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32화 (33/124)


32화




<위병 대장, 반란군에 의해 피살.>



신문에는 반란군에 대한 소식이 이따금 들려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신문에 집중했다.


잠시 주인공들의 중매 일과 아일라의 데뷔식에 정신이 팔려 미처 잊고 있던 사건이었다.


이 일이 벌어지고, 황궁 연회에서 황제는 음독으로 위중한 상태에 빠질 예정이다. 반란군의 소행이었다. 그 때문에 황태자는 임시로 음독 사건을 조사할 조사단을 꾸렸고, 마침 수도에 있던 리카르도가 조사단의 총책임을 떠맡게 될 것이었다.


“아일라, 좋은 아침이에요.”


이제 막 출근한, 성실한 비서이자 우리 여주, 아일라에게 인사했다.


황제의 음독 사건조차 해결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람은 아일라였다. 그녀는 사교계에 스며들기 위해 여러 차를 공부하면서 약초까지 공부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황제의 음독에 쓰이는 약초의 배합을 알아내게 되었다.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건 여주를 위한, 여주에 의한, 여주의 소설이라 가능한 일이었지.


다른 한 손엔 펜대를 굴리며 골똘히 고민했다.


‘황제의 음독 사건.’


지금의 황태자인 안셀모가 황위에 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독주를 마신 황제는 몇 달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아일라에 의해 해독제를 먹고 깨어났다. 하지만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는 국정을 살피기엔 역부족이었다.


황제는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요양을 위해 남은 여생은 남쪽 지방에서 보내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막을 수도 있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일에 개입하는 건 주인공들의 중매 일에 개입하는 것과 일의 경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려 증거도 없이 반란군이 황제를 음독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나 역시도 반란군과 한패로 몰리는 난감한 일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이 일로 꽤 고생할 리카르도를 떠올리자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돈 많이 벌고 무병장수를 원하는 소시민 1, 엑스트라 1에겐 영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지.’


이 일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히며, 나는 신문을 다시 펼쳐 들었다. 헤드라인 아래에는 레니에 후작 부인이 붉은 장미처럼 화려하게 웃는 얼굴이 있었다.


사진 아래엔 그녀가 이번 황태자비의 샤프롱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대개 황태자비의 샤프롱은 황태자의 모후인 황후에게 지정받아야 맡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그 말인즉슨 레니에 후작 부인이 이번에 샤프롱으로 뽑히면서 한층 사교계에서 기세등등하게 영향력을 떨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원작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막상 아일라의 뺨을 친 사람이 뻔뻔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까 배알이 뒤틀렸다.


‘잠시만. 그러면 소시민 1, 엑스트라 1은 이미 그른 거 아니야……?’


한 가지 망각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미 내 처지는 이 악역에게 찍힌 불쌍한 신세로 전락한 지 오래라는 기막힌 사실을.


“후우…….”


지금부터라도 숨죽이고 조용하게 살면 가능성 있지 않을까?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이건 모두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고 딱히 다른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일라는 그대로 후작 부인에게 끌려가 회귀 전과 같은 코스를 밟았을 테니 말이다.


-똑똑.


그리고 아침 8시인데, 때아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내 커피를 내리는 직원을 제외하고, 아침부터 내 사무실에 들어오는 직원은 없었다. 누가 용건도 없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사장을 보고 싶어 한단 말인가.


‘에효. XX.’


속으로 욕을 걸걸하게 뱉으며 남은 커피를 원샷 했다. 지독하게 쓴 커피 향이 속을 타고 올라왔다. 이 시간에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정해져 있었다.


거룩하고 위대하신 클로비스의 황태자가 납신 거였다.


대체 무슨 영문인 건지, 리카르도가 수도에 남게 되자 황태자도 다시 허니문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허니문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사교계에도 퍼졌는지, 내담을 하러 오는 상담자마다 황태자가 왜 이곳에 오는 거냐고 물어봤다. 중매상인데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에 대해 물어본다고 가정해 보아라.


속은 짜증이 나 미치기 일보 직전이지만, 미래를 생각한 나는 매일 웃으며 ‘내담자의 상담 내용은 비밀 조항에 적시되어 있기 때문에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내 입안에 있는 녹음기를 재생할 뿐이었다.


“…….”


노크 소리에 아일라는 이미 문 앞에 서서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을 열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탐탁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를 계속 문밖에 세워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가 문을 열자 진한 아네모네 꽃향기가 훅 코 아래를 스쳤다.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향수였다.


‘황태자가 아니야?’


“어서 오세요.”


예기치 않은 손님에 살짝 놀란 아일라가 인사하며 방문자를 내가 있는 책상 앞으로 인도했다.


“…안녕하세요.”


조명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금발에 매혹적으로 요요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몸의 곡선을 살린 보라색 엠파이어 드레스는 한눈에 보아도 장인의 손을 거친 작품이었다.


“…황태자비 전하.”


에테르나, 그녀였다.


원작에서 아일라에게 온갖 파렴치한 술수를 쓰다가 몰락하는 고티에의 황녀이자, 클로비스 제국의 황태자비. 이렇듯 전형적인 악녀의 포지션을 맡고 있던 그녀였다.


아일라에게 한 일들로 그녀는 폐비가 될 뻔하지만, 현 황후의 은혜로 폐위당하는 것은 모면했다.


그녀는 고고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세우며 내 앞에 다가왔다. 그런데 그녀의 기세가 서릿발처럼 차갑고 흉흉한 게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내 말에 아일라는 눈을 홉뜨며 입을 벌렸다. 그녀가 ‘화, 황태자비 전하?’라고 입을 벙긋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아까 아팠던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지만… 이건 엑스트라에게 어떤 종류의 재해와 진배없지 않은가?


처음에는 레니에 후작 부인, 다음은 황태자, 그다음은 황태자비. 다음엔 누구일지 두렵기까지 했다. 설마 황후나 황제가 방문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보면 여기가 원작 등장인물들이 정모나 하는 시장바닥인 줄 알겠네.


어이없는 속마음과 달리 나는 업무용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고귀하며 순수함이 깃든 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라며….”


으레 윗분들을 대하듯 장황한 인사말을 늘여놓으려고 운을 뗐지만, 에테르나는 귀찮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작은 형식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 같은 고고한 인상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면 다른 급한 볼일이 있다던가.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얘기하죠. 이곳에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후자였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건만,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실내에 가득 퍼졌다.


난데없는 방문은 어느 누구에게나 무례한 일이었지만, 에테르나의 행위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풍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거… 발치에서 구두나 핥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아일라가 눈알을 굴리는 속도가 빨라졌고, 난감한 기분에 나는 미간을 살짝 좁히다가 다시 폈다. 그녀가 방문한 이유는 명확했다. 그녀의 남편이자 우리 회사의 민폐 손님인 황태자.


그를 찾는 것이라면 아주 좋은 생각이 있었다. 황태자를 퇴치할 아주 좋은 묘수가.


“네, 결혼 상담을 하러 오셨답니다.”


“…결혼 상담?”


내 대답에 에테르나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내 안면을 찢어발길 듯이 바라보는 그녀의 흉흉한 시선에 나는 우아하고 반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러다 얼굴 뚫리겠네.’


“네.”


인정사정없이 뺨을 할퀴는 그녀의 눈초리에 볼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에테르나의 고혹적인 입매가 사선으로 올라갔다.


“…어디, 그가 다른 혼처라도 알아보고 싶다고 하던가요?”


태연하게 물었지만, 그녀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가만 보니 온몸을 떨고 있었다. 평범하게 충격적인 소식에 놀란 것이 아닌, 가슴속에 억누른 내재 된 분노로 인해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죄송하지만 상담 내용은 아무리 가족분이라도 당사자의 승인 없이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나는 난감한 미소를 매달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와 달리 내 속은 사악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번 기회로 황태자가 허니문에 방문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 나를 누가 책망할쏘냐. 부부 상담을 원한다는 황태자는 아일라의 손금을 봐주겠다는 핑계로 시답지 않은 작업이나 걸어대었다. 손님은 그가 여기에 왜 오냐고 물어보고, 내 뒷목은 나날이 뻐근해지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보면 외려 에테르나의 방문은 희소식이었다.


그 엿 같은 상황을 타개해줄 아주 좋은 소식.


“…….”


아일라는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가족한테는 상담 내용이 비밀이라는 것은 완전한 진실도 거짓도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 사회를 고려하여 대부분 말해주는 편이었다. 나는 아일라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눈짓하며 에테르나에게 싱긋 웃었다.


“하오나 그런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으셨는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감사 인사라도 전하고 싶었다. 더불어 평범한 귀부인도 아니고 황태자비인 에테르나에게 댁의 남편이 결혼 중매 업체에 드나들고 있다는 고자질을 할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사람이 궁금했다.


슬쩍 모르는 양 운을 떼었건만, 에테르나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옆에 있던 여자를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차림새나 몸짓을 보아선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인 듯했다. 그러나 에테르나처럼 얼굴에 이국적인 느낌이 흘렀다. 눈치를 보아선 고티에 제국에서 데려온 시녀가 분명했다.


“전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지?”


“지, 집무실에 계시지 않을까요? 전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빙긋 미소를 지은 에테르나가 사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화궁에 직접 가 보면 알게 되지 않겠니?”


그리곤 드레스의 밑단을 살짝 올려잡으며 거친 구둣발 소리를 내곤 사무실을 나갔다.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나가시네요.”


아일라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녀 말대로였다. 레니에 후작 부인과는 다른 의미로 태풍이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