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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25화 (26/124)

25화

리카르도가 그녀를 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일하면서도 본 적 없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건강은 괜찮나?”

설마, 드디어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그녀를 안 본 며칠 사이에 계속 아일라의 얼굴이 아른아른 생각났다든가….

나는 약간 기꺼워진 기분으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괜찮아요. 공작님은요?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조심스러운 그녀의 고아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고운 옥이 굴러가는 듯했다.

그녀에게 사 입힌 때깔 좋은 옷까지 어우러지자 고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때, 남주라면 그가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칭찬 정도는 한마디 해 주지 않을까?

쇼핑을 끝내고 아일라와 함께 이곳에 온 이유는 다 이런 데에 있었다.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다행이군. 길지 않은 생이지만 건강 관리에 치중…….”

“고, 공작님! 차가 참 맛있네요!”

젠장! 그가 아일라에게 건강 얘기를 왜 꺼냈는지 이제 알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나는 다급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가 아직도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자칫 사람을 바보로 만들 뻔했다. 아니, 이미 만드는 중인가?

엘렌이 이 광경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마 그가 보았다면 이미 바닥에 나뒹굴며 웃고 있었을 테니까.

‘내가 왜 그딴 말을 지껄였을까.’

지금 갑자기 끼어든 나 때문에 분위기가 엄청 어색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과거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반성했다. 그러나 내뱉은 말을 도로 삼킬 수는 없는 법. 도대체 여주를 시한부 따위로 만드는 발상은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출처를 알 수가 없었다.

“……차가 입맛에 맞아 다행이군.”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으나 그는 다행히 내 무례를 짚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이 차는 카모마일인가요? 향긋하고 좋네요.”

“맞아요.”

이리저리 흘러가는 이야기 흐름을 좇던 아일라가 맞장구를 쳤다.

어쩌면 그녀는 회사원이 천직일 수도. 처음 비서로 채용했을 땐 사회생활을 해 본 적도 없는 그녀가 이렇게 눈치가 좋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저택엔 하사받은 최고급 차들이 많으니 갈 때 가져가면 되겠군.”

“어머, 저희가 그래도 될까요?”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지만요.”

리카르도가 하사받은 거라면 필히 황제가 줬다는 의미였다. 황실에서 선물한 차를 이때가 아니면 언제 마셔 보겠나.

‘그러고 보니 빌레드도 있었지.’

빌레드. 개미지옥 같은 황태자와 이상하게 얽혀버린 원흉이자, 아주 맛있는 차.

“아 참, 빌레드를 훔친 범인은 잡혔나요?”

나는 황태자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제도에 올라온 그는 명목상 황실의 명예기사단장이었기에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그의 손을 거쳐 간다 생각해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필히 그도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을 터.

내 물음에도 리카르도의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혹시 내가 황실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단 것에 의문을 느끼는 건가?’

“그 사실을 누구한테 들은 거지?”

역시 그런 거였군. 내가 말실수한 건가? 힐끗 분위기를 살폈다. 아일라는 옆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며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 누구가 황태자라고 말한다면 그녀 또한 이 사건이 황실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될 텐데.

그 때문에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말을 흘렸다.

“그게…….”

“안셀모인가?”

“안셀모, 라는 이름이 태자 전하를 이르는 말씀이 맞나요?”

나는 혹시 몰라 확인사살도 더했다.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삼자가 있는 데서 황실에서 일어난 사건이란 걸 말해도 되는 건가?’

응접실에 나와 리카르도, 단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점을 인식한 나는 입을 여는 것을 머뭇거렸지만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황실에서 황태자와 나눴던 대화를 간략히 설명했다.

“하…….”

리카르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를 감싼 공기도 한층 차가워졌다.

아까처럼 응접실은 고요했지만, 폭풍의 눈에 있는 듯한 불안한 고요함이었다.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혼란스러워진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을 내려놓은 소리가 거칠게 방을 울렸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요?”

황태자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황궁에서 누군가 빌레드를 훔쳤단 얘기였나 보군.”

“네, 맞아요.”

나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태자와 사촌 관계였으니 황태자가 그런 거짓말을 친 이유를 알 수도 있다.

엘렌을 시키면 편한 일이었으나, 불현듯 그가 알려준 ‘통찰’의 맹점이 떠올랐다.

-통찰은 황실의 피를 가진 사람에겐 통하지 않아. 직계라면 더욱.

‘엘렌이 리카르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게 이 이유 때문일 수도.’

그의 통찰이 무궁무진했다면 반란쯤은 누워서 떡 먹기가 될 것이다.

그런 일을 예방하기 위한 원작가의 큰 그림이었을까. 최소한의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귀찮은 걸 싫어하는 그가 반란을 꾀한다는 건, 생선이 육지에서 산다는 말만큼 괴리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고 회사를 방문했나.”

거의 확신에 가까운 말투로 중얼거린 리카르도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셀모와 어떤 일이 있었지?”

그의 질문이 조금 포괄적이었다.

황궁에 있던 일을 묻는 걸까. 회사에서 있던 일을 묻는 걸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하지만 나에게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예요.”

카시어스 가문에 관한 말을 꺼낼 수는 없으니까. 내 말에 리카르도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무슨 해를 당하거나, 문제가 생긴 건 없나.”

“…….”

그 또한 없다고 얘기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마치 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듯이.

“저 때문에 사장님한테 위험한 일이 생겼어요.”

“아일라.”

내가 그녀에게 눈치를 줬으나, 리카르도의 시선이 빠르게 옮겨졌다.

그의 눈빛에 위압감을 느낀 듯 아일라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멈추진 않았다.

아일라는 그날 회사에서 있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레니에 가문에서 저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사장님이 그걸 막아 주셔서…… 벌써 마탑의 암살 명단에 사장님의 이름이 올라 있어요.”

이야기가 끝으로 갈수록 울먹거림이 심해졌다. 나는 훌쩍거리는 그녀를 다독였다.

“왜 그런 중요한 걸 얘기하지 않은 거지?”

리카르도가 나를 향해 물었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게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나?

내가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자 리카르도의 미간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낮은 저음이 흘러나왔다.

“북부로 가는 건 조금 미뤄야겠군.”

“북부요?”

그의 중얼거림에 깜짝 놀랐다. 북부에 간다니,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그래, 본래라면 곧 떠날 생각이었지.”

그의 대답을 듣자 뭔가 원작이 대단히 어그러진 느낌이었다.

“무, 슨 일이 생겼나요?”

“오래 북부를 비워둘 수는 없으니 곧 귀환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약간 초조해진 나는 힐끗 아일라를 보았다. 그녀도 놀란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을 이어주기 위해선 필히 그가 제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어부지리처럼 그게 달성되었다. 나에 대한 암살 소식으로.

그런데 그가 나로 인해 북부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진짜 나 좋아하나?’

불쑥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가, 빠르게 숙연한 태도로 숙였다.

나를 유부녀로 알고 있을 리카르도가 호감을 가진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튼, 그가 북부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인 건가?’

그래, 아일라와 이대로 이어질 기회가 아직 죽지 않은 거니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처음 그가 북부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묘한 섭섭함도 들었다.

1년 동안 얼굴 좀 마주 봤다고 그새 정이 들었나.

일하면서 상담자에게 정이 드는 건 드물지만 없는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쪽은 거의 직원처럼 매일같이 사무실을 들락거렸는데 그새 정이 들었다고 이상할 건 없지.

그가 북부로 갈 생각이었다면 황궁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혹시 몰라 확인 차 물었다.

“만일 북부에 올라가신다면 연회에는 참석하고 가시는 건가요?”

그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었다. 그가 나를 응시했다. 질문의 요지를 캐묻는 듯한 시선. 그 요지를 알려주기엔 아직 타이밍이 일렀다.

“아니. 내일 중으로 올라갈 참이었다.”

미친. 다음에 오겠다는 연통을 넣을 새도 없었다. 이미 그때는 그가 북부에 있었을 테니. 순간 당황한 나는 대답으로 겨우 ‘아아…….’라는 의미 없는 감탄사만 내뱉었다.

아일라도 그의 말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왜 북부로 올라가세요? 공작님은 사장님을…….”

어음, 어음. 그녀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다람쥐처럼 금색 눈망울만 대구루루 굴렸다.

이제는 손까지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보고 무슨 얘기를 꺼낸 건지 알아차린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낭패였다.

‘아직도 남주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니!’

지난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그 당시 아니라고 극구 말했는데도 그녀는 여태껏 제 생각을 변함없이 지켜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낸 건 또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오늘 남주와 여주가 나란히 나를 괴롭히려고 작당을 한 게 틀림없었다.

“맞아요. 더는 결혼 상담은 안 받으시는 건가요?”

나는 아일라의 말을 대신 이었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그렇게 되는군…….”

뭐지. 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은?

그의 표정이 얕게 어두워졌는데 그 얼굴에 그런 표정을 지으니 퇴폐미가 물씬 흘렀다.

넋 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마귀야 물러가라!’라고 염불을 외며 애써 그가 왜 일정을 바꾼 건지 이유를 생각했다.

그도 나를 오래 보았다고 그간 정이 든 걸까?

아니라면, 내가 암살당할 위험에 있다는 말에 북부로 가는 일정을 바꾸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괜히 그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 같아 미안해졌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에겐 남은 용건이 있었다.

황궁 연회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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