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직장인의 굴레는 왜 여기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직장에서 사장과 단둘이 하는 회식에 당첨된 기분이 이런 기분일지 상상해 보려다가 우울해져서 관뒀다.
이제 막 작위를 받은 신출내기 백작의 부인이 황태자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다.
하여 그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식사했지만, 여전히 거리는 가까웠다.
황족과 동석을 한다는 자체가 귀족에겐 영광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나는 몇 차례 ‘가문의 영예…’, ‘은혜에 깊은 감사…’. 등등 인사를 하고서야 제대로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식기에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체할 것 같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매화궁의 식사는 아주 훌륭했다.
각종 스테이크류와 오일로 요리된 산해진미들이 가득했고, 매일 이렇게 먹어왔을 황태자가 저렇게 날씬하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눈앞의 성찬에도 집에 돌아가고 싶은 건 여전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비가 없네.’
어색하게 비어 있는 자리가 눈에 띄었다. 황태자의 옆자리였다.
알 만하군.
오늘도 아침에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불화설을 신문에서 보고 오던 차였다.
물론 그 사실을 이런 식으로 눈앞에서 확인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티 나지 않게 곁눈질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황태자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염병.
“호호, 식사가 아주 훌륭하네요.”
그냥 말없이 식사만 하다가 가고 싶었는데, 분위기에 못 이겨 입을 열고 말았다. 황태자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다행이군요.”
내가 고기를 써는 모습을 잠시간 보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식사예절에 능숙하군요, 부인. 어려서부터 엄격히 배운 예절 같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당일 통보받은 갑작스러운 초청이었고, 또 갑작스러운 식사 자리였다.
공작저에서 익힌 식사 예법이 습관적으로 나온 내 모습을 황태자가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금방 차분함을 되찾았다.
식사 예절로 내가 카시어스 공작 가문의 딸이란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번 한 번만 보고 두 번 볼 일도 없을 텐데.’
오늘 황실에 초청된 이유는 명확했다.
이후에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은 못 하지만, 이런 일로 두 번씩이나 사람을 부르는 건 황실에서도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황태자의 관심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음 날 아침.
오늘도 평소처럼 회사에 커피를 들고 출근한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애는 참 손이 예쁘군요.”
“가, 감사합니다.”
아일라에게 느끼한 작업 멘트를 던지며 다정한 미소를 짓는 금발 머리의 미남자가 보였다.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저, 전하?”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더듬거리며 나왔다. 예의를 갖추는 것도 잊어버린 채.
“아, 마르그리트 부인. 좋은 아침입니다. 아일라, 편하게 안셀모라고 부르세요.”
나를 발견한 아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인사했다.
“사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 이라고 인사하고 싶은데 이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사장님, 어디 아프세요?”
아차.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던 모양이다. 아일라의 걱정 어린 시선에 무슨 대답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신을 곤경에 처하게 할 장본인이 당신 앞에 있습니다, 하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쪽을 보던 황태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실례했군요.”
‘그래, 알면 얼른 나가세요.’
“아! 아니에요. 이게 저희의 일인걸요.”
착한 아일라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뭔가 이상했다.
“일이요?”
“사장님, 중요한 상담을 받으러 오셨대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 기혼자가 결혼 중매 회사에 내담하러 왔다고?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이야기란 말인가. 아일라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황태자에게 제정신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황태자와 어제 일 이후로 얽히기 싫었다.
쌍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는 나의 피나는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는 태연하게 입가에 미소를 건 채 대답했다.
“결혼 중매 회사이니 결혼 생활에도 능통하지 않을까 싶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부부의 결혼 생활 같은 ‘사적인 일’을 상담하러 오셨다는, 이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말투에 악센트를 넣어 ‘그딴 일을 우리가 맡을 것 같나요?’라는 의미를 함의시켰지만, 효과는 없었다. 거의 엘렌에 버금가는 철면피였다.
와, 이거 진짜 환장하겠네.
“이에 합당한 금액은 지불하겠습니다.”
“이건 돈이 문제가…….”
그가 품에서 꺼낸 돈을 보자, 내 목소리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깨끗한 10만 실링의 화폐가 책상 위에 2장 올려져 있었다.
20만 실링.
“일단 오늘 상담 비용은 미리 지불하겠습니다.”
자, 잠깐만.
황족이라 그런지 손이 크시네요.
예상치 못한 화폐에 조용히 굳어 고민하고 있자, 아일라가 내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그녀가 살짝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사장님. 20만이면…….”
아일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20만 실링이면 정확히 한 쌍의 귀족 결혼을 성사시켰을 때 받는 대금이었다.
결혼 중매를 선다고 모두 성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성사를 시키는 과정도 복잡했다.
예비 약혼자를 몰래 진료해서 질병은 없는지, 범죄 전과는 없는지 알아봐야 했다.
따라서 의사와 지역 자경단, 혹은 흥신소에 뒷돈을 슬쩍 건네며 의뢰를 넣는 경우가 많아 여러 부분으로 돈이 나갔다.
황태자가 제안한 상담엔 그런 경비가 나갈 걱정이 없었다. 그러니 그 말인즉,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나는 생돈으로 20만 실링을 받는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1회에 20만이라.
이건 미친 거지.
“부족하다면 더 지급할 의향도 있습니다.”
“아뇨.”
우선 딱 잘라서 거절하긴 했는데 더 받고 싶긴 했다. 이미 돈독이 오를 대로 오른 나였기에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런데 더 달라고 하면 꼼짝없이 그의 부부 생활을 상담해 줘야 했다.
한편, 아일라는 이런 좋은 기회를 왜 잡지 않냐고,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제안을 거절해야 하는 이유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가 그렇게 바라보니 마음이 더 흔들렸다.
‘어차피 원작도 틀어졌는데 그냥 확 승낙해 버려?’
하는 유혹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들어오면서 아일라에게 시답지 않은 작업을 걸던 황태자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역시 이건 아니야.’
아무리 돈벌레라고 욕을 먹어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돈이 새지 않는 법이었다.
“태자 전하, 역시 안될 것….”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중간에 뚝 떨어졌다.
“카시어스 공작 가문에서는 의뢰가 안 들어오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찻잔을 잡은 채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시어스 공작에게 아들 하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그분은 아직 10살이 채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답니다.”
대답하는데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하필 가문 얘기가 나와도 남동생에 관한 이야기라니.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그때 일이 떠오르자 기분이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 거지?’
어제 식사 시간을 복기해 보았으나, 걸리는 건 식사 예법. 그거 하나뿐이었다.
가문 얘기를 꺼낸 것을 봐선 내 정체에 대해서 대충이라도 가늠하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허니문에서 흘러나온 정보일까?
그렇다면 이미 카시어스 가문에선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적어도 허니문은 아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내 머리가 팽배하게 돌아가고 있는 사이, 황태자는 사실을 처음 접했다는 듯, 놀란 눈을 했다.
“아직 결혼하기에는 한참 어리군요. 하지만 공작의 후계자라면 일찍 혼처를 정해두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곳이 여긴 아닌가 보네요.”
아까와는 다른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황태자가 사무실을 나가게 내버려 두는 게 옳은 일일까?
이대로 그가 가문에 언질이라도 하면 나에 관한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 부부 상담 정도는 괜찮겠지.’
하지만, 부부 상담 때문에 내 뒷조사를 했다는 건 영 꺼림칙하지 않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원작에서 황태자 안셀모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배우자도 있는 주제에 여주에게 껄떡대는 후안무치. 능력도 없으면서 권력을 놓기 싫어하는 전형적인 남자 조연 1. 민폐남.
원작의 성격이랑 다를 게 없는 행보이긴 한데, 왜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에게도 황태자의 영향력-민폐-이 뻗치는 건지 모르겠다.
“이만 저는 아침 회의가 있어 내일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부인. 그리고 아름다운 아일라 양.”
‘…게다가 눈앞에서 저런 추파를 계속 봐야 한단 말이지.’
오늘 유독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특히 아일라에게 추파를 거는 황태자를 보는 내 표정은 썩어들어 가기만 했다.
한숨을 쉬며 나는 20만 실링을 품 안에 넣었다. 생계가 걸린 이상 그를 막을 길이 없었다. 내 모습을 봤는지 황태자가 가볍게 미소를 짓고 사무실을 나갔다.
“개자식.”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네?”
내가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아일라가 되물었다.
“사장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일라…… 아니에요.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럼요.”
“전하께서 아일라의 커피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으니까 앞으론 그분이 오시면 종종 타 주세요.”
테이블에는 그녀가 황태자에게 타 준 것으로 추정되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잔 안에 있는 커피는 한 모금도 채 마시지 않은 듯한 양이었다. 어제 식후에 커피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던 그가 아일라의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하얀 민들레가 활짝 피는 듯 아일라가 해맑게 웃었다. 누가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며 소소한 소망을 가졌다.
아일라의 커피로 황태자가 더 이상 오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