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에스텔라 레니에, 그리고 조르지오 레니에.
그들은 레니에 후작이 재혼하면서 현재의 후작 부인이 데려온 의붓남매들이었다.
아름다운 후작 부인의 친자식답게 그들 또한 어릴 적부터 줄곧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했다.
발그레한 뺨에 뽀얀 복숭아 같던 에스텔라는 따뜻한 봄의 벚꽃을 떠올리게 하는 분홍색 머리칼을 가진 귀엽고 앙증맞은 소녀였다.
반면 가을 단풍잎을 떠올리게 하는 조르지오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와 아름다운 홍염의 눈을 가진 미소년이었다.
그 남매는 아일라와 같은 또래였다.
그래서 비단 처음부터 아일라와 그들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여덟 살이 되었을 무렵에 에스텔라와 조르지오는 어머니를 따라 후작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 만난 아일라와 친하게 지냈다.
그들이 그녀와 친하게 지낸 이유는 간단했다.
아일라가 예뻤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다운 단순한 이유였고, 어른스러운 사고를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겐 당연한 이유였다.
태어날 때부터 온순하고 순수한 성정이었던 아일라는 남매들을 쉽게 믿었고, 곧잘 따랐다.
하지만 무릇 어린아이들은 장난감이나 인형에 대해 싫증을 내거나 쉽게 질리는 법이었다. 그 이후에 그것들은 금방 버려지거나, 되팔린다.
아일라는 그들에게 말 잘 듣는 인형에 불과했고, 그만큼 남매의 흥미는 금방 시들었다. 불과 1년 만의 일이었다.
인형이 아닌 아일라는 버려질 수도, 누구에게 팔려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남매들은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일라를 보며 갖가지 장난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에겐 장난이었지만, 누구에겐 지옥일 수도 있는 일들을.
게다가 후작저에서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후작이 그 아이들을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사소한 것이었다.
조르지오의 발에 걸려 넘어진 아일라가 대리석 바닥에 무릎이 갈려 울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조지, 얘 울어.”
에스텔라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우는 아일라를 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에서도 아일라를 일으켜 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울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조르지오, 괜찮아?”
눈물 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상대방을 걱정하는 아일라를 보는 조르지오의 미소는 조금 이상한 모양새를 띄었다.
그들이 자신을 버렸는데도 아일라는 그들을 보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조르지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에스텔라도 마찬가지였다.
“응,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조르지오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를 본 아일라는 ‘으,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자신의 다락방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조르지오가 아일라의 다리를 다시 한 번 걸지 않았더라면.
“악!”
아일라에겐 지옥의 불씨가 점화된 순간이었다. 그녀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고의로 다리를 걸었기 때문에 꽤 충격이 컸는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조르지오는 아일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아일라.”
문득 언제까지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그는 궁금해졌다. 남매는 후작저에 들어오기 전부터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소악마처럼 천진하면서도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음….”
조르지오의 악행에도 에스텔라는 말리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그 일들을 관전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광대처럼 웃는 일밖에 못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에스텔라의 눈에도 흥미가 감돌았다.
“눈물도 흘릴 줄 알잖아.”
그렇게 아일라는 후작 부인뿐만 아니라, 쌍둥이 남매들의 괴롭힘까지 감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일라에게 그런 일들을 벌인 이유는 여러 개였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재밌으니까.’
광막한 귀족의 저택엔 아홉 살짜리 아이들이 즐거울 만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무료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일라는 인형이 아닌 사람이었다.
나날이 심해지는 그들의 장난과 악행에 아일라는 점차 시들어갔다.
여기까지가 소설에서 그녀의 유년기를 설명한 일부분이었다. 모든 일을 담지는 않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모든 속사정을 알고 있는 건 당사자뿐이었다.
바로 아일라 레니에.
“…아일라.”
눈에 띄게 창백한 낯을 하고 있는 아일라가 걱정되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를 바라보는 엘렌의 얼굴에도 웃음기는 깨끗이 사라진 채였다.
이 순간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
통찰로 그녀의 과거를 읽은 그.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그녀에게 그 이상 건넬 말은 없었다. 지금 나는 아일라의 과거를 모르는 주변인에 불과했으니까. 모르는 척 물으니 꾹 입을 앙다물던 아일라가 작은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나 대답과 달리 그녀는 바닥만 바라보며 좀처럼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가족들이 참석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사실을 아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의 차이는 천지 차이였다. 그것을 아는 나는 계획을 전면 수정할 것을 염두에 두고 얘기했다.
“아일라가 힘들다면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돼요.”
“아뇨, 사장님.”
그녀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찬연한 눈동자가 결심을 굳힌 듯 결연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할 거예요.”
그녀의 굳센 태도에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녀의 데뷔식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러면 아까 리카르도와 나눴던 대화와 리카르도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으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엘렌, 마탑에 정말 알렉스라는 사람이 있어?”
카롤라 부티크에서 급조한 그의 가명을 리카르도에게 갖다 대었는데, 정말 실존하는 사람이라면 일이 복잡해진다.
만일 리카르도가 그사이에 마탑을 방문해서 알렉스라는 마법사를 만나고 오면 어떡할 것인가.
그 일을 해결할 기발한 생각이 스쳤다.
“알렉스? 제2 연구부서에 있는 마법사인데, 걔는 왜…. 아.”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엘렌이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폭소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창살로 들어온 겨울 햇살이 웃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 고개까지 젖히며 시원스레 웃는 얼굴은 누가 서브남주가 아니랄까 유난히 더 빛을 발했지만 나는 유독 그것이 얄밉게 느껴졌다.
“이제 다 비웃었어? 그럼 대답 좀 해 주시죠? 마탑주님.”
내 말에 아일라는 엘렌이 마탑주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저런 사람이 마탑주?’라고 말하는 듯했다. 백번 이해가 갔다.
그가 마탑주로 승계받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나는 이미 원작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말도 안 된다며 새삼스레 기함했으니까.
마탑주가 되는 자격이 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엘렌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었다.
‘마탑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 또한 그 자격의 기준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아일라는 생소한 걸 보는 눈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하… 너무 웃었더니 졸려.”
그가 하는 말에 아일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쩌면 얼굴도 몰랐던 마탑주에 대한 동경심이 와장창, 깨지고 있지 않을까.
실망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무는 그녀를 보는 엘렌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걸 잊을 뻔했네.
“관람료. 또 내 생각 읽었잖아?”
“나 이제 돈 없는데.”
그가 생긋 웃으며 텅 빈 주머니를 까뒤집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제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뒤로 밀어두고 본론을 꺼내야 했다. 다음 내담자가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 알렉스라는 마법사, 시간 있어?”
“당연하지, 그 애가 마탑에서 제일 한가해.”
“…그래? 다행이네.”
‘제일 한가한 사람은 네가 아닐까, 엘렌.’이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속으로 삼켰다.
불쌍한 마법사들.
저런 무책임한 애를 주인으로 데리고 있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지는 볼 것도 없었다.
“그러면 언제 시간 될지 물어봐 줄 수 있어?”
“아, 걔한테 보증인을 맡기려고?”
“사장님,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
아일라가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으나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저기서 또 커피 특기생으로 후원을 받겠다는 말이 나오면 험한 말이 나올 성싶었다.
“이왕 거짓말을 한 거, 하려면 완벽하게 뒤처리를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대답하고 엘렌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어느새 엘렌은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허전해진 사무실 안에서 나와 아일라가 고개만 휙휙 돌리고 있을 때였다.
“뭐야. 얘 어디 갔어.”
“여기?”
엘렌의 목소리와 함께 어떤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악! 사, 살려주세요!”
“……?!”
엘렌에게 목덜미를 붙잡혀 딸려온 사람은 로브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
‘갈색 머리에 짙은 회색 눈.’
리카르도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이 사람이 알렉스?”
형식상 물었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엘렌이 뜬금없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올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췌하고 이상한 액체가 묻어 있는 옷을 입은 남자는 갑자기 당한 일에 두려운 듯 불안한 시선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러던 중 내 시선과 마주치고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곁눈질로 내 쪽을 흘긋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 인상이 그렇게 험악한가…….’
조금 머쓱한 시선으로 알렉스의 차림새를 찬찬히 살폈다.
삐뚤게 쓴 안경과 낡게 해진 옷.
마치 연구실에서 처박혀 연구하던 사람을 갓 빼 온 것 같지 않은가.
아무래도 애먼 사람을 데리고 온 느낌이 낙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