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에르도안 가문의 보좌관인 펠릭스가 안경알을 전용 닦이로 닦으며 리카르도 앞에 서 있었다.
“구원받으실 겁니다.”
그 말을 하는 펠릭스의 얼굴은 누구보다 후련해 보였다.
“구원 같은 거 바란 적 없다.”
리카르도가 서류에 시선을 둔 채 건조한 얼굴로 대꾸했다.
“세상에 좋은 분은 많습니다.”
물론 이미 결혼한 분은 예외입니다. 윤이 나는 안경을 쓰며 펠릭스가 덧붙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 저는 채비를 꾸리러 물러나겠습니다.”
차갑게 무시하는 그의 반응에도 펠릭스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한심하군.”
그 말은 리카르도, 그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여자 하나에 휘둘리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냉정한 객관화에도 리카르도는 오필리아를 완전히 생각에서 씻어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검은 속눈썹이 드리워졌고, 심연을 품은 푸른 눈동자는 더욱 어둠으로 침잠했다.
아주 옛날. 어쩌면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
극히 말이 없던 아버지와 옆에서 조용하며 다정했던 어머니.
어릴 적에 그 둘을 보고 있으면 불투명했던 미래를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온 리카르도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오필리아가 내밀었던 결혼 계약서. 거기에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던 이름.
아일라 레니에.
그 아래로 몇 번이고 지웠다가 썼던 흔적이 보였다.
계약서의 내용은 그가 기존에 원하던 조건과 딱 맞아떨어졌다.
마치 그의 생각을 훔쳐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그 조건도 오필리아를 만나면서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째깍.
사무실에 초침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그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북부로의 귀환 일이 한 걸음씩 가까워지기 때문인지.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간격이 일정한 것을 봐선 보좌관 펠릭스의 노크였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다.
그러자 불퉁해진 펠릭스의 표정이 보였다.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무슨 일이지? 안셀모가 호출했나?”
그렇게 추측한 리카르도가 눈썹을 찡그렸다. 성가신 일이 생겼군.
“바쁘다고 전달해.”
어떤 일로 바쁘다는 건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핑계를 찾아야 할 펠릭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평소라면 늘어난 일에 한숨을 쉬었을 그가.
리카르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아졌다.
“누가 왔는지 말해라.”
그의 물음에 펠릭스가 딱딱히 대답했다.
“……별로 중요한 손님은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 온 건 맞단 얘기군.”
리카르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만나 보지.”
“각하!”
펠릭스의 부름에도 리카르도는 거침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맹수 같은 움직임에 그가 막을 새도 없었다.
“……하아. 이걸 어쩌지.”
사무실에 홀연히 남아버린 펠릭스는 늘 품에 넣어두고 다니는 휴대용 성경을 꺼내며 기도했다.
“자비로운 분이시여. 부디 불쌍한 종을 헤아려 그분을 타락의 길에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독실한 신자의 기도가 닿았을지.
그것은 하늘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 *
아일라는 아직도 노란 모자를 벗지 않고 공작저의 내부를 감탄 어린 얼굴로 구경했다.
이곳에 오기 한참 전, 엘렌은 일이 생겼다며 사라졌다.
“그 모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네!”
아일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나도 따라 웃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지금 우리는 나들이를 왔다가 황제가 리카르도에게 하사한 저택이 근처라는 사실을 깨닫고 방문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었지만, 한편으론 리카르도가 며칠째 회사에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다.
매일 보던 사람이 갑자기 안 보이면 걱정되는 건 당연하니까.
나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내 행동의 정당성을 찾는,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제일 큰 이유는 황궁 연회의 초대장이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으나 자신을 공작의 보좌관으로 소개한 남자는 친절했다. 리카르도보다 따뜻한 색을 띠는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북부의 차가운 얼음 바다 같은 느낌이라면 보좌관 쪽은 따뜻한 봄의 하늘이 떠올랐다.
응접실에 안내한 그는 공작님께 얘기를 전달하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와…… 공작님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엄청 크네요.”
단둘이 응접실에 남자 아일라가 작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누가 대화를 듣는 것도 아닐 텐데, 과하게 조심스러운 그녀의 행동이 조금 귀엽게 느껴져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짜 공작님이 사시는 곳을 보면 많이 놀라겠어요.”
내 대답에 아일라의 눈이 커졌다. 그리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사장님은 북부에 있는 공작성에 가 보신 적 있으세요?”
그리고 이어진 물음에 나는 마시던 차가 사레 걸릴 뻔했다.
“거기 성에 괴물이 나온다던데 정말인가요?”
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오죽하면 그런 소문이 돌았을지.
‘그 냉동인간.’
누구든 리카르도를 마주하면 그가 괴물들이 나오는 성에 산다는 소문을 사실마냥 놀랍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다.
“괴물은 없고 굉장히 아름다운 성이에요.”
아일라의 얼굴에서 호기심을 발견한 나는 원작 소설에서 읽은 대로 공작성에 대해 말해주었다.
연한 하늘색의 공작성은 아침에 여명이 다가오면 하얀색처럼 보여 얼음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그곳에 어울리는 성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설인이라는 종족이 일하고 있었다.
얼음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종족.
하여 공작성 안에서 일하는 설인으로 인해 얼음요정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귀신에 씐 성이라든가 괴물이 나오는 성이라든가 가지각색의 소문이 꼬리처럼 붙어 버리고 말았다.
“설인, 얼음 정령…….”
아일라의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몽환적인 동화를 들은 듯한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이어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한번 보고 싶어….”
나도 홍차를 마시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같이 조용히 차를 마시던 아일라가 다시 말을 걸었다.
“사장님은 직접 보신 건가요?”
“저도 듣기만 했어요.”
‘정확히는 읽은 거지만.’
북부에 있는 설인. 인간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지만, 소수 종족으로 인간들에게 핍박을 받아 반강제로 북부에 살게 된 이종족이었다.
몇백 년의 억압 때문이었을까.
꾸준히 누적된 분노에 그들은 결국 폭주하고 만다. 그러면서 마물을 막기 위해 세워둔 얼음장벽을 무너뜨리는 계획을 세워 큰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이유는 아일라가 리카르도와 결혼하고 북부로 올라간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공작성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설인과의 전쟁.
뒤에는 그런 사건들만 이어지기 때문에 한번 보러 가고 싶다는 아일라의 말에 멋쩍은 기분만 들었다.
그런데,
‘아일라가 없다면 그 전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순간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 걱정은 설인의 힘을 잠재울 방법에서 기인했다.
설인의 힘은 고대의 마도구로 봉인할 수 있었다.
문제라면 이 고대의 마도구를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렇다. 소설을 깨나 읽어 본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듯, 그건 아일라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유가 뭐냐고?
원작자가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여주를 돋보일 장치로써.
하여 전쟁은 리카르도가 혼자서 잠재운 게 아니었다. 어쩌면 아일라의 역할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말은 나 같은 엑스트라가 백날 마도구를 휘둘러 봤자 설인의 얼음 폭풍에 종잇조각마냥 날아간다는 얘기였다.
“서럽다 서러워…….”
“네?”
내 혼잣말에 놀란 눈을 한 아일라가 물었다.
“아일라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질문에 아일라가 잠시 고민했다.
“……예전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은 잘 안 해요.”
“지금은 왜요?”
물론 긍정적인 마인드가 좋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비밀이에요!”
아일라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장님은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가요?”
“태어날 때부터 자주 그런 생각을 했어요.”
본심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그 생각을 성인이 되기 하루 전, 현실로 마주했다.
그날은 남동생이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아…….”
아일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나를 힐끔 보는 것을 보아선 내 이야기가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나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일라에겐 나에 대한 걸 일부분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여자주인공이니까.
“사실….”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말을 멈춘 나는 문에 시선을 옮겼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리카르도였다. 원래도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안색이 안 좋았다.
그러나 여전히 입술은 핏빛처럼 붉었다.
헌혈이 시급한 뱀파이어 같은 그의 얼굴을 보자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해요, 공작님. 바쁘신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실례를…….”
“괜찮다.”
리카르도의 대답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빨리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뜨라는 신호인가?’
그렇다면 다음에 찾아오는 게 낫겠지. 초대장을 받으려면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를 보던 아일라도 나를 따라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났다.
“나중에 따로 연통을 넣고 방문할게요. 공작님.”
리카르도의 눈썹이 올라갔다.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당황……?
“난 상관없다. 앉지.”
그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괜찮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왔으니 정말 괜찮은 거려나.
나는 그의 말대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왠지 문 앞에 서 있는 리카르도가 조금 어색해 보였다.
“공작님도 앉으세요.”
“…….”
그는 내 말에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그가 내 맞은편에 앉았기에 자연스럽게 아일라와 리카르도가 나란히 앉게 되었다.
아일라가 먼저 어색한 미소로 인사하자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주얼은 환상의 커플이지만, 분위기는 정모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나란히 앉게 된 상황과 흡사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색한 두 사람의 모습에 탄식이 흘렀다. 이것도 내 탓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