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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23화 (24/124)

23화

“그래요.”

이쯤 하자. 이 이상 신파극이 슬슬 부담스러우던 차였다. 아일라는 마지못한 듯 나에게 이끌려 갔다.

물론 이것도 연기겠지만.

이사벨라를 따라가자 작은 문이 보였다. 짐작건대 아주 높으신 분들을 받기 위한 특별 룸이거나 옷을 만드는 작업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사벨라가 앞서 문을 열자 만들다 만 옷들이 보였다.

추측한 대로 후자였다.

‘그런데 옷감 없다면서.’

여기에 평소 내가 입던 옷의 재질과 비슷한 옷들이 한 아름이었다.

-탁.

나와 아일라, 그리고 엘렌이 들어오자 이사벨라가 문을 닫았다. 내 눈과 마주친 이사벨라가 살짝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부인.”

“사과는 영애에게 해야죠. 이사벨라.”

“……죄송합니다, 레니에 영애.”

“괜찮아요.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아일라는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말투가 이사벨라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녀의 안색이 새빨갛게 변했다.

안 그래도 밖의 시선에 곤욕이었는데,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눈물이 싹 마르다니.

이로써 이 자리에서 방금 아일라의 행동이 사실 이사벨라에게 엿을 먹이기 위한 연기였던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사벨라에겐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제가 일부러 그런 줄 아시나 보네요?”

“그럼요?”

내가 재빨리 받아쳤다. 그러자 이사벨라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말실수한 탓에 그녀의 얼굴은 낭패감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아일라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이 또한 그녀의 의도임이 틀림없다.

역시 주인공이라 그런지 적에겐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러나 이사벨라가 아무리 입을 다문다고 한들 우리에겐 소용이 없었다. 왜냐면 우리에겐 엘렌이 있었기 때문이다.

힐끔 순진한 표정으로 여기를 바라보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무해한 듯 보이는 이 아이는 이사벨라의 흑역사까지 알고 있을 상태일 것이었다.

‘내 편이라 다행이지.’

엘렌이 나의 적이었다면…….

이 세상에 내 흑역사란 흑역사는 모두 까발려졌을 것이다.

정말이지 끔찍하네.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 때문이군요.”

“…….”

그녀의 말에 이사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일라의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하아…….”

아일라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얼굴이었다.

소설 원작을 알고 있는 나는 그녀의 출가가 진정 가문과의 단절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건 새 발의 피에 불과했지.

“저희 입장도 부디 생각해 주세요. 부인이라면 잘 아시지 않나요.”

“용서받고 싶으시죠?”

난데없는 내 말에 이사벨라가 의문스러운 낯을 띠었다.

“용서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에게 내가 단호히 말했다.

“그러면 황궁 연회에서 입을 누구보다 제일 화려한 드레스를 뽑아 주세요. 레니에 영애에게 어울릴 만한 것으로요.”

아일라를 빠르게 가문과 단절시키는 방법은 사교계 데뷔뿐이었다.

대외적으로 아일라를 데뷔시킨다면 바로 화제의 중심이 될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레니에 후작 부인도 아일라를 공개적인 장소에선 건들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데뷔를 장식할 연회는 크면 클수록 좋겠지. 몇 주 뒤에 열리는 황궁 연회가 적격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이사벨라가 놀란 얼굴을 했다. 동시에 갈등하는 눈치였다.

“사장님!”

내 폭탄선언에 아일라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나는 그에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문제 있나요?”

“거길 제가 감히 어떻게 참석을…….”

“영애도 후작 영애인데, 안 될 게 뭐가 있나요?”

“하지만 저는 연회 초대장도 없어요.”

“당연한 소리죠. 저도 초대장이 없는걸요.”

내 말에 아일라의 눈에 의문이 가득했다.

“하지만 초대장이 차고 넘치는 사람은 알아요.”

“누구, 아! 설마…….”

눈치 빠른 그녀가 내 속을 읽은 모양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황태자 전하?”

“맞…… 아뇨?”

그녀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나는 구겨지려는 표정을 바로 폈다.

황제의 조카인 리카르도를 염두에 두고 얘기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일라의 말을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아일라에 대한 호감을 이용해 황태자에게서 초대장을 얻는 게 더 쉬울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찝찝했다.

내 과거사를 알고 나를 조종하려 드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

괜히 약점 하나 더 쥐여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작달막한 손이 나를 툭툭 건드렸다. 자연스럽게 내려간 시선의 끝엔 엘렌이 있었다.

그가 과자를 들지 않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가?”

“응.”

네가 황궁 연회 초대장을 구해줄 수 있다고?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해 준다면 이야기는 편해지지만…….

어떻게 초대장을 구한다는 거지?

“잘?”

엘렌의 말에 나는 기대를 팍 꺾었다. 어디서 훔쳐 오기라도 하겠단 말이겠지. 아니면 이것과 비슷한 일이라도 벌일 게 분명했다.

“사양할게.”

“그런 거 아닌데, 아마도?”

역시 대답이 시원찮았다.

“그럼 출처는 확실해?”

“아니.”

“…….”

이사벨라와 아일라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도통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는 눈치였다.

“알렉스가 과자를 먹고 싶은 모양이에요.”

“과자는 없지만, 사탕은 있는데 괜찮을까요?”

이사벨라가 말했다.

“주면 감사하죠. 알렉스, 뭐 하니.”

알렉스가 된 엘렌이 다소곳하게 인사하며 사탕을 받았다.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요?”

엘렌이 사탕을 먹는 동안,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사벨라의 표정이 굳었다.

“불가능합니다. 백작 부인.”

“마담 이사벨라, 전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감사한 말씀이지만 이번 일만큼은 제 능력 밖의 일이랍니다.”

레니에 후작 부인의 입김이 세긴 센 모양이었다.

첫 단추부터 끼우는 게 쉽지가 않네.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라고….”

이사벨라가 나에게만 들릴 만치 작게 속삭였다. 갑자기 나온 윗사람 얘기가 그녀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러자 작은 돌파구가 보였다.

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지금은 거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제가 요즘 웨딩 플래너 사업도 생각하고 있거든요.”

먼저 미끼를 던졌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혼 중매 사업이 바빠지면서 잠시 순위에서 밀려난 사업 아이템이었다.

지금은 모든 사업이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슬슬 사업을 확장시킬 생각을 했으나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웨딩 플래너요?”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바로 입질이 왔다. 이사벨라도 나와 같이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네. 약혼에서 나아가 결혼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제가 관여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사벨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혼을 치르는 새신랑과 새신부의 옷은 값이 만만치 않았다. 내 제안을 승낙하면 차후 사업에서 손님들에게 부티크를 연결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사이에 나와 그녀의 사이엔 미묘한 시선의 끈이 당겨졌다가 놓이길 여러 번.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마침내 이사벨라의 대답이 떨어졌다.

모호한 말의 내용과 달리 말투는 거의 승낙에 가까웠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 같은 사람이 내 제안을 거절할 리가.

“그러면 잘 부탁해요.”

역시 사업은 인맥 빨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이사벨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여러 옷을 구매하고 가게를 나서는 길에 노란 모자를 쓴 아일라가 말했다.

“사장님, 제가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할지……. 이 빚은 평생 갚아도 모자랄 거예요.”

가게에서 내가 골라 사준 모자는 예상대로 아일라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사실 어떤 모자를 사줘도 모두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녀는 모자를 매만지며 작게 미소 지었다. 어수룩하게 쓴 노란색 모자 아래에 은색 머리카락이 귀엽게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저것들 얼마 안 해요. 아일라가 한 달만 일하면 금방 갚을걸요?”

“혹시 비서 하나 더 둘 생각 없어?”

엘렌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없는데 왜?”

“그냥…….”

엘렌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졌다. 내가 돈맛을 봤을 때랑 비슷한 얼굴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아뇨. 이런 건 돈으로 갚을 수 없을 거예요.”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일순 짙어졌다가 연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요.”

혹시 그 보답이 커피라면 사양할게요, 아일라.

“아일라가 제 옆에 있는 거로 충분해요.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마세요.”

“혹시… 천사이신가요?”

아일라의 비유에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유쾌하게 웃으려고 했는데, 그녀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나는 머쓱하게 미소를 지우며 대답했다.

“아니요.”

덩달아 진지해진 내 말투에 엘렌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천국에도 여러 종류의 천사가 있으니까.”

“난 무슨 종류인데?”

아직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은 엘렌은 작은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음…….”

그사이, 아일라에게 물었다.

“모처럼 옷도 샀는데 나들이나 하러 갈래요?”

내 제안에 아일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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