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공작님, 혹시 연회 초대장 필요 없으시거나 남으신 거 없으세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황궁 연회에 대한 주제로 빠질 생각이었지만, 나는 곧장 질문했다. 그가 북부로 간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이다.
“황궁 연회를 말하는 건가?”
“네.”
아일라는 내 말에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주 흡족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그녀가 입을 다무는 게 나를 도와주는 거니까.
“그게 갑자기 필요해진 모양이군.”
그가 나른히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흑표범같이 우아한 그에게 정말 어울리는 자세였다.
원작에선 저 모습을 보고 뺨을 붉혔던 아일라는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찻잔만 보고 있었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네, 여분이 있으시다면…….”
돈으로라도 살 의향이 있는데.
제국의 지엄한 황실의 초대장을 돈으로 산다고 말하면, 더군다나 그 지도자의 조카 앞에서 말하면 그들의 품격을 낮잡아 말하게 되는 꼴이었다.
그리고 리카르도가 돈 몇 푼에 흔들릴 위인도 아니었고.
“감사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말을 이렇게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막상 초대장을 달라고 하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누가 대뜸 그냥 연회도 아니고 황궁 연회의 초대장을 주겠는가.
아일라에게 흑심이 있는 황태자라면 몰라도.
리카르도와 말이 통하지 않으면 황태자에게 달라고 해야 할지 심히 고민되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때 이후로 허니문을 찾는 일은 없었다.
나랏일을 하느라 바빠서 그런지, 아니면 아일라의 커피 맛이 발길을 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긴 했다. 계속 아일라한테 작업을 거는 걸 봤다면 뒷목이 뻐근해질 게 분명했다.
“고향에 가겠다는 건 취소되었나 보군.”
그가 내가 연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오인했다는 것에 내가 반박의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백작이 초대장을 요구했나?”
백작? 곧 그가 지칭하는 사람이 마르그리트 백작, 즉 내 남편을 이르는 말임을 깨달았다.
“그 귀한 빌레드도 금방 구해줄 것처럼 말하더니 초대장 하나 못 구했을 줄은 미처 몰랐군.”
리카르도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어라…… 이게 아닌데.’
초대장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백작에 대한 험담으로 흘렀다.
하지만 리카르도가 저러는 것은 이해가 되었다.
백작저에서 엘렌이 했던 말을 생각하면 거의 무뢰배와 다름없는 무례를 범했기 때문이다.
외려 그 뒤로도 그의 부인인 내가 운영하는 허니문을 꾸준히 찾아온 리카르도가 보살이었지.
‘그때 약속을 미뤄서라도 남편 대역을 제대로 구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했다.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란 엘렌의 말이 반대가 되어 버렸다.
“그게…….”
그러나 여기서 남편 험담에 동참하기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부정하기도 난감했다.
물론 마음은 이미 그의 말에 백번 동감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이때는 빠른 사과가 답이었다. 분위기는 어색해지더라도 차후에 일어날지 모르는 후환을 생각하면 이게 현명했다.
남주가 아무리 호구에 보살이라도 그는 황제의 조카이자 얼음성을 지키는 북부의 공작이었다.
누구도 쉽사리 건들 수 없는, 검사이자 제국의 영웅이었다.
갑자기 이어지는 사죄의 분위기에 아일라가 놀라 토끼 눈을 했다.
그리고 소파에 있던 그녀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같이 일어나서 사과를 해야 하나 살피는 눈치가 역력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조용히 아일라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다시 주춤주춤 자리에 앉는 사이, 리카르도가 눈썹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이게 뭐 하는 거지? 오필리아 마르그리트.”
“그날 있던 일에 대해 빨리 사과의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미처 살피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사과나 받으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다. 고개 들어.”
그의 대답은 내가 예상하던 대답 중 하나였다. 이럴 때일수록 상대방이 괜찮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꿋꿋이 버텨야 한다.
“아닙니다. 이건 정말 사과드려야 하는 일이에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조금 풀려 있지 않을까.
“……이것도 능력이라면 탁월하군.”
“네……?”
“이런 식이었나. 자신의 흠을 아내에게 떠넘기는 것이.”
엥?
나는 깜짝 놀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내 예상과 다르게 리카르도의 표정은 풀리기는커녕 더 흉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황급하게 아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당최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대충 분위기는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그럼 초대장은 그른 걸까.’
그럼 정말로 엘렌한테 초대장을 훔쳐 오라고 부탁이라도 하거나, 암시장에서 암암리 경매장에 나오는 초대장을 기다려 높은 가격에 사는 방법밖에 없었다.
둘 다 영 내키지 않는 선택지였다.
‘음, 어떡하지.’
냉각된 공기 속에 리카르도가 책상 위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까 그의 보좌관이라고 소개한 붉은 머리의 안경 쓴 남자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몇 장이 필요한 거지?”
그의 질문을 이해한 나는 실룩샐룩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는데, 안간힘을 썼다.
황궁 연회의 초대장을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쉽게 주겠다는 답이 떨어질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감사 인사를 했다.
리카르도는 그런 인사는 되었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몇 장이 필요하지?
원래 여느 연회라면 초대장 하나에 한 쌍의 파트너가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황궁 연회는 파트너 둘 다 초대장을 갖고 있어야 입장이 가능했다.
아무래도 격식이 있는 자리인 만큼 연회에 한 명 한 명 아무나 들일 수 없게 규정해 놓은 것이었다.
그럼 아일라와 파트너만 들어가면 되니까…….
“두 장이요.”
내 입술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사, 사장님…….”
아일라가 소심한 얼굴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내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자 그녀가 우물쭈물 입을 오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곳에 저만 가기는…….”
리카르도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에게 옮겨붙었다.
“왜 혼자예요. 파트너가 있는데.”
그 파트너가 리카르도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가 이제는 휴짓조각이 된 결혼 계약서가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아일라는 내키지 않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사장님도 연회에 참가하시면, 저도 가는 걸로 하면 안 될까요?”
때아닌 그녀의 어리광에 나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아일라.”
그 때문에 이제 와 망설이는 그녀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녀가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하지만 그 사실을 아일라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소설에서도 리카르도와 약혼을 발표하기 위해 황궁 연회를 이용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아일라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는 이대로 충분히 괜찮아요……. 게다가.”
그녀가 잠시 입술을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제가 연회에 나갔다가 결례라도 저지른다면 회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아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연회에 참석하는 일이 부담스럽다는 뜻이었다.
‘처음이니까.’
작은 티파티에도 참석해본 적 없는 그녀가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황궁 연회에 참석하는 게 가볍게 다가올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였을 터.
내가 그녀의 입장보다 원작만 떠올리며 등을 떠밀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내가 참석하면 그녀도 참석하겠다는 말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 관해 묻자 아일라가 뺨을 발그레 붉혔다.
“사장님은 그런 곳에 익숙하실 테니 제가 옆에서 보고 배우면 되니까요.”
“거기에 나 말고 품위 있고 예의범절에 박식한 분들 더 많아요.”
“아니에요!”
아일라가 확신에 찬 듯 말했다.
“피로연 때도 오필리아보다 더 품격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피로연이요?”
피로연이라면 누군가의 결혼식 이후에 열리는 연회였다. 그녀가 피로연에 참가했었다고?
“네, 예전에 참가했었어요.”
대답은 빨랐지만, 나는 그녀의 음색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눈치챘다.
말의 내용도 이상했다. 태어나자마자 후작저에서 다락방 안에만 있던 그녀가 무슨 수로 피로연에 참여한단 말인가.
나는 이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일라는 전생에서 프란츠 백작과 결혼해서 열었던 피로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리카르도와 그의 보좌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결정을 내리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힐끗 아일라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를 듯 말 듯 아롱거렸다.
그녀를 보는 내 마음도 갈대처럼 흔들렸다. 아무리 회귀를 했다지만 내 눈앞에 있는 아일라는 열여덟 살이었다. 한국에선 매점에서 뭘 먹을지 고민하는 학생일 나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리카르도가 아닌 파트너를 구해 그녀와 남자만 단둘이 황궁 연회에 참석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거기에도 엘렌을 보내볼까? 아, 아냐.’
남편 대역도 이상하게 한 그를 아일라와 붙인다는 발상이라니, 이건 아일라에 억하심정이 있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었다.
“두 장 주세요.”
나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주 재밌는 일이 생각났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
* * *
노을이 질 무렵, 첨탑을 뚫고 때아닌 초록색 빛무리가 쏟아져 내렸다.
하얀 벽돌로 이루어진 높은 첨탑, 마탑 에디스였다.
그곳엔 마법사들이 원하는 모든 연구 재료와 자료들이 있었다.
그래서 각 나라의 마법사들이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이상향이었다.
빛무리가 한차례 지나가고, 그 빛 속에서 한 사람이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 주위로 마법사들이 칼과 지팡이를 들고 연구실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모습이었다.
“개자식! 죽여버려!”
“이게 며칠이나 공들여서 만든 마법인데!”
마탑의 보안 마법을 무단으로 뚫은 자를 응징하기 위해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나왔던 마법사들은 곧 엘렌을 발견하고 곧추세웠던 무기를 허물었다.
“마, 마탑주님?”
“하아…….”
또, 마탑주님이었어. 제대로 응징할 생각이었던 그들은 저마다 한 번씩 한숨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훌쩍거리기도 했다.
기껏 공들여 만들어둔 보안 마법이 하나의 마법사에 이렇게 허무하게 허물어진다니.
다시 재건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좋은 저녁, 다들 즐거워 보이네?”
엘렌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항의의 목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마탑주님, 저기에 멀쩡히 문 있는데 왜 거기로 안 오시고 마법을 쓰십니까!”
“맞아요! 저희가 얼마나 공들여서 만든 마법인데요! 훌쩍.”
엘렌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내 마법 하나에 보안이 깨질 마법은 없는 게 낫지 않겠어?”
“…@#@&$!!”
출신지가 다른 마법사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육두문자를 퍼부었지만, 그에 대해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엘렌은 태평하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한쪽 벽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벽에 올려둔 손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며, 주변이 벽 대신 창문으로 둘러싸인 방이 나왔다.
그곳에 안경을 쓴 채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가 바쁘게 펜촉을 움직이고 있었다.
“적자예요.”
그녀의 손이 뚝 멈추었다.
“적자.”
그녀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마탑의 재무를 관리하는 마법사, 에나였다.
“그러니까 누구든 털어와 주세요. 정말 누구나 상관없으니까. 돈만 가져오면 돼요.”
“누구였어?”
엘렌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문맥 없는 말이었지만 에나는 엘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뢰를 넣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