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22화 (23/124)

22화

카롤라 부티크.

제도의 한가운데 있는 이 커다란 규모의 의상실은 명망 있는 가문의 사모님들도 자주 들리는 핫플레이스였다.

우리들은 엘렌의 마법으로 부티크까지 단 5초 만에 도착했다.

결혼을 앞둔 자녀들을 둔 부인들도 많아, 그들을 손님으로 포섭해야 하는 나도 애용하는 가게였다.

“없어.”

엘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카시어스 공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미리 엘렌에게 확인해 달라 부탁했다.

원래라면 확인하지 않고 들어갔겠지만, 황태자와의 대화를 떠올리니 확인하지 않고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부티크는 거의 단골인 나에겐 익숙한 장소였지만, 그렇지 않은 이가 하나 있었으니.

나는 아일라를 힐끗 보았다.

화려한 옷들에 휘둥그레진 아일라는 단연코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손님이었다.

여러 의미로…….

낡아빠진 구두와 밑단이 해지다 못해 헐어 있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불협화음처럼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쏟아지는 시선이 아일라는 부담스러운지 내 뒤에 살짝 서 있었다.

“왜 오필이 영애의 옷을 사주는 거야?”

이곳은 중앙 귀족의 부인들도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기에 시선을 의식한 엘렌은 푸른 머리의 어린아이로 외형을 바꾼 상태였다.

만약 결혼도 안 한 알렉산드로 대공의 아들과 백작 부인이 나란히 부티크에 들어온다면?

듣기만 해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동시에 나는 속이 뒤집힐 것이다.

엘렌의 물음에 나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러게. 원래라면 이것도 남주가 해야 되는데…….”

내가 왜 남주 대신 이러는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으니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지.

“오늘은 오필의 마음을 나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엘렌이 내 뒤에 숨어 있는 아일라를 보며 나에게 속삭였다.

“지금 어미 닭이랑 병아리 같아.”

전후 관계가 선명한 비유였다.

내가 어미 닭, 병아리가 아일라란 말이겠지.

“…….”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말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나도 내심 그런 생각을 했거든.

내 생각을 읽은 엘렌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녹음을 담은 듯한 연둣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 모습이 짓궂은 장난을 꾸미는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 모습이 엘렌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자신의 허리께에 닿는 엘렌을 아일라도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주인인 마담 이사벨라가 있는 방향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마담 이사벨라.”

“어머, 마르그리트 부인.”

다른 부티크 손님들과 이곳을 보던 마담 이사벨라가 미소를 지었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나도 아마 일할 때 저런 미소를 짓겠지.

“저분은…… 레니에 후작 영애 맞죠?”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닿았나.’

빠르기도 하네. 하지만 레니에 후작 부인이 회사를 다녀간 시점에서 제도에 소문이 퍼질 것이란 건 거의 예견된 일이었다.

“네, 맞아요.”

이사벨라의 눈빛이 변했다. 표정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언뜻 아일라에 대한 연민처럼 보이나, 그게 아니었다.

‘저런 골칫덩이를 맡다니, 네 처지도 불쌍하네.’

딱 이 표정인데.

내가 엘렌을 힐끗 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 추측이 맞다는 뜻이었다.

“어머. 이 꼬마 신사분은?”

“제 먼 친척 조카랍니다. 알렉스, 인사해야지?”

입에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알렉스라는 이름마저도 내가 만든 이름이었다.

“안녕하세요. 알렉스라고 해요.”

몇 초 만에 급조한 이름인데 퍽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내 속을 읽은 모양인지 엘렌은 씨익 웃었다. 그가 웃는 걸 본 이사벨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귀여워라.”

“감사합니다.”

능숙하게 카멜레온처럼 어린아이 행세를 하는 엘렌을 뒤로하며, 나는 아일라에게 필요한 옷들이 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외용으로 입을 드레스 5벌, 활동성 좋은 옷으로 5벌, 잘 때 입을 옷 5벌…… 그리고 또 필요한 옷이 뭐지?”

“잔디에서 뒹굴 때 필요한 옷?”

엘렌의 개소리를 무시하며 나는 이사벨라에게 말했다.

“일할 때 입는 옷도 5벌 정도 있으면 괜찮겠지. 이사벨라, 제가 말한 옷들만 준비해줘요. 제 뒤에 있는 영애에게 어울릴 만한 옷으로요.”

“사장님…… 그렇게 많은 옷은!”

“내가 사는 거니까 마음 놓고 입어요. 레니에 영애.”

이목을 의식한 나는 호칭을 바꿔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

공손히 대답한 이사벨라가 옷을 고르러 간 사이, 아일라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는 그냥 구경만 하러 오는 줄 알고…….”

“호랑이가 앞에 떡 놔두고 구경만 해요?”

“떡이요?”

생소한 단어에 아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차,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내 말 습관을 이해할 사람은 엘렌밖에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

“그게… 옛날 동화에 호랑이가 떡을 좋아하는데…….”

이거, 해명하면 할수록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엘렌은 킥킥, 웃고 있었다.

“영애는 떡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아일라가 눈동자를 굴리며 뺨을 붉혔다. 자신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실제로 떡이 있는 줄 착각하는 낌새였다.

나는 그냥 상징적 표현이라고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그사이, 이사벨라가 옷을 가져왔다. 조금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기다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반색할 일이었지만, 이건 별로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설마, 하는 걱정에 나는 그녀가 들고 온 옷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최고급만 취급하는 부티크의 명성과는 사뭇 다른 감촉이었다. 이런 옷감은 백작저의 식솔들도 입지 않는 최하급이었다.

“여기서 이런 옷도 취급하나요?”

분노가 치밀기보다는 순수한 궁금증이 먼저였다. 이건 여주에게 고난과 역경을 주기 위해 주변에서 짜고 치는 판이라고 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죄송해요. 백작 부인. 저희도 마침 옷감이 다 떨어져서 최대한 괜찮은 옷들로 가져왔답니다.”

나는 힐끗 엘렌을 바라보았다. 건조한 미소로 이사벨라를 보던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짐작하던 대로였다.

새빨간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다니.

그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장사 좀 한다는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하는 건 대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조금 의외다 싶었다.

명성 자자한 부티크의 주인인 이사벨라가 이런 하수나 하는 짓을 저지를 줄은.

“이런 옷을 보려고 들른 게 아니란 거, 잘 알잖아요.”

그렇죠, 이사벨라?

내 목소리가 가게 안에 날카롭게 퍼져나갔다. 자연스럽게 이목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내가 의도한 바였다.

아무리 신분의 고하를 따지는 귀족들이라도 대외적인 곳에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사장님… 저는 이런 옷도 괜찮아요.”

오히려 안절부절못한 건 아일라였다. 그러자 이사벨라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공략할 대상을 바꾼 것이었다.

“죄송해요. 영애. 이보다 좋은 옷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오늘 하필 옷이 없어 유감스러운 마음뿐이랍니다.”

“아니에요. 옷이 없으면 어쩔 수 없죠.”

아일라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대답을 하는 그녀 또한 석연치 않은 듯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래, 후작저에서 눈칫밥만 몇 년이던가.

아일라도 사실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왜 이런 부당한 상황에 가만히 있는 걸까.

소설 속에서 사이다만 주었던 여주는 어디로 간 건지 의문이었다.

“사장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전 좋은 곳 구경시켜 주셔서 감사할 따름인걸요.”

그 말에 주위에 있던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이상함을 감지한 내 눈빛도 묘하게 변했다.

‘이거 설마…….’

“이런 옷도 저한텐 감지덕지니까요.”

가만 보니 아일라의 목소리도 나 못지않게 제법 컸었다. 약간 우울한 낯빛을 띤 아일라는 누구보다도 처연하고 불쌍해 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가련한 미소까지.

“…….”

나는 말 없이 슬쩍 이사벨라의 안색을 확인했다. 역시나 상황을 인지한 그녀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상황이 명확해졌다. 웃음이 비죽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같은 장사꾼의 처지에서 이런 상황이 얼마나 난처한 건지 잘 알고 있지.’

엘렌도 흥미를 느낀 얼굴로 과자를 먹으며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과자는 어디서 가져온 거지.

“하나 줘?”

‘아니.’

그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볍게 그의 제안을 거절한 나는 아일라와 이사벨라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이사벨라의 가면이 서서히 깨지는 게 아주 볼 만했다.

과연 여자주인공.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가만히 있으면 섭섭하지.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그녀에게 말했다.

“아일라,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어딘가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말이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 왜 소름이 돋지?

아일라가 내 말에 감동을 먹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내 회사를 걸고 보증하는데, 저거 연기다.

“사장님…….”

그녀가 뚝뚝,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짐짓 그녀를 따라 나도 순간 울컥할 뻔했다.

연기임을 망각할 만큼 애처롭고 불쌍한 자태였다.

이미 소란스러웠던 가게 안은 그녀의 눈물로 인해 더욱 시끄러워졌다.

엘렌이 과자를 먹는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재밌냐.’

하지만 이쪽도 피차일반이었다. 나는 아일라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했다.

“아일라, 울지 마세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울고…….”

“잠시 두 분, 저 좀 따라와 주시겠어요?”

고개를 돌려 이사벨라를 보니 그녀의 안색이 거의 흙색에 가까웠다. 어째 이쪽이 더 불쌍해 보이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