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의 상담시간이 끝나 점심시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가면인가요?”
손님이 없는 사이 가면을 쓰고 거울을 이리저리 보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아일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가면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한시라도 빨리 계획을 말해야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일라, 파트너는 구했어요?”
내 말에 아일라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금색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던 그녀는 이내 작은 한숨을 쉬고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귀족들에게 인맥이 없다는 건 비웃음을 살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점을 인지했는지 아일라의 안색도 어두웠다. 나도 그녀의 기분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었다.
나 또한 가문에 틀어박혀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외부와의 교류는 엘렌을 제외하고 일절 없었으니까.
가끔 가문에 방문하는 귀족 부인이 나에게 친하게 지내는 영애나 영식이 있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사교계에서 평판이 최악인 엘렌과 어울린다고 말하면 똑같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기에 십상이니 말이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흠이 되는 소문을 만들 수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엘렌이랑 친구라고 말해버릴걸.’
후계자라는 자리에 얽매여 솔직하지 못했던 과거가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럼 저는 어때요?”
“네?”
“내가 아일라의 후원자로서 같이 참석하는 거죠.”
그게 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연회도 아닌, 황궁의 연회에 여자가 남자 파트너도 없이 참석한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몇백 년 동안 유구하게 이어지던 연회의 불문율이 깨지는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이 일이 알려진다면 누군가는 미친 거 아니냐고 비난할 것이다.
“후원자요?”
대개 귀족과 귀족 간의 후원이란 어떤 부류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금전적으로나 인맥으로 도움을 주는 일을 뜻했다.
“아일라, 잘 한번 떠올려보세요.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원작을 알고 있던 나는 알았다. 그녀에겐 마법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사실 그녀가 죽을 당시에 났던 불은 그녀 스스로가 낸 것이었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잠을 자는 사이 불길을 만든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거의 소설의 막바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엘렌을 공작 성으로 데려오고 그에게 마법을 배우며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
고민하던 아일라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커피 타기?”
“쿨럭!”
헛기침이 나왔다.
“그런 것으로는 후원의 사유가 될 수 없어요.”
그 말은 사실이지만, 그게 후원의 사유가 될 수 있다면 그녀는 절대로 후원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건 생각이 잘 나지 않아요.”
그녀의 소극적인 말투에 답답해진 건 내 쪽이었다.
“마법이요.”
“네? 마법?”
나는 오전부터 미리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엘렌이 아일라를 보고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다고 말했어요.”
완전 개구라였다. 그는 나에게 저런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작을 읽어서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내 말에 아일라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게 사실인가요?”
“그럼요. 나중에 엘렌을 만나게 되면 물어보세요.”
그렇다면 엘렌은 맞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일라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그런데 왜 아일라나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지?’
내가 원작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사실은 다른 마법사를 만나기 전까지 엘렌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후원 문제는 해결이 되었죠? 그럼 다른 문제로 넘어갈게요.”
아일라는 또 문제가 있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물었다.
“다른 문제가 있나요?”
“있죠. 아일라. 난 여자잖아요. 내가 아일라의 파트너로 참석하면 아일라의 데뷔식을 망치게 되는 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괜찮겠어요?”
“네.”
아일라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아일라는 아직 열여덟 살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 그리 대답을 한 건 아닐까, 심히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차례 회귀를 거쳐온 상황이었다.
“내가 상사라고 눈치 보지 말고 솔직히…….”
“전 정말 좋아요, 사장님!”
아일라의 대답이 곧장 튀어나왔다.
“하지만 파트너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면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어요.”
“저는 괜찮아요. 다만 걱정되는 점이라면 저 때문에…… 사장님이 오명을 쓰실까 걱정이 돼요.”
확실히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후작저에서 찬밥신세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후원자가 되어 주겠다는 건 나에게도 리스크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연코 수많은 귀족들 중 연회장에서 주인공이 될 사람은 아일라였다.
쏟아지는 그녀에 대한 관심은 나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터.
그러면 자연스럽게 허니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에게는 아주 이득인 셈이었다.
어차피 사업은 모험이었으니까.
모 아니면 도.
이런 속물 같은 속내를 아일라에게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돈벌레란 소리를 듣는데 아일라만큼은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길 바랐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아일라는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지금이라도 대답을 바꾸는 건 늦지 않았답니다.”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농담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드릴 말씀이에요!”
아일라는 까르르 웃음을 흘렸다. 청아한 웃음소리가 실내에 퍼져나갔다.
* * *
검은 화랑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금발 머리의 중년 부인은 화랑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든 초가 어느새 반이나 녹아 있는 채였다.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듯이.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시선을 떼지 않고 하나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계속.
그림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화목한 가족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칼로 찌르면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남자와 어딘가 인위적인 느낌이 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피곤한 듯 인상을 쓰고 있는 소녀.
부인은 그림 속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로위나…….”
“부인.”
작게 훌쩍이는 여인의 등 뒤로 낮은 음성이 울렸다. 카시어스 공작이었다. 공작 부인은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녀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거칠게 닦으며 그를 비난했다.
“당신 때문에 그 애가 나간 거라고요.”
“그럼 번듯하게 아들이 있는데 딸을 후계자로 올리란 말이오?”
말의 내용과 달리 공작도 힘이 빠진 기색이었다. 그녀도 그도 오랜 기다림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 애가 이렇게 사라질 바에는, 후계위가 무슨 대수라고!”
비쩍 말라 서 있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였던 부인은 놀라울 만큼 크게 소리쳤다.
“당신 미쳤소?”
“그래, 미쳤어요. 딸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어떤 어미가 미치지 않겠어요?”
“휴식이 필요해 보이오. 얼른 방으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공작은 벌써 숱이 휑해진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로위나가 사라진 후, 그 또한 마음고생으로 머리가 많이 빠져버린 상태였다.
“이제 곧 황궁에서 연회가 열리오.”
“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몸을 돌려 남편을 등졌다. 대화를 그만하고 싶다는 습관적인 표현이었다.
“오늘 궁에 다녀왔는데 폐하께서 당신의 안부를 물었소. 이번엔 필히 참석해야 하오. 부인.”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카시어스 공작도 피곤한 얼굴로 마지못해 말하는 듯한 기색이 만연했다.
“…….”
공작부인은 뒤돌아 자신의 배우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도 자신도, 제 나이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7년밖에 되지 않는데도, 그들 사이엔 50년이 흐른 듯한 억겁의 시간이 흘렀기에. 이어 작은 목소리에 화랑을 무겁게 감싸던 적막이 깨졌다.
“엄마, 아빠. 뭐 해요?”
삐죽 작게 뻗친 금색 머리에 다홍색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어린 남자아이는 로위나의 어릴 적과 판박이였다. 아이는 문 사이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로디안을 본 공작 부인의 차가운 눈빛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로디안. 안 자고 뭐 하니? 리사.”
리사라고 불린 갈색 머리의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방으로 들어오고 입을 열었다.
“도, 도련님이 잠이 오지 않는다고 공작 각하와 부인을 찾으셨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마님.”
“…로디안, 잠이 안 오니?”
“네에-.”
칭얼거리는 로디안에게 공작이 훈계하듯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거라. 로디안.”
로디안은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공작의 남색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험상궂게 변한 얼굴에도 로디안은 고집을 부렸다.
‘쯧. 오필리아와 닮은 건 얼굴뿐이라니.’
카시어스 공작은 로디안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얼굴이 닮은 만큼 어릴 적 오필리아가 생각났지만, 로디안은 조숙했던 오필리아와 달랐다. 앳되며 사소한 일에도 어리광을 부리기 일쑤였다.
예전이라면 호통을 쳐서라도 호칭을 고치도록 만들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부인, 마리엘라 때문이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야생 짐승처럼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세요.”
“버릇만 나빠질 텐데 지금 이대로 놔두자는 얘기요?”
“그럼 그렇게 놔두세요! 남은 애 하나도 가출하도록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냉랭하고 무거워진 분위기에 어린 로디안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은 품에 아들을 안으며 달랬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공작은 쯧, 혀를 차더니 궐련을 물며 성큼성큼 화랑을 나섰다.
그러자 화랑엔 적막이 찾아왔다. 조용히 로디안을 안고 있던 공작 부인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리사, 황궁 연회에 갈 준비를 해야겠구나.”
나긋한 어조였지만 그녀의 입가엔 지친 미소가 달려 있었다. 그 얼굴을 본 리사는 작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네, 마님.”
여상히 대답한 것과는 다르게 리사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기실 마님이 사교계에 다시 발을 들이는 건 7년 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