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소설에서 한가락 한 악역이라지만, 바로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교양 없이 소리나 지르기는.”
레니에 후작 부인은 뺨을 때리고 후련했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교양 없이 남의 직원에게 손찌검이나 하다니.”
후작 부인의 혼잣말에 맞받아친 나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녀에게 잡힌 아일라의 손목에 시선이 닿았다.
“그 손 놓으세요.”
내용은 정중했지만, 말투는 명령조에 가까웠다. 날카로운 눈매와 내 차가운 인상이 효과를 발휘하는 날이었다.
“계급장 떼고 붙고 싶은 거라면 이쪽에선 사양 안 해요.”
“감히 누구한테 협박질이야?!”
말하는 기세는 당당했지만, 아일라를 잡은 후작 부인의 손이 움찔 떨렸다.
아일라도 그것을 느꼈는지 잡힌 자신의 손목에 시선을 옮겼다.
말없이 후작 부인과 시선을 나누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지 말라는 후작 부인의 강렬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얼굴 위에 꽂혔으나, 방문자는 이 상황을 타개할 좋은 수단이었다. 이대로 계속 후작 부인과 대치를 지속하면 불리한 쪽은 이곳에서 손님을 계속 받아야 하는 나였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 리카르도 다음 순서로 내담 일정이 잡힌 로엘 백작 부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어머, 제가 사무실을 잘못 찾아왔나요?”
“아뇨, 로엘 백작 부인. 밖이 많이 추우시죠? 어서 들어오세요.”
우아한 미소와 함께 건넨 내 말에 레니에 후작 부인은 표독했던 표정을 지우고, 처음에 보았던 고상한 후작 부인으로 돌아갔다.
“로엘 백작 부인, 여기서 뵈네요.”
“어머! 후작 부인! 오랜만이에요!”
로엘 백작 부인이 레니에 후작 부인을 알아보고 반가운 듯 미소를 활짝 지었다.
본래 로엘 백작 부인은 아들의 혼처 자리를 모색하기 위해 지난주 예약을 잡아둔 상태였다.
10시에 예약을 잡았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다니.
‘그럼 리카르도는 오늘 안 오는 거네.’
한쪽에서는 안부 인사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로엘 백작 부인이 그녀를 알고 있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로엘 또한 명망 높은 중앙 귀족 가문이었으니.
“조르지오랑 에스텔라는 잘 지내고 있죠?”
레니에 후작 가문의 쌍둥이 남매이자 후작 부인의 친자식인 조르지오와 에스텔라.
그들은 후작과 후작 부인에 더불어 아일라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든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럼요. 에밀은요?”
“후후, 여기 제가 있는 이유가 뭐겠어요? 이게 다 천덕꾸러기인 에밀 덕분이죠.”
백작 부인의 넉살 좋은 대꾸에 후작 부인은 작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일라의 손목을 놓았다. 아일라는 뺨을 맞아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백작 부인으로부터 등지고 있던 상태였다.
“아일라, 커피 좀 내오겠어요?”
이 틈에 자리를 뜨라는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아일라는 대답도 없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다과실로 들어가는 아일라의 뒷모습을 잠깐 흘겨본 후작 부인은 백작 부인에게 나중을 기약하자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고 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딸을 사랑하는 어미의 가면을 쓴 채.
“세상 어디에 자식 이기는 어미가 있을까요. 그 아이가 이곳에 있고 싶어 한다면 저도 어쩔 도리가 없네요. 부족한 딸이지만 너그럽게 돌보아 주세요.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심성은 좋은 아이랍니다.”
대화로 상황을 짐작한 백작 부인은 ‘어쩜, 마음도 이리 고우신지.’라는 혼잣말을 하며 혼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니 쓴웃음만 지어졌다.
백작 부인. 그런 훈훈한 상황이 절대 아니에요…….
“따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아일라 영애는 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고 있답니다.”
일단 나도 레니에 후작 부인의 대화에 장단을 맞추었다. 그녀의 소름 돋는 태세 변화에 표정을 관리하기가 참 힘들었지만, 나 또한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디서 깨나 표정 관리를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 사람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지 않을까.
미묘한 인사가 오가고 후작 부인은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니 순식간에 사무실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레니에 후작 부인 성격에 이 일을 쿨하게 잊고 지낼 리는 없었다.
나가면서 나를 보는 눈빛이 매우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잠깐.’
심지어 어디서 많이 본 클리셰다. 소설에선 일개 엑스트라가 이렇게 악역한테 깝죽대면 다음 장에서 바로 퇴장당하던데?
설마 내가 악역이 얼마나 악독하고 손속에 자비가 없는지 증명해주는 실험군이 되는 건 아니겠지?
아, 신이시여….
‘아니! 이 집 남주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데드플레그를 제대로 꽂았다는 생각에 원망의 화살이 리카르도에게 돌아갔다.
뉘 집 남주이신지 평소엔 매일같이 나타나더니만 정작 필요할 땐 증발하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가슴이 답답했다.
마치 중요한 약속에 잠적한 친구에게 부재중 전화만 열 통 넘게 남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왜 네 미래의 부인을 네가 안 챙기고 내가 챙기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원래 소설 속 중매상의 일이 이렇게 힘든 거였나요.
* * *
레니에 후작 부인, 클로에는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탑승한 채 깊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진한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필리아 마르그리트.”
그 이름을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그녀는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을 처음 보았던 당시를.
보자마자 어디서 보았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희미한 기시감이었다.
곧이어 아일라의 일에 그 기시감을 잠시 잊어버렸지만, 마차에 홀로 있게 되자 다시금 떠올랐다.
어디서. 대체 어디서 보았을까.
불쾌함에 그녀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년을 내가 잊을 리가 없을 텐데….”
추측해 봤자 귀족 부인들이 모이는 다과회라든가, 독서 모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모임도 클로에가 대부분 주최를 했기에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 참석을 했다면 그녀가 몰랐을 리 없었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어. 그 얼굴.”
그녀는 공작새 깃털로 만든 부채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렇다면 남은 장소는.
하지만……
그곳은 절대 마르그리트 백작 부인이 있었을 리가 없는 곳이다.
* * *
오전에 있었던 일을 빼고는 지극히 일상적이었던 일과가 지나가고, 어느덧 하늘엔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나는 퇴근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지만, 사무실에 있는 다른 사람은 가만히 창문만 보고 있었다.
“퇴근 안 해요?”
아일라였다. 그녀는 아까 있던 일의 여파인지 말수도 평소보다 많이 줄어들고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퇴근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한 건지.
어딘가 위태스러워 보이는 그녀를 혼자 두고 가기가 어려웠던 나는 반강제로 여기에 발이 묶인 채 아일라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아일라? 아일라!”
“네? 네! 사장님.”
어딘가 나사 한쪽이 빠진 대답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불쌍한 아일라.’
아까 맞은 뺨이 벌에 쏘인 듯 띵띵 부어 있었다.
“차라도 한잔할래요? 차는 내가 준비할 테니 아일라는 여기 앉아 있어요.”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과실로 들어가 얼그레이를 우리기 시작했다. 리카르도가 주었던 홍차보다는 못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이름 있는 찻집의 것이라 그런지 꽤 향기가 좋았다.
한쪽에는 밀크티를 만들기 위해 우유를 데우고 있었다. 달달한 것을 좋아하던 아일라가 밀크티도 즐겨 마셨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티와 우유를 반씩 섞고, 설탕을 세 스푼 넣으니 달달한 밀크티 향기가 진동했다.
부은 뺨을 식힐 얼음주머니와 밀크티를 들고 다과실을 나오자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일라가 보였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혼자 울고 있지는 않았을까,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밀크티의 향을 맡은 그녀의 눈에 약간의 이채가 감돌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엔 우울한 먹구름이 얕게 깔렸다.
이야기의 중반부가 흐르면 아일라의 태도도 한층 자신감이 넘치게 변하지만, 지금의 아일라는 고초를 겪고 막 미래에서 돌아온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더군다나 타인이 있는 자리에 레니에 후작 부인 앞에서 당당하고 시원스러운 태도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차는 입맛에 맞아요?”
내 말에 밀크티를 한입 마신 아일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말 입맛에 맞았는지 아일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밝아진 분위기도 잠시.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입을 떼기도 여러 번.
할 말은 있으나 그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좀처럼 말을 꺼내질 못했다.
“사장님…….”
라고 운을 떼는 게 뭔가 불안했다. 왠지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처연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말했다.
“저는 이만 가문으로 돌아갈게요.”
……네?
그녀의 이야기에 깜짝 놀란 내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아일라가 말을 이었다.
“……이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사장님, 그간 감사했어요.”
그녀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그녀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회귀한 그녀가 자신의 미래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나는 반사적으로 사무실을 나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다급히 붙잡았다.
“민폐는 저쪽이 저질렀죠. 아일라가 저지른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내 말이 맞죠?”
나는 사실을 외면하려는 아일라를 채근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결심을 굳힌 얼굴이었다.
“그건 오필의 말이 맞지.”
“…?”
끼어든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향긋한 꽃향기가 진동했다. 엘렌이었다. 겨울인데도 봄꽃인 히아신스 향기가 실내를 휘감았다.
겨울에 봄꽃을 볼 수 있는 곳은 황궁이 유일했다.
초대황제가 봄을 좋아해서 임의로 황궁에 봄꽃을 심어 개화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황태자비의 궁인 ‘목련궁’을 다녀온 것을 확신했다. 나는 익숙하게 그의 존재를 무시했다. 그러자 푸른빛이 감도는 머리 색이 내 눈앞을 아른거렸다.
“누구세요.”
“혹시 어디 아파?”
정말로 날 모르냐는 얼굴로 엘렌은 내 이마에 손을 얹으며 본인 이마에도 손을 대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은 없는데…….”
“누군지 모르겠으니까 빨리 꺼져 주세요.”
“사장님, 이분은……?”
아일라가 토끼같이 동그란 눈망울로 엘렌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게 그녀의 의문을 불식시켰다.
“모르는 사람인데, 미친 것 같죠?”
“네……? 조,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