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때아닌 오후, 낯선 사람이 사무실에 방문했다.
카롤라 부티크에서 인편을 보낸 것이다. 내일 허니문의 퇴근 시간대에 이사벨라가 방문하겠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 약속대로 이사벨라가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녀의 손엔 반짇고리와 여러 천이 든 상자가 들려 있었다.
“혼자 오셨나요?”
이사벨라에게 주문 제작을 할 때는 늘 그녀의 조수가 짐을 들며 따라왔었다. 이사벨라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이 일이 귀부인들에게 들어간다면……. 모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부인.”
그녀의 설명은 소략했지만, 태도는 정중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연회가 코앞이었다. 사교계에서 큰 중축을 맡는 레니에 후작 부인에게 만일 이 소식이 귀에 들어간다면, 카롤라 부티크는 손님이 텅 비어 손가락만 빨아야 할 것이다. 허니문은 경쟁 업체가 없어서 괜찮았지만, 부티크는 시내만 나가도 여러 곳이었다.
재봉 실력이나 복식을 만드는 감각은 이사벨라가 가장 발군이었지만, 그렇다고 귀부인들이 레니에 후작 부인의 눈총을 무시하고 카롤라 부티크를 갈 리는 없었다.
내부보다 외부 요인으로 장사가 안 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기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일라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아일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가오긴 했지만, 표정은 탐탁지 않았다. 부티크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사벨라의 실수였지.’
그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손님을 거절하는 건 이사벨라다운 실수가 아니었다. 그만큼 레니에 후작 부인의 입김이 세다는 뜻이겠지. 이사벨라의 짐에 시선을 보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이번엔 천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겠죠?”
내 말에 이사벨라도 마주 웃으며 ‘네, 부인.’ 하고 대답했다. 질문의 의도가 훤히 보이는 말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이 과연, 그녀답다고 해야 할지.
“먼저 아일라의 드레스부터 맞추도록 하죠.”
사적인 감정보다는 일단 아일라의 데뷔식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이 중요했다. 우선 아일라를 이사벨라의 앞으로 이끌었다.
‘과연,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감정이 상했다고 다른 부티크를 선택한다고 한들, 이만한 재단사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이사벨라는 빠르게 아일라의 옷 치수를 재고 붉은 원단의 드레스와 사파이어가 달린 코르사주의 도안을 만들어냈다.
그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일 뿐인데,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가 만들어질지 기대가 되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그래도 붉은색은 너무 튀지 않을까요?”
아일라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네?”
“아일라가 연회에 참석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만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아…….”
아일라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탄성을 흘렸지만, 그래도 얼굴에 걱정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연회의 주인공은 아일라가 될 거예요.”
“제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원작에서 아일라는 황궁 연회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는다. 그때는 리카르도 에르도안의 파트너로 참석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 자체만으로도 시선이 쏟아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일라의 외모가 보통 미친 미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매 상담을 받으러 온 귀족 영식들은 아일라의 외모에 넋이 나가 아일라를 향해, ‘혹시 저분도 가능합니까?’라는 헛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상식 밖의 일이 드문 일도 아니고 꽤 흔하다는 게 또 아이러니한 점이었다.
돈만 많고 능력도 없이 눈만 높은 귀족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아일라가 연회에서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그곳의 주인공이 된단 말인가. 조금 뺨이 간지러워 시선을 돌리니 아일라가 눈을 빛내며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입가엔 수줍은 미소가 달려 있었다.
“전 사장님의 드레스도 얼른 보고 싶어요.”
“내 드레스요?”
그녀의 기대 어린 시선이 살짝 부끄러웠다. 사실 나는 제대로 드레스를 맞춰서 입은 적이 없었다. 매일 업무용 투피스 정장을 입거나 블라우스를 입기 때문에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맞춤용 드레스를 부티크에서 주문해볼 일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공작 가문에 있을 때는 개인 집무실에만 처박혀 대외 활동을 한 일이 없었기에 드레스를 입는 일이 손에 꼽았다. 그걸 어머니가 안타깝게 바라볼 때가 종종 있었지….
옛일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떠오른 과거에 가슴에 뭐라도 얹힌 듯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마르그리트 부인은 어떤 색상이 마음에 드시나요?”
이사벨라가 여러 색의 원단을 들고 테이블에 펼쳤다. 아일라의 드레스는 고민도 없이 붉은 원단으로 진행한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가 펼친 원단들을 살펴보았다. 최고급 원단이라는 듯, 하나같이 재질이 보드랍고 윤기가 흘렀다.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 일단 붉은색은 아일라를 위해서 패스.
어느새 테이블 앞에 다가온 아일라도 원단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깊이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앗.”
작은 탄성에 나는 원단에서 시선을 떼었다.
“아일라?”
“사장님께서 고민되신다면 제가 골라드려도 될까요?”
그녀 말대로 딱히 꽂히는 색이 보이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어차피 연회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아일라였으니 아무 색이나 골라서 드레스를 제작해도 되었다. 그러나 드레스를 입어본 적이 없어 나에게 어울리는 드레스 색이 뭔지 가늠도 할 수 없어 고민만 길어지고 있었다.
“이건 어떠신가요?”
아일라가 집어 든 원단은 금빛으로 빛나는 주황색 원단이었다.
“사장님의 머리색이 떠오르기도 하고, 눈동자가 떠오르기도 해서…. 이게 어울리실 것 같았어요.”
아일라가 손에 든 원단을 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시무룩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지만, 주인공을 돋보이기 위한 들러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원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회에서 내가 눈에 띄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표면상 얼굴을 비추는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기에.
“날 생각하고 골라줘서 고마워요. 이건 너무 화려하니까 다음에 입어보도록 할게요.”
“하지만……!”
아일라가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내 말이 더 빨랐다.
“이걸로 해 주세요. 이사벨라.”
나는 어두운 보라색 원단을 이사벨라에게 보여 주었다. 이사벨라도 아일라가 고른 원단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조심스레 의견을 내비쳤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사벨라는 일주일 후, 사람을 보내 드레스를 배달하겠다고 얘기하고 사무실을 떠났다.
“아일라, 먼저 퇴근하세요.”
“아, 네.”
평소 내가 먼저 퇴근하고, 그 뒤에 아일라가 퇴근했었기에 아일라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그녀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윽고 아일라마저 사무실을 떠나자, 방 안엔 홀로 남았다.
‘썩을.’
이제 내 입에서 나올 주문에 벌써 몸서리가 쳐졌다.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으득…… 똑똑하며, 잘생긴 마법사님. 얼른 제 앞에 나타나 주세요.”
“나 불렀어?”
등 뒤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저 빌어먹을 소환 주문 좀 바꿔봐.”
엘렌을 소환하는 저따위의 주문을 아일라 앞에서 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10년째 똑같은 주문이지만, 저 주문을 내 입으로 말할 때마다 이가 갈렸고 혀를 씹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무실 책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엘렌이 자신의 턱에 손을 올리며 곰곰이 고민했다.
“그러면 세상에서 제일 섹시하고 귀여운…….”
“그냥 저걸로 냅두자.”
섹시하고 귀여운… 저 녀석에겐 양심이란 건 있는 건가?
“오필이 양심을 말할 입장은 아니지 않아?”
엘렌이 말갛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책상에 다리까지 뻗는 그의 분위기는 느긋하고 태평스러웠다.
정말 딱 시골에서 수도로 갓 상경한 시골 청년 같은 옷차림을 하니, 더 한량처럼 느껴졌다.
“그럼, 오필. 왜 불렀어?”
웬일로 빙빙 말을 돌리지 않고 본론을 꺼내는 그에게 나는 반색하며 질문했다.
“연회에 누가 와?”
“황제 탄신일에 열리는 연회 말하는 거지?”
“응. 거기.”
의자에 앉아 빙그르르 돌던 엘렌이 딱 멈추었다.
“그곳에 부모님이 올지 궁금해?”
그가 물었다.
“뭐…….”
그가 직설적으로 물으니, 막상 쉽게 긍정의 말이 내뱉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레니에 후작 부부든, 황제나 황태자든. 그들은 내 관심사 밖이었다. 오로지 관심이 있는 건 카시어스 가문 사람들이었다. 즉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이 연회에 참석하는지 여부였다.
“난 말 안 해 주면 모르는데.”
엘렌이 방긋 눈을 휘며 웃었다.
“아, 그래! 궁금하니까 얼른 말해줘.”
내 닦달에 비로소 엘렌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오필의 부모님은 참석 안 해.”
가벼운 미소였지만, 오늘은 유독 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