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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31화 (32/124)

31화

밖은 눈이 오는 겨울이었으나 황제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원엔 다른 궁과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보온 마법이 처져 있었다. 그 마법을 유지하는 비용만 해도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겨울이었으니 정원은 아름다운 모란꽃이 피워져 있는 봄을 만날 수 있는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모란궁에 있던 시녀와 시종들은 군말 없이 티테이블을 가져와 화려한 찻잔과 찻주전자, 그리고 다양한 디저트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테이블이 채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곳에 두 남녀가 티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기실 황제의 허락 없이 정원에 머무르는 건, 엄히 다스려질 행위였으나 그 주체가 황제가 귀애하게 여기는 조카와 며느리였다.

그 때문에 모란궁의 정원에선 누구의 제재 없이 티타임이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홍차로.”

홍차를 싫어하는 그가 웬일로 홍차를 마시겠다고 하자, 에테르나는 신기하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황제와 같이 호오가 분명한 리카르도가 입맛이 달라졌다는 건 의외의 사실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공작이나 나나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둘 다 홍차를 한 입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에테르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본래 사담을 나누고 자연스럽게 본론을 꺼내는 것이 귀족 간의 대화법이었으나 그 대화법이 통하지 않는, 단 한 명의 귀족이 바로 그녀 앞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에 북부로 올라가는 게 확정된 일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리카르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괜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게 아까 말씀하신 이야기와 연관이 있습니까?”

“당연하죠. 그럼 대답은?”

“사정이 생겨 미루었습니다.”

사정이라. 에테르나는 그 사정이 뭔지 묻고 싶었으나, 그것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정말로 자리를 뜰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그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번 연회에 참석할 건가요?”

“…….”

정말 무안할 만큼 말이 없는 남자였다. 에테르나는 새삼 그의 출신을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연회에 참석한다면 레니에 영애는 어떤가요?”

“아일라 레니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의 대답에 에테르나는 잠시 하려던 말을 잊어버리고 입술을 일자로 굳혔다.

아일라 레니에?

‘그러고 보니 레니에 후작 영애가 둘이었지.’

망각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후작 가문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에스텔라 레니에와 아일라 레니에.

‘아일라 레니에.’

입안에 굴리는 어감이 썩 좋지 않았다. 자주 듣지 못해 낯설어서 그런 것인가?

후작 가문에 딸이 두 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최근이었다.

가십거리로 가득한 신문의 헤드라인에 여느 날처럼 황태자의 불륜이 대문짝만하게 장식되어 신문을 찢어버리려고 했을 때였다.

그 아래엔 특보로 ‘레니에 후작 영애의 가출.’이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우연히 읽은 특보에 깜짝 놀란 그녀는 다시 한 번 신문을 자세히 읽은 후, 곧 가출했다는 후작 영애가 그녀가 알던 ‘에스텔라 레니에’가 아닌 ‘아일라 레니에’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 에테르나는 ‘아일라 레니에’에 대한 존재를 인지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알아보니 사생아도 아니었던 영애가 이렇게 천대를 당하며 사교계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적어도 고티에 제국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최근 아일라 레니에가 어떤 결혼 중매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아마도 리카르도가 그 회사를 다니는 모양이었다.

에테르나가 설핏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에스텔라 레니에를 말하는 거랍니다. 이번 황궁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라면, 레니에 영애는 어떨지 공작과 이야기해보고 싶군요.”

“…….”

리카르도는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걸 지켜보는 그녀 또한 고아한 표정을 유지한 채 디저트를 한 스푼 떴지만, 속은 바짝 마르고 있었다. 아무리 계륵 같은 제안이라도 그녀에겐 그것조차 필요한 처지였다. 그러나 공작으로부터 바로 거절의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터.

-탁.

작은 소리와 함께 그의 찻잔이 접시에 내려앉았다. 이어 그의 핏빛처럼 붉은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좋습니다.”

“……승낙한다는 얘기인가요?”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태연히 대답했지만, 거절을 예상했던 에테르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을 내뱉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도 살짝 흔들렸다. 이렇게 이야기가 순탄하게 흘러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면 혼자서라도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기쁠 일인데 왜 이렇게 석연하지 못한 건지.’

평소에도 꽤 날카로운 직감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그녀였기에, 에테르나는 그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 건진 건 없었다. 워낙 표정의 변화가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이였다.

한편 리카르도는 천천히 홍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 일에 대해 알아볼 기회군.’

그는 오필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차례대로 마탑과 헌병대, 황실, 그리고 후작저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암살의뢰의 단서라곤 의뢰자가 여자라는 것뿐. 단서를 건질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에스텔라 레니에.

보좌관의 조사로 에스텔라 레니에가 최근 마탑에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황태자비의 제안을 승낙했다.

-혹시 연회 때 누가 참석하는지 아시나요?

오필리아는 그 질문에 이어 가면을 쓰고는 자신을 알아보겠냐고 질문했다. 그것으로 리카르도는 오필리아가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가능한 연회에 참석하는 일도 막는 게 맞았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하고자 마음먹은 일이 있다면 좀처럼 고집을 굽히지 않았으니. 가면을 쓰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그녀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그런 것이 아닐지 추측할 뿐이었다.

혹여 사람이 많은 연회에서 오필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리카르도는 명예 황궁 기사단장이라는 직함을 이용해 연회에 들어갈까 생각도 했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연회장의 주변만 맴돌게 될 뿐이었다. 그녀를 가까이서 보호하기 위해서는 직접 참석해야만 했다.

적어도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사거리에 있어야 그녀를 확실히 보호할 수 있었다.

이제 에테르나와 리카르도,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필요한 용건은 남아 있지 않았다. 때문에 티타임은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리라, 에테르나는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리카르도가 먼저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은 에테르나의 얼굴은 곧바로 인정사정없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주먹을 꽉 쥔 그녀의 손에 핏줄이 바짝 돋았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인사하고는 훌쩍 가문의 마차를 타고 황궁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에테르나는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디저트를 불성 사납게 포크로 짓이기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의 시녀가 다가왔다.

“전하, 무슨 일 있으세요?”

“내일, 당장. 그 허니문이라는 회사에 갈 준비해.”

그녀의 잇새로 이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한편, 마차에 앉은 리카르도는 아까 모란궁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황태자 곁에 붙여두었던 세작과의 대화였다. 세작은 이 은밀한 만남이 누군가에게 발각될까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제가 각하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황궁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에 리카르도는 대답했다.

-외려 이목을 끌 수 있다. 사람들은 가까운 제 눈썹은 못 보는 법이야. 그게 황족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렇게 그는 세작이 건넨 쪽지를 받고 헤어졌다. 기실 약간만 생각해 보면 세작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오필리아에 관한 일이라 리카르도는 그답지 않게 일을 서둘렀다.

[북부에 파견할 황실 군대를 늘린 것 외에는 다른 특이 사항 없음. 여전히 황태자비와도 사이가 좋지 않음. 아래엔 황궁에서 황태자와 만난 사람의 리스트와 황태자가 외부에서 만난 리스트……]

쪽지에는 대부분 정계에 관여하는 고위급 귀족들이 적혀 있었다. 반면에 외부에선 귀족 영애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었다. 리카르도는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적으로 리스트에 적힌 이름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나의 이름에 빠르게 내려가던 시선이 멈추었다.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

리카르도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또다시 시선이 멈추었다. 푸른 눈동자가 서늘히 쪽지에 꽂혔다.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레니에 후작 부인.

리카르도는 마차의 행선을 바꿀 것을 명령했다. 그가 방향을 바꾼 방향의 끝엔 황제가 모든 국사를 관리하는 집무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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