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제와 같은 일이 있으신 건가요?”
어제 일도 물을 겸 에둘러 질문하자, 리카르도가 건조한 낯으로 대답했다.
“아니다. 어제는 황궁의 호출이 있었지.”
“황궁이요?”
“한 달 뒤에 황궁 연회가 열린다고 하더군.”
아일라의 귀가 쫑긋 섰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황궁 연회는 호기심과 선망의 공간이었다.
나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라면 연회 같은 이벤트는 원작대로 순조롭게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리카르도와 아일라가 황제 앞에서 약혼 선언을 한다는 건데….
“공작님도 물론 참석하시죠?”
아마도 파트너가 없을 리카르도가 연회에 참석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라면 참석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황제가 조카인 리카르도의 결혼을 바란다는 건 공연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를 움직이게 할 동기는 되지 못한다. 그가 결혼 중매 업체인 허니문을 찾은 이유도 황제 때문이 아닌, 북부에 있는 황궁의 군사들로 사기가 저하된 북부의 기사들 때문이었으니까.
“…….”
하지만 리카르도의 대답이 나오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리고 나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엿듣는 아일라를 착잡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아일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사장님도 연회에 참석하시나요?”
질문과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옮겨붙었다. 그와 동시에 리카르도에 대한 질문은 깨끗이 씻겨졌다.
“저요?”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표면상으론 마르그리트 백작 또한 중앙 귀족에 속했다. 일단 제도에 사는 귀족이었으니까. 그래서 황궁에서 종종 초대장이 발송되었으나 참석해 본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아일라는 참석하고 싶어요?”
나는 아일라에게 질문을 옮겼다. 질문을 받은 그녀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일하는 내내 성숙했던 얼굴이 제 나이대로 보였다.
“조금…… 궁금하긴 해요.”
뺨을 붉히며 말하는 아일라를 보자 내 마음은 급해졌다. 리카르도를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시선 또한 나에게 고정되었다.
“그대는 참석하나?”
애써 돌렸던 질문의 화살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아, 괜히 쳐다봤나. 아까와 같은 수법으로 벗어나는 건 힘들겠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질문에 대답했다.
“아뇨.”
“왜지? 마르그리트 백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마치 무슨 일이 생기길 바라는 듯한 말투인데, 착각이겠지.
“아뇨, 그게…….”
망했다. 그럴듯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여타 내담자였다면 ‘그이가 바빠서요.’라고 말하며 넘길 텐데, 연회의 주최자인 황제의 조카 앞에서 그런 핑계를 댈 수 없지 않은가.
사업 파트너인 리카르도 앞에선 잘 보일 필요가 있으니 자연스레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럼 아까 그 커피는 뭐냐고? 그건 여주가 얽힌 거니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
“그때 일이 있어서 고향에 내려가 봐야 해서요.”
이로써 황궁 연회가 열리는 날, 강제로 휴가가 정해졌다. 리카르도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내 대답을 듣고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 이상 캐묻지 않고 ‘그렇군.’ 하고 대답을 흘렸다.
“그런데 공작님, 일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랬었지.”
그의 대답이 조금 묘했다. 하지만 곧 성실한 직원인 아일라의 밝은 배웅을 뒤로하며 그는 사무실을 떠났다.
예상보다 빨리 사무실을 떠난 리카르도 덕에 다음 내담자와의 약속 시간까지 공백이 생겼다.
나와 아일라는 내가 우린 홍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런 시간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럼 고향에는 사장님의 부군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좀 전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그녀에겐 왠지 거짓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말을 모호하게 흐렸다.
“글쎄요……?”
근래 들어서 내 남편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대답에 아일라의 눈이 토끼 눈처럼 동그랗게 변하다가 흔들렸다.
“그렇군요…….”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에 그녀 안에서 어떤 논리의 비약이 일어나고 있는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 대답으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지만, 저 모습을 보니 다시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바쁘거든요.”
정말 사이 안 좋은 부부 취급받기에 딱 걸맞은 대답이었다. 종종 이러한 나의 대답에 이미 세간에선 사이 안 좋은 부부로 소문난 지 오래였다.
내 대답에 아일라의 얼굴에 확신이 들어찼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더 괜찮은 대답을 할 걸 싶은 낭패감이 들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내 성격상 있지도 않은 남편이랑 깨소금 뿌리는 건, 나한테 더 못 할 짓이었기 때문이다.
* * *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나는 신문으로 보던 사람을 또 내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일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신문의 1면을 장식하던 사람을.
나는 매화궁의 응접실을 곁눈질로 살폈다. 단 하나의 색으로만 이루어진 완전한 무채색 공간은 아름답고 조밀한 음각들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었다.
꽤 많은 돈이 들어갔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냥 궁도 아니고 황태자가 사는 곳이니까.’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보이진 않았다. 삭막하고 차갑다고 해야 할까.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이 공간에서 노크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이 궁의 주인인 황태자, 혹은 황제뿐이었다.
“고귀하며 순수함이 깃든 봄의 축복이 함께하길.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편하게 말하세요.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
“배려에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듣던 대로 황태자는 총천연색의 빛깔을 띠는 아름다운 금발과 잘생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는 몸가짐 하나하나엔 우아함과 귀태가 흘렀다.
‘저걸 보고 강아지상이라고 하는 건가.’
전생의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필히 강아지상의 아이돌로 아주 큰 성공을 거뒀을 것이다. 눈 아래에 찍혀 있는 눈물점조차 매력적이었다.
해사하게 웃고 있는 황태자는 나에게 다시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고귀한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그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저는 왜…….”
“차는 괜찮나요?”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왜 불렀냐고 물으려고 했던 나는 아직 한 입도 대지 않은 가득 찬 찻잔을 바라보았다. 궁에서 초대를 받으면 그 궁의 주인이 오기 전에 차를 마시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황태자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번 마셔보세요. 궁에서 나오는 차는 제 입맛에도 괜찮습니다.”
자연스러운 말 한마디였지만, 소설에서 묘사된 그대로 은근한 오만함이 묻어나왔다.
‘저놈 때문에 아일라도 고생했었지.’
소설을 읽을 땐, 책 속에서 끄집어내서 멱살이라도 뒤흔들고 싶었는데 막상 갑을관계로 마주하게 되니 나는 쩌리가 따로 없었다.
웅장하고 광막한 공간에 단둘이 앉으니 압박감도 장난이 아니었다.
말은 단둘이지만, 정말 단둘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내 뒤에 황태자의 호위기사가 열댓 명은 서 있었으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뺨이 따가웠다. 사소한 행동에 여러 눈이 날카롭게 좇는 것이 느껴졌다.
“……!”
마신 차에서 굉장히 좋은 향이 났는데,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건 분명 리카르도가 선물한 홍차와 같은 차였다.
“어떤가요?”
황태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리카르도가 준 홍차를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내심 아껴 마시고 있던 차였다. 나는 또 귀한 차를 맛보게 되어 좋은 내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정말 향이 좋아요. 바다향이 나면서 청량한 느낌도 나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나진 않나요?”
어라, 어떻게 알았지? 리카르도에게 빌레드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이 황태자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에게 나는 대꾸했다.
“네, 이게 혹시 빌레드라는 차인가요?”
“맞아요.”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다가 순식간에 돌아왔다. 짐짓 눈치채지 못할 찰나였지만, 찻잔을 잡는 내 손끝이 살짝 떨렸다.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탓이다.
힐끗 황태자의 모습을 살폈지만, 아까와 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지.’
“부인, 빌레드는 어디서 얻었나요?”
‘포식자 앞에 있는 먹잇감이 된 기분이 드는 이유는.’
그의 물음에 찻잔을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황태자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무례한 시선임을 인지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잠시 그를 살폈다. 그리고 원작을 떠올렸다.
‘안셀모 솔라 클로비스.’
그는 본디 원작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첫 등장과 함께 여주인공을 곤경에 빠트린 등장인물 중 한 명이었다.
여성 편력이 있는 그는 전형적인 로맨스의 클리셰답게 연회에서 아일라를 보자마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불꽃처럼 확 불이 붙었다가 식는, 평소 그의 모습을 생각한 황태자비인 에테르나는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이 평소와 달리 꽤 오랜 시간 지속 되자 그녀는 질투에 사로잡히고 아일라를 음해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면서 아일라는 사교계에서 깨나 곤욕을 치르게 되지만, 그녀의 임기응변으로 황태자비에게서 벗어나고 북부로 올라간다.
‘그냥 쌍놈인 줄 알았는데.’
갑을관계로 만나니까 그냥 쌍놈이 귄력 있는 쌍놈으로 한층 진화하지 않았는가.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눈앞에 있는 찻잔에 계속 시선이 닿았다. 이걸 빨리 다 마시면 나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만들었군요.”
갑자기 숨이 막힐 정도로 죄던 공기가 확 트였다.
“네?”
“사실은…… 최근에 궁 안에 있던 누군가가 그 찻잎을 훔쳐 가서, 혹시 그자가 부인께 납품한 건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납품이요?”
예상하지 못한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간도 크지. 어떻게 황궁의 물건에 손을 댄단 말인가. 만약 걸린다면 삼족이 멸할 중죄였다. 나는 그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단 사실에 다급히 해명했다.
“저는 에르도안 공작님께 선물 받았어요. 혹시 의심되신다면 그분께도 물어보시면 말씀해 주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황태자의 입에 걸린 미소가 조금 산뜻해졌다. 조금 전보다 가식적인 모습이 덜해서 외려 그 모습이, 가면이 거두어진 진짜처럼 보였다.
“그럼…… 이곳에 부르신 용건이 빌레드 때문인 건가요?”
“탁 까놓고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요새 좀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거든요. 그런데 마침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 빌레드를 마시고 있다는 목격담이 들어와서 초대했습니다.”
황태자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설명을 들은 나는 그제야 그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황궁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무리 작더라도 황실 사람들은 큰 흠으로 여겨 밖으로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비밀리에 처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머… 아니에요. 그런 몰상식한 사람은 빨리 잡혀야 할 텐데, 큰일이네요.”
정해진 답에 가식을 한층 점철해서 대답했다.
이런 걸 참고인 조사라고 하는 걸까? 범죄자를 잡기 위한 일이었으니 별로 불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분명 전하의 혜안으로 사건이 빠른 시일 내 해결될 거예요.”
“이런. 이 사건이 빨리 해결되지 않으면 제가 가진 혜안이 부족한 탓이 되겠군요.”
아니, 형식상 내뱉은 말에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기 있나.
그의 입에 걸린 미소가 장난스러워서 다행이지, 진심으로 한 말이면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느라 진땀을 뺐을 것이다.
‘휴, 왜 이렇게 피곤하지.’
매화궁에 입궁한 지 10분도 채 안 되는 것 같은데 체감상 10년은 지난 것 같다.
일단 황태자의 농담에 적절한 응수는 해야 했다. 약간 머리를 굴린 나는 대답했다.
“100년의 미래를 본다는 대현자도 손발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경조사라도 처리하기 힘들다고 하니, 전하께서 걱정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꽤 능숙하군요.”
라고 말하며 황태자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비로소 완전히 풀린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꺼냈다.
“전하, 시장하시진 않으신가요?”
“아! 미처 몰랐군요. 부인.”
과할 정도로 명랑한 대답에 아까와는 다른 불안감이 엄습했다. 집에 가려고 꺼낸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 듯한 느낌이다.
……이거, 강제로 회식이 잡힐 분위기인데?
“부인이 배고픈지도 모르고 제 할 말만 했군요. 여기 온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할까요?”
“…전,”
‘전,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요.’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황태자의 말이 조금 더 빨랐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하는 식사도 꽤 나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