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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8화 (19/124)

18화

아일라의 긍정에 엘렌은 금방 어린 소년처럼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나란히 서 있는 그 둘을 본 나는 팔짱을 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여주와 서브 남주가 같이 있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무척 인상 깊기는 한데 말이야…….

원작에서 아일라와 엘렌은 어릴 때 레니에 후작저에 방문한 엘렌과 그의 부모님으로 인해 인연이 시작된다.

그리고 십여 년 후, 황실의 전용 사냥터에서 열린 사냥 대회에서 아일라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엘렌이 그녀를 구하게 되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한 아일라는 엘렌을 에르도안 공작 가문의 마법사로 고용한다.

‘그럼 이 상황은 뭐지.’

나는 지금 또다시 원작이 틀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애초에 원작이라는 게 실존하긴 할까.

따지고 보면 엑스트라도 아닌, 서브 남주가 원작을 알고 있는 내 속을 뚫어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

“오필,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줄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엘렌이 이야기했다. 그는 나에게만 들릴 만치 작은 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힐끗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게 왠지 듣고 싶지 않은데.

“나 레니에 영애를 오늘 처음 봐.”

……? 어릴 때도 본 적이 없다고?

내 입모양에 엘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이 나왔다. 이놈의 원작은 이미 훨씬 전부터 나사가 빠져 있었다는 말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군.

“그래서 넌 오늘 또 무슨 일이야?”

나의 친근한 말투에 아일라의 얼굴에 의문이 짙게 깔렸다.

“친구예요. 그 기술자.”

“아…….”

아일라의 시선이 실내 구석에 있는 마법구에 닿았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웜(warm)이었다.

엘렌은 소파에 앉아 익숙하게 쿠키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오필, 오늘 누구랑 싸웠어?”

“응.”

“원수가 될 정도로?”

“…아마도?”

계속 이어지는 질문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엘렌은 평화로운 얼굴로 줄줄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마탑은 연구비나 각종 재료 비용이 많이 들어.”

“게다가 마법사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려면 지원금으론 턱도 없지.”

“몇몇 어린 마법사들은 마법 공국에 유학도 시켜줘야 하고…….”

나는 밑밥을 깔고 있는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래서 본론이 뭔데?”

“그래서 본론이…… 몇몇 마법사들은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해 약간의 비즈니스적인 일을 하고 있어.”

“비즈니스?”

“응. 비즈니스. 오필은 잘 알지?”

엘렌이 해맑게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모양을 만들곤 되물었다. 결국, 돈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는 말을 거창하게 늘여놓은 것이었다.

‘내가 저 표정에 속으면 오필리아 마르그리트가 아니라 로위나 카시어스다.’

이런 식으로 엘렌이 뜬구름 잡는 말을 할 때는 필히 나와 연관된 일이 있었다.

그것도 사안이 심각할수록 이렇게 돌려 말했었던 것 같은데?

“엘렌. 네가 말해 봐. 내가 아는 비즈니스랑 네가 말하는 비즈니스랑 같은지 비교해 보자.”

“거래자와 원활한 관계를 위한 밀매나 암살?”

“너 지금 장난해? 그래서…….”

엘렌이 말한 내용을 조합하니 나와 연관될 법한 일이 딱 한 가지 추측되었다.

“설마, 마탑의 암살 명단에 내가 있다는 얘기야?”

“아니. 명부에는 없지만 오를 뻔했어.”

“맙소사…….”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아일라가 핼쑥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다 저 때문이에요……. 얼른, 얼른 제가 가문으로 돌아가야…….”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 없이 아일라의 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얘기를 하려면 나랑 단둘이 있을 때나 할 것이지!’

나는 밉살스러운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네가 어떻게 좀 해봐.”

“글쎄, 저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와, 서브 남주가 말하는 꼬락서니 좀 보소.

기가 차서 그를 바라보자, 엘렌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밝게 웃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니 화낼 마음도 식어버렸다. 저런 바보한테 내가 무슨 기대를.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이는 아일라에게 다가갔다.

“아일라.”

“훌쩍…….”

“아일라!”

내가 소리치자 아일라가 울음을 그치고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환장한다. 진짜.

나는 엘렌의 머리를 그녀 쪽으로 틀어쥐며 말했다.

“…?!”

“얘가 매일 하는 짓이라곤 흙바닥에서 뒹구는 일밖에 없지만, 꽤 뛰어난 마법사랍니다. 그러니까 내 걱정은 말아요. 아일라.”

“내가 마법사인 거랑 뭔 상……. 상관있지.”

그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내 손에 힘이 들어가자 엘렌이 곧 말을 바꾸었다. 만족할 만한 대답에 내가 그의 머리를 놓자 그는 다람쥐처럼 내 옆에서 멀찍이 달아나버렸다.

“마법사……?”

눈물이 고여 있던 아일라의 눈에 이채가 돌며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꼭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아일라를 보는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엘렌이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

“그럼 내가 장난감이야?”

“그래, 그거야.”

나는 불현듯 떠오른, 기막힌 생각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엘렌을 바라보았다. 장난감.

엘렌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아까의 그처럼 귓속말을 속삭였다.

“네가 장난감 좀 돼 봐.”

“보통 사람이 그런 말을 한 치의 거리낌 없이 해?”

아, 시끄러워. 빨리 아일라의 장난감이나 되란 말이야.

내 뜨거운 눈빛의 의미를 읽은 엘렌은 할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왠지 재수가 없는 미소였다- 아일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의 뺨에 흘러 있던 눈물들이 모여 공중에 방울방울 하나의 큰 물방울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일라는 신기한 모습으로 헤, 입을 벌린 채 바라보았다.

나는 흐뭇한 광경으로 그 모습을 보며 이미 다 식어버린 밀크티를 홀짝였다.

그 뒤로, 나와 아일라는 엘렌이 벌이는 작은 마법쇼를 보며 한가롭게 차를 마셨다.

* * *

째깍째깍.

초심만 흘러가는 시계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그에 안절부절못한 건 아일라였다. 은색 머리를 단정히 묶어 올린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 사장님…….”

나는 그녀의 부름을 들었으나, 앞에 있는 남자를 뚫어질 듯 쳐다볼 뿐이었다.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피부와 칠흑 같은 검은 머리 아래,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

기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왜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등장하는지 의문이었다.

머릿속에 여주인공 센서라도 달고 다니는 걸까. 조금 식상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어제의 일로 그 의문에 더 이상 불만을 품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의 등장은 여주인공의 위기뿐 아니라, 엑스트라의 위기까지 해결해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애꿎은 피해를 보게 생긴 엑스트라1로서 이 상황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커피…… 타 올까요.”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재빨리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아일라가 타 온 독특한 커피를 마시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정적을 깬 내 대답에 아일라는 어색히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 순간, 어색함을 풀기 위한 그녀의 노력에 나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공작님은 커피 드시겠어요?”

천연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힐끗 보니 그의 찻잔이 비어 있었다. 저건 내가 탔던 커피였다.

여주인공의 커피 맛을 모르는 리카르도는 비어 있는 커피잔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행동이 조금 빨라 보였다.

‘어지간히 커피가 마시고 싶었나 보네.’

그러면 여기 말고 커피집이나 가지. 나는 그의 사소한 행동에 속으로 딴죽을 걸었다.

물론 겉으론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편으론 앞으로 벌어질 일에 조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남주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한 리카르도라도 아일라의 커피를 마시는 건 조금 과한 처사가 아닐까.

‘알 게 뭐야.’

“어제 잠은 잘 주무셨어요?”

이 말은 ‘어제 여주랑 나한테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너는 팔다리 뻗고 잘 잤냐.’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완벽하다.

리카르도는 잠시 고민한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잘 잤다 이거지.

“그대는 별로 잠을 자지 못한 것 같군.”

그의 말이 맞았다. 마탑의 암살 명단에 오를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누가 편히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그래, 리카르도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꽈배기처럼 심기가 꼬이기 시작했다. 리카르도를 힐끗 보았다.

설령 마법사가 그를 암살하려고 한다 한들 리카르도가 칼을 드는 순간,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려고 입을 떼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국에서 제일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남자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이 흘렀고, 다과실에 들어갔던 아일라가 커피를 들고 나왔다.

‘정말 향기는 그럴싸한데…….’

향은 분명 커피 향이 맞는데 맛은 커피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청국장?

그건 발효식품인데, 어떻게 건조 시킨 원두커피에서 그런 맛이 나는 걸까.

향만은 감쪽같아서 나도 그녀의 커피를 처음 마실 때 깜빡 속았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끓인 건지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이, 리카르도는 긴 손가락을 뻗어 찻잔을 들고 한입 마셨다.

그녀가 탄 커피를. 리카르도가 커피를 마신 것이다.

‘마셨어……?’

아일라의 커피를 마신 리카르도에게 어떤 표정 변화라도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인간이 맞나 싶다.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커피를 마신 시늉을 한 건 아닐까, 궁금해서 그의 찻잔을 남몰래 보았으나 커피는 처음보다 확연히 줄어 있었다.

“입맛엔 맞으세요?”

이건 진짜 궁금했다. 리카르도는 잠시 대답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긍정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과연 남주.’

여주인공이 만든 음식이라면 결과물이 어떻든, 남자주인공은 그것의 입맛이 맞게 설정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천생연분 아닌가. 속으로 감탄한 나는 따로 내가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그래, 남주라고 늘 여주를 구해 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이 둘은 이어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완전 애꿎은 사람을 괴롭히는 꼴이었다. 커피가 그의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조금 미안해질 뻔했으니까.

“입맛에 맞으신다면 다행이네요.”

“…….”

리카르도는 커피를 든 채 아일라를 보고 있었다. 저 시선에 무슨 의미가 담긴 건진 모르겠지만, 그의 시선에 나는 ‘혹시……?’ 하는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 개연성이 없지만, 리카르도가 아일라의 커피 맛을 보고 새삼스럽게 반했다든가…….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군.”

그런 전개는 아니었나 보군. 자리를 뜨는 리카르도를 보고 나는 황당무계한 가정을 금방 접을 수 있었다.

“벌써요? 오늘은 일찍 가시네요.”

갑자기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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