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게 중요한가요? 당장 연구비가 없어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고요.”
“말해주면 금방 해결할게.”
엘렌의 입술이 반듯하게 곡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에나는 그 위화감을 눈치채고 손을 떨었다.
그의 눈빛엔 살기가 녹진하게 깔려 있었다.
“알아냈다고 연락했잖아. 그래서 오필이랑 같이 있었는데 중간에 나왔어.”
“……후우.”
그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이유를 깨달은 그녀는 야트막한 한숨을 뱉었다.
이 순간 그녀는 오필리아와 그를 떼어놓은 훼방꾼이었다.
하지만 엘렌은 그녀가 연락을 하자마자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가 저번부터 찾던 사람이 누구인지 실마리가 잡혔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부를 서랍에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곳엔 오필리아 마르그리트,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통 의뢰인은 비밀보장에 대한 약조로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지만, 모든 일에 비밀은 없었다.
“이날 한 여자가 다녀갔다고 해요.”
그녀가 검지로 명부를 가리켰다. 날짜가 적힌 칸 옆에는 오필리아의 이름이 나란히 있었다.
“여자?”
말투는 밝았지만, 어딘가 음산함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눈빛은 아까보다 살기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목을 꺾어버릴 것처럼. 소름이 끼치는 분위기에 에나는 무의식적으로 싸늘한 기운을 떨쳐내듯 팔을 쓱쓱 문대며 말을 이었다.
“네. 긴 후드를 입고 있어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고 해요. 역시 레니에 후작 부인이 아닐까요?”
“아니었어.”
눈빛에 살기가 걷힌 엘렌은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내포한 의미를 깨달은 에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은 레니에 후작 저택에 이미 다녀왔다는 뜻이었다. 그의 성격상 정식으로 초대를 받거나 방문하겠단 약속을 잡아서 갔을 일은 없었을 테고….
“무단 가택 침입은 범죄 아닌가요?”
“이건 범죄 아니고?”
“……이건 마탑의 생계가 달린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죠. 잠시만요.”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잠시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몇 분이 흐르고, 이내 한 소년을 데리고 등장했다.
“얘는?”
엘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소년이 에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정식 마법사가 아닌 수련생인지 로브를 입지 않았다.
“그날, 긴 후드를 뒤집어쓰고 왔던 사람을 기억하니? ”
이곳에 온 이유를 몰라 가만히 멀뚱거리던 소년이 에나의 물음에 시선을 돌렸다. 하급 수련생이라 마탑주를 처음 보는 그는 엘렌이 누군지 몰라 쭈뼛쭈뼛 인사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친 소년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바르작거렸다. 모든 생각이 속속히 관통되는 듯한 섬뜩한 느낌이었다.
입가에 있던 호선을 허문 엘렌이 싸늘히 입을 열었다.
“…아니네?”
소년이 본 사람은 여자가 아니었다.
* * *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 하얀 눈들이 온 세상을 뒤덮을 듯 쉴 새 없이 내려 직원 몇 명은 아침부터 회사 앞 바닥에 쌓인 눈들을 치우는 중이었다.
오는 길에 혹여나 손님이 미끄러워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일라, 화났어요?”
“아뇨, 사장님.”
내가 사준 옷을 입고 출근한 그녀는 요정처럼 해사하고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만은 먹구름이 낀 듯 뾰로통했다. 전생에 같이 놀이공원에 가지 않아서 어린 동생이 삐져 이런 표정이었던 게 떠올랐다.
“아일라,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녀에게 부드럽게 얘기했다.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외려 내가 떠올린 계획을 알게 된다면 아일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났다고 했어, 오필.’
엘렌의 말이 딱 그 짝이지 않은가. 이런 터무니 없는 계획을 떠올린 나도 그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그래서 뭔가 그에게 패배한 기분이었다.
나만큼은 정상이라 생각하고 싶었는데!
나는 책상 위에 있는 금색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는 리카르도의 보좌관에게 건네받은 황실 연회 초대장이 두 장, 들어 있었다.
아일라의 데뷔식을 화려하게 장식해 줄 연회 초대장.
그곳에 참석하기 위해선 파트너가 필요했다.
본래라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한 파트너는 남녀로 이루어지는 게 관례였다. 중앙 귀족들이 모두 참석하는 황실 연회에선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를 수도.
얼굴에 가면을 쓰고 나는 아일라의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걸 아일라한테 어떻게 말하지.’
말하면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할 수도 있었다. 아일라가 나를 황당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상상하니까 조금 목이 타기 시작했다.
막상 떠올릴 때는 꽤 괜찮은 발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좀 식히고 나니까 정말 또라이 같은 생각을 했구나, 새삼 실감이 났다.
왜 번뜩이는 발상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같이 정상적인 생각이 아닌지 조금 의문이었다.
그 발상으로 이미 아일라는 시한부 여주가 되어 있지 않은가.
게다가 황궁 연회엔…….
‘카시어스 사람들도 있겠지.’
그 때문에 나에겐 위험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사교계에서 얼굴을 비치지 않는 은둔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기실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 사교계에서 인증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허니문을 찾지 않는 연로한 부인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참석하는 것이 훨씬 낫기는 한데.
‘어떡하지.’
그냥 적당히 사람을 구해볼까 하는 쪽으로 생각의 저울이 기울었다가, 공작 성에서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애처롭게 쳐다보던 아일라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낯선 남자에게 그녀의 파트너로 참석해달라는 것도 석연치 않았다. 물론 엘렌은 고려 사항에 넣지도 않았다.
어차피 사교계 데뷔는 언젠가 오필리아 마르그리트로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아일라를 흘긋 살피며 이 이야기를 언제 꺼낼까 펜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사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어머, 공작님?”
노크의 주인은 리카르도였다.
그의 사택에 들린 게 엊그제였는데, 그를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되었다니.
그러나 아일라는 예상했다는 듯 여상히 그에게 인사했다. 나는 뭔가를 들고 있는 그의 손에 시선을 옮겼다.
‘커피?’
저 종이컵은 허니문 앞에 있는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을 할 때 주는 것이었다.
아일라도 그 커피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커피가 이미 식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커피가 식지 않고는 못 배겼다. 이런 날씨에 어떻게 커피를 테이크아웃할 생각을 한 걸까.
‘잠깐.’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일라의 커피를 부드럽게 거절하기 위해 옆 사무실에서 타 놓은 커피를 들고 들어오는 나랑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커피는 따로 필요 없으신가요?”
“괜찮다.”
“그렇지만 커피가 식었는데…….”
“식은 커피도 괜찮더군.”
“…….”
그가 1년 내내 커피를 사 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나는 엘렌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멀뚱히 서 있는 아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래, 남주라고 여주의 모든 걸 사랑하라는 법은 없지….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의 입맛을 오해하고 본의 아니게 괴롭히게 된 나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속으로 때늦은 사과를 하며 그에게 입을 열었다.
“밖은 춥지 않으셨어요?”
“딱히. 그대는 추운가?”
그 대답을 증명하듯이 그의 옷차림은 얄팍했다. 솜이 꽉 찬 옷으로 칭칭 싸맨 아일라와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추운 기색조차 없었다.
‘하긴 북부에서 견디려면…….’
“저 같은 사람은 공작님처럼 입으면 얼음 송장이 되겠네요.”
내 농담에 리카르도가 살짝 웃었다. 미미한 변화였지만 그의 미소를 처음 보는 아일라는 눈이 튀어나올 만치 커졌다.
“어젯밤은 괜찮았나?”
그의 물음에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전에 물어보지 않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어 무엇을 묻는 건지 알았다. 이렇게 안부를 물어올 정도로 걱정을 끼쳤을 줄은 몰랐는데.
“아… 네.”
민망하고 머쓱한 기분이었다. 리카르도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 괜찮은 건가?”
“네, 여기 보시면 사지가 제 위치에 멀쩡하게 붙어 있답니다.”
내가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씩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보던 리카르도는 자신이 가져온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일라, 코코아 한잔 타오세요.”
내 명령에 아일라가 다실로 들어갔다.
“코코아는 괜찮으시죠?”
그래도 이런 날씨에 차가운 커피를 마시는 게 영 신경 쓰이지 않는 일이 아니었다. 코코아는 가루만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니까 괜찮겠지.
“…….”
리카르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흘긋 아일라가 들어간 다실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저번부터 궁금했던 것에 관해 물었다.
“혹시 연회 때 누가 참석하는지 아시나요?”
“글쎄. 웬만한 중앙 귀족들은 다 참가하지 않을까 싶은데. 누구 찾는 이라도 있나?”
“아뇨…….”
혹여 카시어스 공작도 참석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연회를 질색하던 사람이었다. 사람을 만나 와인을 마시는 것보다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어머니는 연회나 티파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만나 티를 마시는 걸 좋아했고,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옷이나 장신구를 칭찬하는 걸 좋아했다.
과거에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며 온 영식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는 이야기도 이따금 듣고 자랐다.
사교계의 흐름이나 소문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어머니는 나에게 종종 사교계나 귀족들의 소문이나 소식에 대한 이야기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한때는 별 쓸데도 없는 귀족들의 사생활을 알게 된다는 게 귀찮을 뿐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 정보를 결혼 중매 사업에 이용하고 있었다.
‘지금은 뭘 하고 계실까.’
그 집 장녀가 온갖 소문을 꼬리에 달고 출타를 해버렸으니 소문에 민감한 어머니는 사교계에 발걸음을 끊어버렸다. 그런 이야기를 전달받았을 땐 가슴 한쪽이 불편했다. 그녀에게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었다.
“레니에 후작 내외는 참석할 모양이더군.”
카시어스에 대한 생각이 검은 묵처럼 번져가고 있을 때, 거기서 나를 건져 올린 건 리카르도의 말이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워져 있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야기를 꺼낸 건지 대충 가늠을 한 나는 우아하게 미소를 그렸다.
“좋은 일이네요.”
좋은 소식이었다. 이왕이면 황궁 연회에서 빛날 아일라를 레니에 후작 가문 사람들도 지켜보는 게 좋을 테니까. 내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나는 어제 일을 계획하고 바로 준비한 가면을 써보았다. 리카르도는 가만히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눈빛에는 작은 의문이 서려 있었다.
“공작님, 이러면 저인지 알아보시겠어요?”
내 물음에 그가 나의 시선에 눈을 맞추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는 건 처음인데.’
집요한 눈빛에 왠지 모르게 민망해서 뺨이 화끈거렸다.
가면이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모르는 게 이상할 것 같군.”
“네?”
간결한 그의 대답에 황급히 거울을 보았다. 얼굴에서 입가를 제외한 곳이 모두 가려져 있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고?
‘내가 그렇게 개성이 뚜렷한 얼굴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었다. 만일 아버지나 어머니가 나를 알아본다면 그런 낭패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느낌.”
“느, 느낌이요?”
예상외로 단순한 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