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30화 (31/124)

30화

그 때문에 무심결에 그의 입가에 손을 가져가다가 다시 내리며 물었다.

“……진짜?”

“응.”

그의 긍정에 나는 어깨에 실은 힘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기운이 쫙 빠졌다. 연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부모님이 참석할까 봐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막상 참석하지 않는다고 하니 기분이 복잡했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참석할 수 있겠네…….”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 껄끄러운 상황이 되는 것보단 나은 일이 분명하건만, 마냥 그렇게 좋지만도 않았다. 오묘한 느낌이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기분. 영혼 없이 내뱉은 말에 엘렌이 반응했다.

“남자 파트너는 안 필요해?”

“너만 아니면 괜찮아.”

“너무해. 오필.”

엘렌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얘는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걸까.

리카르도만큼은 아니지만, 빈번하게 사무실에 출석했던 그가 며칠 동안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설마… 저번에 말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이번엔 그게 궁금해?”

속마음을 읽은 그가 나에게 물었다.

“별로.”

“오필이 궁금하면 물어봐.”

진심으로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소시민에겐 친구가 암살과 밀거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심신에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다른 궁금한 건 있어.”

나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다.

“자, 나인지 티 나?”

아무리 카시어스 공작 가문 사람들이 안 온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엘렌은 뭉근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너무 가까워진 거리에 나는 일순 숨을 멈추었다. 고개를 슬쩍 뒤로 빼며 말했다.

“너무 가깝잖아. 멀리 좀 떨어져.”

“자세히 보려면 가까이서 봐야지.”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런 내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듯 엘렌의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을 좇았다.

“그래서 이제 다 봤어?”

“아직.”

“거참 오래도 걸리네.”

빨리 대답해 달라며 재촉했다. 아일라는 괜찮다고 했지만, 리카르도는 바로 나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조금 불안했다.

엘렌은 내 속을 읽었는지 아니면 내 눈 안에 떠오른 불안감을 보았는지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머리색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머리색?”

머리색?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나는 거울을 들어 내 머리색을 확인했다. 밝은 금색 머리. 금발 머리가 많은 귀족에겐 흔하디흔한 색이었다.

“응, 오필의 머리색은 조금 남다르거든.”

“대체 어디가?”

“오필의 머리를 햇빛 아래에서 보면 태양처럼 보이니까.”

“그렇게 뜨거워 보여?”

나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만졌다. 내 눈엔 그냥 흔한 블론디 금발을 가진 여자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연회 동안에 머리색을 바꿔주겠다는 엘렌의 제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불안의 싹은 미리부터 잘라두는 편이 마음 편하니까.

나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돈뭉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걸 보는 엘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게 뭐야? 오필?”

“머리색 바꿔준 사례금이라고 생각해.”

“사례금치고는 굉장히 거금인데?”

엘렌은 돈 봉투를 집어 들고 안에 있는 돈을 세었다.

“30만 실링? 설마 오필… 마탑이 어렵다고 해서 주는 거야?”

“아니니까 아무 말 없이 받아. 혹시 또 내 속마음 읽으면 그 돈 다시 뺏을 줄 알아.”

내 말에 엘렌은 부모님 몰래 장난치다가 걸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시 돈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안 가져가?”

“마음은 고맙지만.”

그가 빙긋 웃었다. 왠지 미소가 사악하게 느껴졌다.

“알다시피 내가 돈이 없어서 마탑에 돈을 조달하지 못한 건 아니니까.”

“그럼?”

“오필, 생각보다 마탑에는 놀고먹는 애들도 많아.”

‘그거 딱 넌데?’

하고 속마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나 내 표정은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듯 절로 찌푸려졌다. 내 얼굴을 보고서도 엘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버릇은 내버려 두면 안 돼. 돈이 귀한 줄 알아야지.”

“그래서 기껏 한다는 일이 비즈니스?”

“요즘 워낙 경제가 어렵잖아?”

그는 그 말만 하고서 소파에 나른히 앉았다. 저 태평한 모습은 경제불황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그가 내 상사가 아니어서 다행일 뿐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 * *

오전에 화원을 다녀와 궁 안에서 복도를 걷던 에테르나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황궁 밖으로 잠시 그녀의 심부름을 다녀온 시녀가 가져온 소식 탓이었다.

“전하, 방금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방금 에르도안 공작님이 황궁에 입궁하셨다는 소식이요!”

“에르도안 공작이?”

시녀의 말에 에테르나는 흥, 콧소리를 흘렸다. 새하얀 깃털이 달린 부채를 흔들며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북부에 도착해야 했을 사람이 아직도 수도에 있다고?

“어디로 가셨지?”

“방향은 서쪽이었던 것 같은데……. 서쪽이 확실해요.”

그쪽은 황제가 기거하는 모란궁이었다. 에테르나는 돌연 몸을 틀어 발걸음을 옮겼다.

“전하, 목련궁에 재단사가 기다리고 있는데….”

“더 기다리라고 하려무나.”

에테르나는 가볍게 대꾸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이 어딘지 깨달은 시녀가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리고 십여 분을 걸어 모란궁에 도착했다.

‘아직 이곳에 있어.’

시녀의 말대로 궁 앞에는 에르도안 공작 가문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남색의 마차 벽에는 흑색 표범이 그려진 휘장이 붙어 있었다.

에테르나는 휘장을 보며 에르도안 공작을 떠올렸다. 몇백 년 전에 가문이 세워질 때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리카르도 에르도안과 지독히도 어울리는 문장(紋章)이 아닌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공작은 모란궁에 무슨 볼일인 거지?’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를 만난다면 이 의문이 입 밖으로 나올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이 북부로 올라가겠다고 말한 다음 날, 레니에 후작이 찾아왔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자신의 딸인 에스텔라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였다. 레니에 후작의 권세는 예전보다 약간 하락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국에서 영명은 드높았다. 반면 에테르나는 제국에 온 지 2년이 흘렀지만, 기반을 다지기엔 충분치 않았다.

기실 타국에서 온 황녀가 황실과 사교계에 기반을 세우기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는 일과 다름없었으나 그녀는 여느 귀족이라면 허리를 굽힐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

‘이걸론 아직 부족해.’

황태자의 총애를 얻지 못한 자신의 권력은 풍전등화에 불과했다. 황제의 변덕으로 호의가 사라지거나, 혹은 그가 붕어하기라도 한다면 사라질 권력.

후작의 힘이 필요한 에테르나는 만일 에르도안 공작이 수도에 남는다면 그의 곁에 레니에 후작 영애를 붙여볼 생각이었다.

본래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정계에 구를 대로 구른 후작이 그러한 에테르나의 속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더불어 에르도안 공작과 친분을 만들 기회이기도 했다.

에르도안 공작에게 파트너가 생겼다면 이미 신문에 난리가 났을 테지. 그럼 아직은 그에게 마땅한 파트너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럼 어디에 있을까. 그 야생 흑표범은.’

에테르나는 천천히 모란궁 안을 거닐었다. 그러는 동안 궁 안에서 일하는 시녀와 시종들과 마주쳤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의 길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호오가 확실한 황제가 황태자비를 아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 에르도안 공작.”

드디어 발견했다. 붉은 드레스 안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발가락은 높은 구두를 신고 오래 걸어 다닌 탓에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우연한 만남인 것처럼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아도 진심으로 놀란 것이라 생각할 만한 훌륭한 연기였다.

“여기서 만나 뵙게 되었군요.”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던졌다. 여전히 피부는 유리 인형처럼 새하얗고, 농도 짙은 푸른 눈동자는 냉기가 흘렀다.

“여기엔 어쩐 일이죠?”

북부에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에테르나는 부러 뒷말은 중얼거리듯 말을 흘렸다. 그러나 충분히 그에게 들릴 만한 소리였다.

“공무 때문에 들렀습니다.”

그는 혼잣말을 가장한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질문에 돌아온 쌀쌀맞은 대답에 에테르나는 ‘그래, 이래야 공작이지.’ 하며 가벼이 웃음을 흘렸다. 이런 대우는 익숙했다. 고티에 제국은 병력이 충분했지만, 그중에 마법사는 없었다.

그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녀는 볼모나 다름없는 처지로 제국에 팔리다시피 결혼을 했다. 이제는 클로비스 귀족들에게 면전에서 비웃음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는 건 우습게 넘길 수 있었다.

“그렇군요. 공작. 시간이 된다면 잠시 차 한잔이나 할까요?”

“바빠서 안 될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레니에 후작한테 관심이 많은 모양이던데.”

“…….”

“내 착각이었나요?”

“……들은 얘기라도 있습니까?”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에테르나는 처음 보는 그의 표정 변화에 호기심을 느꼈지만, 곧 목적을 떠올리며 사적인 감정은 내리눌렀다.

“알다마다요. 어떻게 하겠어요?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없다면 다음을 기약해야겠지만.”

그렇게 말했지만, 에테르나는 알고 있었다. 공작이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다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