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리카르도가 떠나고, 다음 내담자를 위해 미리 파일을 훑어보고 있는데 아일라가 나를 흘긋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진한 의문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아까 일에 대해 묻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았으나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모로 돌리며 시선을 흘려보냈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그녀의 시선은 결국 모른 척하던 나를 항복시켰다.
“엘렌이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선조가 남긴 격언은 틀린 게 없었다. 엘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긴 했지만, 그것이 리카르도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사실을 말하다간 결국 내가 로위나 카시어스라는 것을 밝히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엘렌과 친구라는 걸 밝히는 건 사업에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거든요.”
그래서 아주 일부분의 진실만 꺼내었다.
리카르도가 나와 나눈 대화를 쉽게 외부에 흘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 세간에 망나니와 다를 바 없는 그와 친구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사업에 손해면 손해였지, 이득은 쥐뿔만큼도 없었다.
“아…….”
아일라는 침음을 흘렸다. 내 말에 수긍한 표정이었다.
“마리어스…. 신문에서 읽기만 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아일라의 눈엔 약간의 경외심이 묻어 있었다. 마리어스 기사단. 동네 꼬마들을 붙잡으면 열에 아홉은 마리어스 기사가 되고 싶다고 장래를 꼽을 정도로 영예롭고 명망이 높은 자리였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되었다.
“아일라는 이해가 되나요?”
“어떤 점이요?”
“공작님이 저한테 마리어스 기사들을 호위로 붙여준다는 점이요.”
“음…….”
내 질문에 아일라는 금빛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녀가 대답하길 망설이자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곤란하기보다는, 저한테는 정말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거든요.”
“당연한 일이요?”
의외의 대답에 나는 놀란 눈으로 파일에서 시선을 떼고 아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냐하면 공작님은 사장님을…… 어, 어음.”
그녀가 저번처럼 말을 흐리며 눈을 굴렸다. 똑같은 상황에 그녀가 하려던 말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거 저어엉말! 아니에요. 오해예요. 무엇보다 리카르도는 나 같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사장님 같은 여자요?”
원작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지만, 아일라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콕 집어 질문했다.
리카르도는 계약 기간 동안 얌전히 공작 성을 관리하고, 아랫사람들을 돌볼 부인을 원했다. 물론 카시어스 공작 가문에서 후계 일을 배워온 나도 할 수 있기는 했지만, 그런 일은 보좌관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보다는 북부를 안정시킬 현숙한 부인을 원하는 것에 가까웠다.
북부의 주민들이 원하는 여자.
마치 나의 어머니가 그렇게 강조하던 스테레오 타입의 귀족 부인.
아일라는 그 계약을 훌륭하게 지켰고, 그사이에 그녀에 대한 감정을 키운 리카르도는 계약서를 그녀 앞에서 북북 찢어버렸다.
그대로 백년가약을 맺고 해피엔딩.
그 모든 이야기를 알 리가 없는 아일라는 내 말이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어쨌든 리카르도… 아니, 공작님이 원하는 여자는 저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시구나…….”
대답과 달리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는 모양새를 보니 문득 두려워졌다. 저번에도 이 이야기를 두루뭉술하게 넘겼다가 리카르도가 있던 사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나.
아일라가 리카르도 앞에서 꺼내려던 말은 분명했다.
-공작님은 사장님을 좋아하지 않나요?
평소에는 똑 부러지고 눈치 빠른 그녀가 이따금 눈치가 없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애석하게도 이런 식이었다.
그녀의 말을 내가 막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리카르도와 아일라가 단둘이 있었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
어떻게든 사전에 방지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참에 이 일을 확실히 매듭을 짓기로 했다.
“아일라, 잠시만 여기 앉아봐요.”
아일라는 내 말에 순순히 내 앞에 앉았다. 방금 리카르도 앉던 상담석이었다. 무심결에 그녀는 그가 마시다가 남긴 코코아 잔에 손을 대려다가 황당한 내 표정에 손을 내렸다.
“스, 습관이라…. 죄송해요.”
“아일라… 그 상황에선 습관이란 말이 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답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후작 가문에서 식수조차 멀쩡한 물을 마시지 못한 아일라의 사정을 알고 있어 망정이지, 생판 남이 저런 말을 한다면 어떤 시선으로 그녀를 볼지 불 보듯 훤했다.
자연스럽게 원작에서 그녀가 어떻게 무사히 데뷔식을 치른 것인지 신기함이 샘솟았다. 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그녀를 이대로 데뷔를 시켜도 되는 건지.
리카르도와 나와의 관계를 명확히 알려주기 위해 자리에 앉혔건만 다른 걱정이 비집고 들어왔다.
애써 그 걱정을 무시한 채 나는 아일라 쪽으로 손등을 들며 입을 열었다.
“제 손을 보세요. 뭐가 보이나요?”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건 어벙한 신입 사원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지 않은가.
“반지요?”
그녀는 그 신입과 다르게 정상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건 제가 신전에서 혼인서약을 하면서 남편에게 받은 반지죠.”
“네에……. 반지가 아름다워요. 사파이어인가요?”
대화의 요지는 그게 아니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반지에 집중되었다. 볼은 핑크빛으로 물들었고, 그녀의 금색 눈은 사파이어보다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이 반지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마음 같아선 내 손에 있는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서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아냐, 아니지.’
대체 결혼반지를 줄 생각을 왜 하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아일라에 대한 덕심이 불쑥 고개를 내미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그녀를 따라 반지를 보자 저번에 나누었던 리카르도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일라, 이 반지 나한테 어울려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음에도 친절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긋하게 말했다.
“사장님이라면 어느 보석의 장신구든 어울릴 것 같아요.”
“어머, 그래요?”
아일라의 칭찬에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리카르도는 이 반지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아침부터 갑자기 꺼낸 말이 인사 대신 저런 말인 것이, 그 당시에 꽤 당황스러웠었지.
“반지가 의미하는 바를 아일라도 알고, 공작님도 알고 계시죠. 그리고 공작님은 임자 있는 사람을 마음에 품을 정도로 상도를 모르시거나 여유가 없는 분이 아니세요.”
진지하게 말하자 아일라도 비로소 내 말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똑같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앞으로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드디어 내가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공작님 앞에서는 더 조심하고 특히 다른 분께도 그런 말씀은 되도록 하지 마세요. 공작님이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불쾌하시겠어요.”
“……그런가요?”
다시 모호해진 그녀의 대답에 명치 부근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요! 애먼 사람한테 ‘당신, 유부녀를 좋아하죠?’라고 말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어요? 그건 파렴치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일에요. 아일라.”
“그럼, 유부녀를 좋아한다니 가당키나 해?”
대화에 끼어든, 익숙한 제삼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은색 로브를 입은 엘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소파에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로브에는 기묘한 문양으로 수가 놓여 있었다.
“저 애도 맞다고 하잖아요.”
엘렌의 말뜻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 조금 다른 것 같기는 했지만 당장은 아일라를 설득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 타이밍에서 엘렌의 한 말은 적절했기에 그의 등장이 반갑게 느껴졌다.
“와, 이제 나 감동해서 눈물 흘리면 되는 거야?”
“깜빡이 없었지? 관람료 내놔.”
빈 손바닥을 내밀자 엘렌이 뒤늦게 흑흑,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나 돈 없는 거 알잖아. 오필.”
“돈 없다고 범칙금 안 내던가? 아니면 감옥 가.”
그가 어디서 돈을 꺼냈는지, 돈주머니를 나에게 내밀었다. 돈주머니를 들고 액수를 세어보니 정확히 저번에 말한 관람료가 들어 있었다. 반쯤 농담으로 한 말에 진짜로 돈을 준 그의 행동에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돈 없다면서.
“마탑에 쓸 돈이 없는 거지. 오필도 우리 가문 알잖아?”
알렉산드로 대공가. 대대손손 황실의 재무를 맡아 이 제국 내에선 황실 다음으로 돈이 많은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렉산드로 대공인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후계자로 길렀더니 허구한 날 사고만 치면서 흉흉한 소문만 만드는 아들을 어느 아버지가 좋아할까.
그 때문에 엘렌은 대공가와 왕래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 그 돈은 어디서 난 거지…?
“엘렌, 설마 훔쳤어?”
“응. 오필처럼?”
그가 금고의 자물쇠를 돌리는 시늉을 하며 씩 미소를 지었다. 아일라가 우리를 보는 눈빛이 묘해졌다.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알아차린 나는 급하게 변명했다. 흡사 범법행위를 목격한 얼굴이었다.
“당연히 진짜로 훔쳤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농담이랍니다. 농담.”
“……그렇군요.”
“너는 오늘 왜 온 거야? 커피 마시려고?”
엘렌을 보던 시선을 아일라에게 옮겼다. 커피. 엘렌이 내 생각을 읽고는 조금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카페인 알레르기 있어.”
“언제부터?”
“저번부터 생겼지,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