아일라에게 향해 있었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일라가 ‘네.’라고 대답하며 손을 맞잡았다. 그의 볼이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오호, 이래서 그렇게 순순히 승낙했나.’
하나의 풋풋한 순정을 보는 듯해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참 좋을 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