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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6화 (17/124)

16화

바로 리카르도와 아일라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전날 열린 황궁 연회였지.

하나하나 다 원작을 짚고 넘어가니, 지금 상황이 매우 꼬여가고 있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흘러내린다. 이걸 어쩌지?

이대로 아일라가 레니에 후작 부인에게 끌려가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고 봐야 하는 건가?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모색해 봐야 해.’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우리 아일라를 돌봐 주셔서 고마워요. 부인.”

레니에 후작 부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아일라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이제 가자꾸나. 아일라.”

아일라에게만 들릴 만치 작은 소리였으나, 그 목소리에 담긴 온도는 차갑고 섬뜩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아일라는 벗어나고 싶었지만,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끌려나가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단호한 음성이 들렸다.

“잠시만요.”

오필리아였다.

“근무 중에 이렇게 데려가시면 곤란합니다. 후작 부인. 아일라는 엄연히 제 비서거든요. 제가 할 일이 많다 보니 비서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 한답니다.”

몇 년 동안 비서 없이 일을 처리했지만, 오필리아는 개의치 않고 거짓말을 했다.

아일라가 끌려가는 모습을 눈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새 사람을 구하세요.”

자신의 행동이 가로막힌 후작 부인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아까 고상한 미소를 보였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백작 부인 주제에.’

그런 그녀가 발길을 막은 게 레니에 후작 부인의 심기를 거슬렸다.

그녀도 마르그리트 백작이 돈을 주고 작위를 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위귀족들은 돈을 주고 작위를 사는 행위를 곧잘 비웃었다.

평민이 귀족 행세를 하는 광대를 보는 듯이.

후작 부인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결혼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굳이 나쁜 인상을 남길 필요는 없어 예의를 차렸을 뿐이었다.

“아일라를 이렇게 데려간다면 저희 쪽에서도 어쩔 수 없이 가문에 소송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후작 부인.”

“소송?”

오필리아의 말에 레니에 후작 부인이 기도 안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뒤돌았다.

후작 부인과 오필리아의 시선이 부딪혔다.

“네, 손해배상이요.”

“뭘 잊고 있나 본데, 얘는 가출한 애예요. 가출한 애를 고용해 놓고는 소송을 걸겠다고?”

오필리아는 이 말싸움이 길어질 것이리라 직감하고 살짝 삐져나온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 하고, 끝을 본다면 이겨야 하는 법이다.

* * *

매화궁.

궁의 이름에 꽃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초대 황제가 귀애하는 자식에게 하사한 궁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이 궁은 황실의 태자들만 기거할 수 있는 궁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이름처럼 모든 것들이 새하얗고 깨끗한 그곳에 이질적인 색채를 가진 남자들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리카르도는 황태자 안셀모에게 정중하나, 사촌 사이라고 하기엔 딱딱하고 삭막한 인사를 건넸다.

안셀모는 금빛 눈동자를 휘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딱딱한 호칭은 인색해 보이지 않는가?”

어깨에 닿은 금색 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

리카르도는 안셀모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앞에 놓여 있는 홍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아침부터 황궁에 호출을 받고 입궁한 상태였다.

본래라면 오필리아가 있는 사무실에 있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느닷없는 황태자의 부름을 거절할 핑계도 없었다.

그런 리카르도를 본 안셀모는 즐거운 듯 웃었다. 약간의 장난기도 엿보였으나 리카르도는 그런 안셀모의 인간적인 모습에 속지 않았다.

저 표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조용히 곱씹으며 가늠했다.

한때 신문에서 황태자의 포악성과 잔악함을 다뤘지만, 안셀모는 여자들과 추문을 만들며 그러한 소문들에서 눈을 돌리게 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으나 사람들은 재밌는 가십거리에 그가 저질렀던 일들은 차츰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리카르도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신과 비슷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건 안셀모도 다를 바가 없을 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나 보지?”

가볍게 물어온 말투였지만, 눈빛만큼은 마치 먹잇감을 앞둔 맹수와 진배없었다.

“없습니다.”

리카르도는 딱딱하고 냉랭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앞에 있는 홍차를 들고 조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보는 안셀모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약간은 과장스럽게 보이기도 하는 반응이었다.

“리카르도. 홍차라면 입에도 안 대지 않았나?”

“그게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와 상관이 있습니까?”

“글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안셀모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서 은근한 권력과 오만이 묻어났다.

“아버지에게 홍차를 보내 달라 얘기했다는 걸 들었어.”

“네. 제가 요청했습니다.”

“호오, 선물용인가?”

“제가 마셨습니다.”

리카르도는 오필리아의 저택에서 마신 홍차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 대답은 완전한 거짓이라고도, 완전한 진실이라고도 치부하기 어렵고 애매했다.

이런 식의 화법을 선호하는 건 아니었으나 상대가 안셀모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누구랑 마셨나?”

안셀모의 입매가 삐뚤게 올라갔다. 얄팍한 수를 쓴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리카르도는 어릴 때부터 한결같은 사촌을 보며 미간을 미미하게 구겼다. 그가 안셀모와 대화를 꺼리는 이유는 이런 데에 있었다. 모호한 대화로 자신이 진짜 얻고자 하는 것을 감추는 게 눈앞에 있는 남자의 방식이었다.

“오늘 제가 여기 있는 이유와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똑같은 말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잠시 침묵을 지키던 리카르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백작 부부와 마셨습니다.”

입안에 굴려지는 어감이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안셀모의 물음에 적당히 둘러대기 좋은 대답이었다.

그의 말에 안셀모는 흥밋거리가 사라졌다는 듯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쉽게 되었군. 난 자네가 숨겨둔 연인이라도 있는가 싶었지.”

그의 표정 변화를 바로 알아차린 안셀모가 빙글 웃었다.

리카르도는 그의 말에도 별다른 대꾸 없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빨리 본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나가겠다는 눈빛이었다.

“한 달 뒤에 연회가 열릴 거야. 성대하게.”

안셀모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곤 산뜻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공도 필히 참석하길 바라네.”

* * *

나는 문 너머에서 바라보는 직원들에게 흘긋 시선을 던졌다.

여기를 보는 직원 중 몇몇이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직원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

내 직원들은 대부분 평민이거나 한미한 귀족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까마득한 후작 부인이 내담 약속을 잡지 않고 방문했다고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약간 측은지심이 들었다.

“예, 부인. 아무리 아일라 영애가 가출했다고 해도, 그녀는 엄연한 성인이랍니다. 하물며 고용할 때 집안 사정까지 고려하는 곳이 있나요? 제 비서가 이렇게 공석이 되어 버리면 적당한 인력을 구할 때까지 막대한 손해가 생길 텐데 그 손해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레니에 가문에서 져야죠. 만약 책임을 회피하시겠다면 법정에서 만나면 됩니다.”

청산유수처럼 나오는 내 말에 후작 부인은 잠시 입술을 멈추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힌다는 표정이었다.

오, 저 표정 굉장히 기분 더러운데?

“결국 원하는 게 돈이다?”

갑자기 말이 짧아졌네? 나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려면 그리 생각하세요.”

“어쩐지. 작위도 돈으로 샀다고 하더니…….”

‘이런 방법으로 돈을 모았나 보네.’라고 비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저급한 벌레를 보는 듯했다. 이렇게 대놓고 멸시를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일라는 이런 시선을 숱하게 마주했겠지.’

그녀가 가문에서 받은 대우를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는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법정에서 만날까요?”

이런 일로 법정에서 만나면, 레니아 후작 가문의 손해였다. (지금은) 명성 높은 후작 가문이 돈 문제로 법정에 선다는 건 영 체면 서는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레니에 후작 부인은 입술을 뒤틀며 말했다.

“얼마면 되죠?”

흠칫.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대사에 행동을 반사적으로 멈추었다. 심지어 카랑카랑한 목소리 톤도 흡사했다. 왜인지 그런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

‘저한테 이런 돈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요, 어머님.’

그러나 현실은 아침 드라마가 아니었다.

“400만 실링입니다.”

그 말을 들은 레니에 후작 부인과 아일라가 몸을 움찔 떨었다.

방금 말한 돈은 아일라가 회귀하기 전, 레니에 후작 가문이 아일라를 프란츠 변경백에게 팔아넘긴 액수였다.

이 액수를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쯤이면 프란츠 변경백이 주는 예물의 값이 대충 잡혔을 테니까.

이렇게 되면 레니에 가문 입장에선 배상금을 주고 아일라를 데려가는 것이 손해였다.

프란츠 변경백보다 높은 값의 예물을 줄 귀족들은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 비가 올 것 같네요.’와 같이 단조로운 목소리였으나, 역시나 후작 부인은 내 말을 듣고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400만 실링이면 한화로 25억이니 저런 표정이 나오는 건 당연하지.

“참고로 저희는 할부 같은 거 받지 않는답니다. 여기서, 당장 일시금으로 주셔야 해요.”

나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쪽도 나처럼 표정 관리 좀 하지?

“레니에 후작 부인이라면, 지갑에 그 정도 돈은 가지고 다니시겠죠?”

평상시에 그런 돈을 가지고 다닌다면 도적한테는 걸어 다니는 보석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이왕 돈밖에 모르는 돈벌레 취급을 당할 거라면 철저하게 돈벌레처럼 굴겠다 이거야.

뭐? 평소에도 돈벌레처럼 굴지 않냐고? 내가 언제?

성이 난 후작 부인은 아일라의 손목을 홱 끌어당기며 표독스레 말했다.

“너는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구나.”

“…….”

아일라는 몸을 움찔 떨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애꿎은 생사람을 잡는 광경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너도 저년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아일라가 처음으로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사, 사장님한테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하, 비틀린 미소로 숨을 내뱉은 후작 부인이 말했다.

“둘이 한통속이었구나. 그렇지?”

“아니에요!”

아일라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레니에 후작 부인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곧이어 믿기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짝!

그녀가 아일라의 뺨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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