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에테르나가 사무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되어 있던 내담자가 들어왔다. 시계는 정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일라가 문을 열자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리카르도였다.
그는 소맷부리에 은실로 장식된 검은색 스리피스 슈트를 입고 있었다.
실내에 들어오자마자 아직도 방 안에 짙게 배어 있는 아네모네 향을 맡았는지,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순전히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의 표정이 일순 흡족한 듯 보였다. 하지만 눈을 한번 깜빡이자 언제 그런 기색을 보였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착각이었나?’
그가 외투를 벗자 아일라가 그 옷을 받아 옆에 있던 걸이에 걸었다. 그녀가 익숙하게 다실로 걸어가는 것을 본 나는 자리에 앉은 그에게 물었다.
“커피 좀 드릴까요?”
그리고 내 방정맞은 말에 혀를 씹었다.
커피를 타러 다실로 향하던 아일라를 서둘러 붙잡았다.
“아일라, 코코아 좀 준비해 주세요.”
“네? 커피는…….”
“공작님께서 코코아가 드시고 싶다네요. 그렇죠?”
리카르도가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달콤한 코코아 향기가 다실 쪽에서 나는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안심했다. 작은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공작님.”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나? 가령 자는 도중 인기척을 느꼈다든가, 방에 사라진 물건이 있다든가. 이상한 점이 있으면 뭐든 말해. 그게 훗날 그대의 신상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으니.”
산뜻하게 던진 인사는 뒷목이 선득해지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분명 나를 걱정해서 던진 질문일 텐데 지금은 죽지도 않은 나를 그 단서로 나를 죽일 범인을 찾아주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이래서 아일라가…….’
이제 그녀가 그를 제 아버지의 살인 청부 업자로 착각한 게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아, 아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전 아직 안 죽었어요, 라고 덧붙여 말하고 싶었다.
“그런가.”
리카르도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발견하지 못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일단 완전히 신변이 확보될 때까지 기사를 보내놓도록 하지.”
“…기사라면, 에르도안 공작 가문의 기사 말씀이신가요?”
그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줄 줄은 생각지 못했기에 조금 당황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 기사들은 모두 북부에 있다. 극소수만 수도에 주둔한 상태야. 그대에게 보낼 기사는 마리어스 소속이지.”
어느덧 코코아를 타온 아일라가 조용히 대화를 듣다가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마, 마리어스.”
그녀가 작게 속삭였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크기였다. 그녀가 놀란 만큼 나 또한 놀라 찻잔을 든 채 멈추었다.
‘마리어스.’
간단히 말하면 황실의 정예 기사단이었다. 전시 상황에서 황제의 최측근에 배치되어 최후까지 황제의 목숨을 지키는 막중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마르그리트 백작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본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묘한 소문만 나돌았다. 칼만으로 철을 쪼갤 수 있다, 뜨거운 활화산에서 용암으로 냉수마찰(?)을 하며 훈련을 한다, 등등 터무니없는 소문들이 많았다.
그만큼 그들에 대한 아주 작은 사실도 외부에 흘러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리어스 기사들이 온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만약 리카르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황태자는 왜 허니문에 오시죠?’라는 질문 대신 ‘마리어스 기사들이 왜 백작 가문에 있는 거죠?’, ‘마리어스 기사들은 진짜 냉수마찰을 용암으로…….’ 등등 갖가지 질문 더미에 질식해 죽을 것이 자명했다.
‘어떻게든 거절해야 한다.’
이런 전무후무한,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 나는 난감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슬쩍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리어스 기사들은 황제 폐하의 호위에 대한 의무로 바쁘지 않나요?”
“본래라면 그렇지. 그렇지만 그대를 지킬 병력 정도는 남아 있으니 그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폐하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
“통솔권은 나한테 있으니 그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뭐?
‘마리어스의 통솔권이 리카르도에게 있다고?’
그건 처음 알게 된 정보였다. 아마 외부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내가 처음일 것이리라, 감히 장담했다. 어쨌든 그의 말에 아까부터 들었던 의문의 일부가 해소되었다.
알려진 대로 황제가 마리어스를 지휘했다면 한낱 귀족 부인에 불과한 나를 호위하는 일에 마리어스를 배치하는 것을 허락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궁의 최정예 기사단을 리카르도가 통솔하고 있다는 건….
“…….”
나는 리카르도를 쳐다보았다. 무심한 낯에 거짓을 고하는 흔적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작 영애의 계약 결혼>에서 그를 고결하고 고강한 기사라고 일컬었다. 소설 내용에서도 그가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일삼는 일은 전무했다.
‘정말 황제가 위임했다고?’
오죽 귀애하던 조카였고, 제국에서 가장 명성 높은 영웅이자 기사이긴 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가능할 법한 이야기는 맞았다.
그래도 부담스러운 건 이쪽에서 사양이란 말씀이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예전에 아일라가 말씀드린 일이라면 제 쪽에서도 대책을 이미 세운 상태랍니다.”
평소의 그라면 이 정도 설명으로 ‘그렇군.’ 하고 대답하며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은 보란 듯 빗겨나갔다.
“대책이라면 무슨 대책이지?”
집요한 질문과 눈빛이 이 주제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일단, 이 세계관에서 최강자인 남주가 나를 사업 메이트 이상으로 생각해준다는 건, 여러모로 이득이고 좋은 흐름이긴 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이 있는 이상 핑곗거리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게….”
무슨 대책이라고 해야 하지? 친구가 마탑주인데 그가 나에 대한 암살의뢰를 받지 않았고, 보호 마법을 걸어줬다고 솔직히 이야기할까?
하지만 그건 내가 ‘로위나 카시어스’입니다, 라고 토로하는 꼴이었다. 알렉산드로 대공의 첫째 아들은 사교적인 편이라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군도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성질머리 때문에 적이 많다면 많았지.
로위나 카시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문 안에서 카시어스 후계자로서 직무만 처리하는 것도 벅차 또래 영애를 만날 시간 따위 내지 못했다. 후계자가 아들이 아닌 딸이었기에 그 점을 신용하지 못한 아버지의 빠듯한 훈육도 한몫했다.
그 연유로 내가 엘렌과 친구라는 것을 밝히면 웬만한 귀족들은 나의 정체에 대해 의심할 것이다.
물론 세상일을 모르는 아일라는 예외였다.
그녀를 문득 바라보자, 은색 머리를 단정하게 한쪽으로 묶어 내린 채 눈을 빛내며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호기심과 흥미보다는 다른 것에 가까웠다.
‘긴장감…?’
이미 한 달여간 리카르도를 본 아일라는 이제 그의 위압적이고 차가운 분위기에도 내성이 되었는지 안부 인사를 하곤 했다. 1년이 지났는데도 형식적인 인사조차 어려워하는 직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긴장하고 있다는 게 그녀답지 않았다.
내 침묵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리카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르그리트 백작이 세운 방안이라면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군.”
말의 내용은 권유에 가까웠지만, 분위기와 말투는 어떻게든 마리어스 기사단을 마르그리트 백작저에 붙이기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아뇨…… 제 남편의 대책은 아니고.”
아으, 이걸 뭐라고 핑계를 댄담? 마리어스 기사단을 뿌리칠 수 있는 적당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신변을 걱정하는 사람 앞에서 앞으로 올 내담자의 질문 폭탄이 귀찮아서 싫다고 말하기엔 내가 생각해도 영 이상하고 설득력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아일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장님은 그 마법사분이….”
“마법사?”
리카르도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일라의 개입에 당황한 나는 ‘어, 어. 그렇죠.’라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렇죠, 가 웬 말이란 말인가!
“아는 마법사가 있었나?”
그의 물음에 나는 재빨리 말했다.
“아, 네. 아, 알렉스라고…… 유능한 마법사가 있는데 저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주었답니다.”
내 대답에 아일라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그녀가 그렇게 바라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르도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고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알렉스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군.”
그게 당연했다. 그런 이름을 가진 마법사는 없으니까…….
아니, 네?
“들어보신 적이 있다고요?”
깜짝 놀란 나는 아일라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 또한 당황한 얼굴로 토끼 눈을 뜨고 있었다.
“저번에 마탑에 방문했을 때, 본인을 알렉스라고 소개한 마법사가 있었지.”
이런 염병. 실제로 있는 마법사인 줄은 몰랐다. 점점 입만 열면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누가 기분 탓이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이런 거짓말이 평생 감춰지는 경우를 나는 잘 보질 못했다.
‘만약에 탄로가 난다면… 이번엔 아일라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이 거짓말은 내 탓은 아닌 거로 하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을 하며 속으로나마 양심의 가책을 덜어냈다. 하지만 시한부 얘기는 변명할 여지 없이 오로지 내 실책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얼굴로 리카르도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갈색 머리에 짙은 회색 눈을 가진 남자인가?”
“네, 맞아요. ”
‘미안, 리카르도.’
사업을 할 때는 약간의 하얀 거짓말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한 조미료 같은 존재였지만, 어째 리카르도에게 하는 거짓말은 이따위인지 모르겠다. 이 모든 사실이 밝혀지면….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자 미소를 짓는 입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가 보기엔 별로 유능한 마법사로 보이지 않던데.”
그렇게 말한 리카르도는 이틀 내로 마리어스 기사들을 보내겠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 안녕히 가세요.”
알렉스가 마탑에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돌발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그의 제안을 승낙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