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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21화 (22/124)

21화

“어머, 커피가 비었네요. 아일라.”

리카르도의 찻잔이 비어 있는 걸 본 나는 아일라를 불렀다.

그녀가 ‘네~’ 하고 리카르도의 찻잔을 가져갔다. 찻잔에 끈적이는 시선을 보내는 그를 보자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커피 취향 한번 독특하네.’

황태자조차 입에 대지 않던 커피를 원샷하다니. 맛은 둘째치고 목구멍이 뜨겁지도 않나?

“누가 다녀갔나?”

뒤편 책상에 놓인 찻잔을 본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마시고 간 찻잔-여전히 한 입만 마신 듯 양이 남아 있었다-을 잊어 버리고 치우지 않은 상태였다.

‘말해 버릴까.’

황태자가 자신이 다녀갔다는 걸 비밀에 부치라는 말은 없었다. 그렇다면 리카르도에게 말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사실 내담자에 대한 건 다른 내담자에게 절대 말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리카르도에겐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황태자와 사촌지간이었으니 그라면 황태자가 이곳에 오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다가 도로 고이 접었다. 리카르도가 여주도 아닌 나를 위해서 황태자에게 무슨 말을 해준단 말인가.

“태자 전하께서 다녀가셨어요.”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었다. 일말의 기대와 함께 단조로운 말투로 아까 일을 입에 올렸다.

“……안셀모가 다녀갔단 말인가?”

본래 표정 변화가 미미한 리카르도의 얼굴에 처음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생겼다. 얼음으로 된 조각에 금이 간 듯한 느낌이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차가워진 공기 속에 아일라의 발랄한 목소리가 뚫고 들어왔다. 그녀는 리카르도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곧 차가워진 분위기를 눈치챈 그녀의 눈동자가 대구루루 돌아갔다.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일라는 ‘혹시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는 뜻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어 리카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봐야겠군.”

“어머, 벌써요?”

요즘 따라 빨리 사무실을 떠나네.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오늘도 그와 아일라의 관계 진척은 그른 느낌이다.

심지어 아일라가 고생해서 갓 내린 따끈한 커피를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커피는 다 마시고 가시는 게….”

라고 말을 잇는데 어느새 리카르도는 사무실을 나가 사라진 상태였다.

음, 그렇게 바쁜 일이 생겼나.

* * *

“그곳엔 왜 갔습니까.”

“글쎄? 그게 궁금한가?”

안셀모는 홍차를 한 입 머금으며 음미했다.

익숙한 차향이었다.

리카르도의 짙고 검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더욱 흉흉해진 눈빛에 안셀모가 ‘하하, 그러다 사람 죽이겠군.’ 하는 태연스러운 반응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한잔 들지 않겠나? 이게 보기와 다르게 꽤 귀한 홍차라네.”

홍차가 담긴 찻잔을 천천히 흔들자 작은 파문이 생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셀모가 말을 이었다.

“땅에서 자란 찻잎이나 바다향이 난다고 해서 ‘빌레드’란 이름이 붙었지. 나조차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마실 수 없어.”

“…….”

리카르도는 대답 없이 조용히 안셀모를 바라보았다. 찻잔을 잡은 안셀모의 손이 살짝 떨렸다.

‘미쳤군.’

아주 잠깐 리카르도의 기운을 받아냈을 뿐인데 그의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반듯하던 안셀모의 미소가 일순 뒤틀렸으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였다.

“그렇게 궁금해 마지않으니 알려 주는 게 도리겠지.”

“…….”

“부부 상담을 받고 싶어서 방문했네.”

“중매 회사에서 상담을?”

“거기 사장이 꽤 돈을 좋아해서 딱 내 취향이더군. 쓸데없이 복잡한 사람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미소를 매단 채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은 안셀모는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리카르도의 기색을 살폈다.

살갗이 에일 듯한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호위를 선 기사 중에는 기운을 이기지 못해 다리가 살짝 흔들리는 이도 있었다.

-똑똑.

그때, 작은 노크 소리가 응접실의 내부에 크게 울려 퍼졌다.

노크 소리도 잠시.

안에 있는 사람의 허락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이어서 한 여인이 방 안에 들어왔다. 그녀의 몸짓에 따라 붉은 레이스가 퍼졌다가 모여들었다.

흡사 하얀 융단 위에 붉은 꽃잎이 흩어지다가 모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에테르나 솔 고티에 클로비스.

고티에 제국의 황녀이자, 클로비스 제국의 황태자비였다.

“제가 두 분의 대화를 방해했나 봐요?”

사뿐사뿐. 방에 들어온 그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고티에 황녀.”

안셀모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를 본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공은 여전히 고티에의 군인보다 더 딱딱하네요.”

“…할 얘기는 끝난 듯하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리카르도를 막은 건 에테르나였다.

“마침 저도 에르도안 공작에게 용건이 있었답니다.”

“황녀는 나를 보러온 게 아니라, 공작을 보러온 것 같군요.”

“섭섭하신가요?”

“섭섭하길 바라나요?”

안셀모가 능글맞은 미소로 대답했다. 에테르나는 그 미소에 화답하듯 화려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건 솔직히 말한답니다. 고티에 제국에선 돌려 말하는 이를 밴댕이 소갈머리라고 부르기도 하죠.”

“하하, 그런가요?”

듣는 이도 난감해지는 웃음소리였다.

‘또 시작이군.’

난데없이 시작된 그들의 부부싸움은 황궁 사람들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리카르도가 입을 열어 중재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태자비 전하.”

“에르도안 공작. 황궁 연회에 참석하시나요?”

“…….”

리카르도의 미간이 좁아졌다. 황궁 연회는 파트너와 같이 참석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에테르나의 질문은 그에게 참석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닌, 파트너의 유무. 더 나아가 약혼녀의 유무를 물어보는 것에 의미가 가까웠다.

리카르도는 단 한 사람을 떠올렸으나 동시에 떠올린 다른 남자로 인해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이 감정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종류였다.

물론 보좌관 펠릭스가 그 모습을 보면 ‘그게 바로 질투입니다. 공작님.’이라고 지적했겠지만, 그 유능한 보좌관은 하릴없이 저택에서 청소나 하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리카르도는 내심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에르도안 공작?”

“안 합니다.”

에테르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예상대로. 자신이 바라던 대답이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의 탄신일과 연관된, 중요한 연회인데 빠지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에테르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홀로 참석해도 황제 폐하께서 흔쾌히 환영하실 거예요. 탄신일에 귀애하는 조카를 못 보시는 것보단 훨씬 낫죠. 그렇죠, 태자 전하?”

그녀의 의중을 짐작한 안셀모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폐하께서도 공이 없다면 서운하실 거네.”

“그땐 북부에 있을 겁니다.”

리카르도가 딱 잘라 말했다.

“영명하신 폐하께선 저보다 나라의 안위를 바라실 게 틀림없습니다.”

오필리아에 대한 황태자의 관심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간의 황태자의 성품을 본다면 더더욱.

그리고 그 관심은 바로 리카르도, 그 자신으로부터 기인했을 터였다.

그 사실을 직감한 리카르도는 처음으로 포기를 택했다. 그녀를 위해.

* * *

어느덧 아일라가 온 지 한 달이 지나 겨울의 막바지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안 오지.’

레니에 후작 부인 이후로, 꼬박꼬박 정시에 출근(?)하던 남주가 다시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워낙 유명한 인사라 그가 바쁜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외려 이렇게 꾸준히 아침마다 회사에 상담을 받으러 온 게 이례적인 일이었지.

신기한 건 리카르도의 발길이 끊긴 이후로 황태자 또한 이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거금인 20만 실링은 그냥 선물이었던 건가? 가문 일까지 꺼내며 극구 이곳에 오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던 황태자가 이렇게 쉽게 발길을 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뭔가 찝찝하단 말이야.’

물론 더 찝찝한 건 1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담을 하러 방문했던 사람이 오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안 오시네요.”

“그러게요. 무슨 바쁜 일이 있나 봐요.”

“미리 커피도 타 놓았는데…… 식기 전에 얼른 오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아일라의 말에 커피가 든 잔을 보았다. 에르도안 공작과 황태자를 제외하곤 다른 손님에겐 커피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놓은 상태였다.

따끈한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조금 어색해진 아침의 여유에 신문이나 볼까, 책상을 살피는데 갑자기 종이 향이 훅, 내 코를 때렸다.

마탑의 도서관에 내내 박혀 있다가 나온 엘렌이었다.

“올 때는 예고 좀 하지? 노크 몰라?”

“똑똑.”

“누가 입으로 노크를 하래?”

“푸흐흐.”

우리의 대화를 듣던 아일라가 옆에서 웃었다. 종종 손님이 없을 때, 그가 이렇게 사무실에 등장한다는 걸 알고 그녀도 이 상황을 익숙하게 대했다.

“앗. 마침 잘되었네요!”

아일라가 반색하며 그녀가 탄 커피를 내밀었다.

“커피 좀 드실래요?”

“그래, 커피 한잔하고 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던 엘렌이 사뿐히 내려와 커피 앞으로 다가갔다. 킁킁 냄새를 맡은 엘렌이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흘긋 보다가 재촉 어린 내 시선을 받고 커피에 입을 댔다.

“콜록.”

그가 커피를 마시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엘렌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이거 누구 죽이려고…….”

말하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겠네.”

“앗, 그 정도인가요?”

아일라가 쑥스럽다는 듯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이게 터울 많은 막내 여동생을 돌보는 느낌일까.

“콩깍지가 제대로 씌워졌구나. 오필.”

라고 엘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못 들은 것으로 치부했다.

아일라가 뿌듯한 얼굴로 다른 커피를 타러 다과실에 들어가는 사이, 그에게 속삭였다.

“남주 좀 본받아봐. 그분은 이 커피가 맛있다고 원샷했어.”

원샷이란 말에 아리송하게 변했던 그의 표정이 내 머릿속을 읽었는지 안타깝다는 듯 변했다.

“먹기 괴로우니까 원샷한 거 아니야?”

“설마……. 아닐 거야.”

리카르도의 성격을 떠올린 나는 더욱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별로라면 별로라고 말하지 않았겠어?”

“……그렇겠네.”

엘렌이 수긍했다. 그렇지. 나는 리카르도가 시원하게 뜨거운 커피를 마시던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남주답게 리카르도는 배포도 컸다.

“엘렌, 오늘 시간 있어?”

“응? 나?”

엘렌의 풀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꼬리도 없는데 강아지마냥 꼬리를 흔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응. 오늘 아일라랑 옷 사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앗. 멈췄다. 보이지도 않는 꼬리가 멈추는 모습이 보인다니 신기하네.

“왜? 싫어?”

내 물음에 엘렌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더니 마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제안을 승낙했다.

짐 셔틀을 해 주겠다는 얘기였다. 그가 마법으로 만든 아공간엔 모든 부피의 물건을 자유롭게 넣다가 뺄 수 있었다.

“만약 네가 이삿짐센터를 했다면 정말 대성공을 누렸을 텐데.”

“이삿짐센터?”

“응. 혹시 같이할 생각 없어? 수익은 1:9로. 물론 9가 나야.”

“오필, 전생에 도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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