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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35화 (36/124)

35화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노력이 가상했다. 아일라와 엘렌. 두 사람을 보고 떠오른 용건에 나는 아일라에게 말했다.

“코코아 좀 타올래요?”

엘렌은 아일라가 다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퍽 불안했는지 그녀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나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코코아는 괜찮아. 리카르도도 잘 마셔.”

“별로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네. 공작은 커피도 잘 마시잖아.”

“그건…….”

리카르도가 커피를 좋아한다는 건 오해였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엘렌이 내 팔을 끌어당겨 소파로 앉혔다. 그러자 소파에 둘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가 신록을 담은 듯한 연둣빛 눈동자를 휘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내 앞에서 공작에 대한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왜?”

“그냥. 그리고 가능하면 생각도 하지 말아줘.”

이유가 단지 ‘그냥’이라고? 이어 덧붙인 말에 의문은 더 짙어졌다. 나는 엘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그는 단순한 변덕을 많이 부렸지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턱을 양손으로 받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가 별 의미 없이 지은 미소라는 걸 알지만, 타인이 본다면 유혹한다고 오해할 행동이었다.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 그럼 마음껏 봐, 오필.”

내뱉는 말도 이따위니 누가 오해를 안 하겠어. 나는 그의 얼굴을 두 손가락으로 밀며 냉담하게 일갈했다.

“착각도 유분수지. 나 유부녀야.”

“맞아, 나랑 결혼했잖아.”

“지금 나랑 말장난해?”

그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추궁하는 건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나는 에두르지 않고 질문했다.

“혹시 리카르도가 싫어?”

“응.”

“왜? 참고로 ‘그냥’이라는 말은 제외하고.”

“원작에서도 나랑 공작은 연적이었잖아. 그런 거지.”

엘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원작 때문이라고?’

그의 입에 나온 ‘원작’이라는 말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빙의자인 내 속을 통찰로 읽어 원작 붕괴의 시발점이 된 그가 원작을 운운한다는 것이, 이보다 이상하게 들리는 건 없을 것이었다.

“연적? 너 아일라 좋아해?”

그래도 혹시 모를 경우를 배제할 수 없었다.

다실에서 들리는 문소리에 나는 소리를 죽이고 속삭였다. 아일라가 쟁반에 받친 코코아를 든 채 나오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엘렌의 미소가 살짝 이상하게 바뀌었다. 미묘한 온도였다. 모호한 얼굴에서 사선으로 올라간 입꼬리만큼은 비웃고 있는 거라 확신했다.

“이렇게 내 표정은 잘 간파하면서.”

엘렌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 눈앞에 있는 건 몰라?”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의뭉스러운 뉘앙스의 질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게 뭔데?”

“답을 그냥 가르쳐줄 수는 없지. 어쨌든-.”

아일라가 테이블에 올린 코코아를 킁킁거리며 냄새 맡더니 그는 한 모금 마셨다.

“어라? 진짜네.”

“네?”

아일라가 그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아니, 코코아 맛있다고.”

“가, 감사합니다.”

어색한 그들의 대화 사이에 나는 손뼉을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잠깐, 모두 내 얘기 좀 들어봐.”

이제는 이야기의 본론을 꺼낼 때였다.

“엘렌, 이번에 나랑 아일라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걸 알고 있지?”

“응. 그런데?”

“귀족을 후원하기 위해서는 후원 계약서가 필요해. 그리고 피후원자를 보증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 그리고 그게 바로 너야. 엘렌.”

“…….”

엘렌이 흘긋 아일라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문하생이라도 받으라는 말이야?”

“맨입으로 하라는 거 아니야. 사례는 얼마든지…….”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인데?’라고 입을 열려던 내 입은 그의 말에 가로막혔다.

“난 문하생을 받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

“에테르나랑 차 마실 시간은 있고?”

내 말에 엘렌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왠지 불길했다. 연두색 눈동자가 반짝 빛나는 모양새가 더욱 그랬다.

“혹시 질투해?”

기대 어린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저 짓궂은 장난이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시작되었다니.

“대체 누가 누구를. 잊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우리 둘만 있는 거 아니거든?”

내가 곁눈질로 아일라를 가리켰다. 엘렌은 어느새 소파로 돌아가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괜찮아, 레니에 영애도 이미 알고 있거든.”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번쩍 홉떴다.

“뭐?”

놀란 얼굴로 아일라를 바라보았다. 올망졸망한 금색 눈동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했다.

“사실 내가 마르그리트 부인의 정부라는 거?”

…이 미친놈이?

나와 마찬가지로 아일라는 모골이 송연한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움찔 몸을 떨며 시선을 떨구었다. 핼쑥한 얼굴은 마치 자신이 죄악감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급하게 말을 꺼냈다.

“엘렌이 장난친 거예요. 알죠? 내가 얼마나 청렴결백하고 모범적인 사람인데.”

“그걸로는 전혀 해명이 안 될 것 같은데?”

“넌 좀 닥쳐.”

“괜찮아요, 사장님…….”

“아니! 이 상황이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아일라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디선가 여자의 웃음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아, 아일라?”

깜짝 놀라 빤히 바라보자 고개를 숙이던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웃음을 빵 터트렸다.

‘설마 엘렌이랑 있던 사이에 미…친 건가?’

한참을 웃던 그녀가 열이 올라 붉어진 뺨을 식히기 위해 손등을 갖다 대었다.

“하아… 사장님, 너무 귀여우세요.”

그녀가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농담이라는 거.”

엘렌에 이어진 때아닌 아일라의 장난에 내 간담은 남아나질 않았다.

* * *

“예전부터 궁금했어. 너랑 에테르나는 무슨 사이야?”

나는 진지하게 엘렌에게 물었다.

“혹시 오필…….”

“아일라.”

또 헛소리를 늘여놓으려는 그에게 나는 빙긋 웃으며 아일라를 찾았다. 내 부름에 한달음에 다가온 그녀가 명령을 기다렸다.

“엘렌이 목마르다고 하네요.”

“…….”

“무슨 음료가 좋을까요? 아일라가 골라 주세요.”

아일라가 자신 있는 얼굴로 ‘커피.’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엘렌이 얼른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온 물이 그 앞에 놓인 빈 컵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아쉬운 얼굴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엘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비즈니스적인 사이야.”

“잠깐. 의미는 확실히 해. 이번 비즈니스는 그 비즈니스야, 이 비즈니스야?”

“걱정 마. 아주 건전한 비즈니스니까.”

건전하다는 말이 이렇게 불건전하게 들리는 건 그의 탓일까, 내 탓일까. 전적으로 그의 탓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에테르나와 그가 어떠한 비즈니스 관계라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그럼 엘렌. 문하생 말고 서류상에 남길 형식적인 관계로 남는 건 가능해?”

“그거라면 괜찮지만, 그걸 영애가 원할까?”

“왜?”

“알잖아, 대외에서 내 평판이 어떤지.”

“……그것도 그렇네.”

‘이를 어쩐담.’

원작에선 엘렌이 아일라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번 일도 그처럼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렌의 말대로 그의 평판은 바닥을 기다 못해 내핵을 뚫고 내려갔다. 뛰어난 마법 실력만큼은 인정해 사람들은 그를 경외심과 두려움 섞인 시선을 바라보곤 했지만, 저 개차반 같은 성격이 모든 걸 압살했다.

첫 데뷔식을 치르는 아일라에게 엘렌을 엮는다는 건 여러모로 득보다 실이 많은 상황.

“사장님.”

깊이 다른 해결법을 물색하고 있던 내 옆에 아일라가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고생하실 필요 없으세요. 뭣하면 커피 특기생으로 후원 자격을 맞추면 되죠!”

그녀의 밝고 긍정적인 태도는 필히 교훈적이고 배울 만한 것이었으나, 그녀가 말한 내용은 문제가 많았다.

웬만한 일에 무감각한 엘렌조차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을 정도였으니.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레니에 영애, 진심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영애는 커피를 타는 재능이….”

“아주 뛰어나죠!”

내가 엘렌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가 ‘정녕 제정신이냐.’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일라가 상처를 받는 건 내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고 속삭이며 아일라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마주 웃는 나는 곤란하기만 했다. 그녀가 커피 특기생으로 후원을 받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일례로 디저트를 만드는 실력이 뛰어난 파티시에가 피후원자 자격으로 연회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파티시에는 연회에 나오는 모든 디저트를 담당했다.

보통 후원자-피후원자 관계로 연회를 참석하는 경우엔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피후원자가 연회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사정은 바로 마법이었다.

사람이 많은 연회에서는 안전상 마법을 쓰는 것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일라가 마법이 아닌, 커피 메이커로서 연회를 참석한다면….

‘그건 재앙이야.’

차라리 후원 계획은 무산시키고, 남자 파트너를 구하는 게 낫지.

엘렌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일라를 보는 시선에 흥미가 어리기 시작했다. 제삼자인 그에겐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삼자가 아닌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던 중 방금 리카르도와 나눴던 대화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엘렌, 혹시 리카르도는 연회에 참석하는지는 알아?”

“참석해.”

“역시 그렇… 아니, 참석한다고?”

나와 아일라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혼란스러웠다. 이건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아일라와 참석하지 않는 리카르도가 연회에 참석한다면 대체 누구와 참석을 한다는 말인가.

이 이야기는 원작에도 나온 적 없고, 소문으로도 들은 적 없는 금시초문이었다.

“누구랑?”

“어느 분이랑요?”

거의 동시에 나와 아일라가 엘렌에게 질문했다.

나와 그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쓱한 미소를 마주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엘렌의 말에 우리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에스텔라 레니에.”

특히나 아일라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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