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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5화 (16/124)

15화

아일라는 물걸레로 빡빡 닦아 반질반질해진 책상을 보았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직원들이 그녀를 흘겨보며 자기들끼리 숙덕거리고 있었으나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저런 눈길을 받는 것은 전생 때도 흔해 익숙했으니까.

전생에 후작 영애가 후작저에서 허드렛일을 한다는 사실이 세상 밖에 알려지자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은 멸시로 변했다.

면전에서 귀족의 수치라며 성을 박탈해야 한다고 비웃던 사람도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그렇게 반갑게 느껴질 날이 올 줄은 몰랐어.’

늘 밤에 잠을 잘 때마다 다음 날 뜨는 해를 보고 싶지 않아서 울었던 때도 여러 번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있을 곳이 있다는 것에 기뻤고 약간 코가 시큰거리기도 했다.

‘다 사장님 덕분이야.’

전생에서도 프란츠 변경백한테 시집을 갔을 때도 그 집 식솔들에게 얼마나 모진 일들을 당했는지 떠올리기도 끔찍했다.

부부 생활은 더욱 최악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자마자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결혼하고 1년 뒤, 새벽에 자고 있던 그녀의 방에 불이 났다. 화마에 허덕이다 기절한 아일라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죽기 직전, 드디어 안식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깨어나 보니 천국이 아닌, 열여덟 살 시절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그게 지옥과도 같아 열흘 밤을 내리 울었지만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녀 앞에 있는 세상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그녀는 얼른 회귀 전 알고 있던 미래를 메모하며 후작 가문을 벗어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남자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리카르도 에르도안.’

그녀는 전생에서 읽을 책 또한 주어지지 않아 프란츠 백작이 읽다가 버린 신문을 읽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거기엔 리카르도 에르도안이란 사람이 자주 실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 아래 실리는 내용은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대부분 결혼할 때마다 파경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회귀한 그녀는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가 사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는 서류 간으로 맺어진 공작 부인을 원한다는 것을.

그것은 그녀의 구박데기 신세를 모면할 열쇠였다.

그러나 일이 꼬여버렸다. 갑자기 에르도안 공작이 사랑 없는 결혼은 안 된다고 자리를 털고 떠났기 때문이다.

근데 아일라는 그런 그를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자리를 떠나자마자 그녀가 떠올린 것은 오필리아가 써준 고용계약서였다.

어쩌면 이게 회귀 전, 결혼 생활에 진절머리가 난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였을 수도 있다. 아일라도 제 마음을 다 알지는 못했다.

“아일라, 좋은 아침이에요.”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과거의 수렁에서 꺼내 올렸다.

“사장님!”

오늘도 블론드 금발을 말끔히 묶어 올린 오필리아는 시원스럽고 당당해 보이면서 품위가 있었다. 어릴 때 아일라가 혼자 상상했던 귀족의 모습이었다.

“어젯밤은 잘 잤어요?”

“네, 사장님은요?”

정확히는 ‘사장님 덕분에 잘 잤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부끄러워진 기분에 아일라는 짧게 대꾸했다

그녀는 오필리아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사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피곤한 낯 색은 아니었지만, 오필리아는 뭔가 시름이 깊은 얼굴이었다.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아일라는 오필리아에게 물었다.

“사장님, 무슨 고민 있으신가요?”

“음…….”

아일라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반짝이자 오필리아는 뜸을 들이다가 사무실 주위를 살폈다.

아일라는 늘 자신이 이런 표정으로 질문을 하면 오필리아가 못 이기는 척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필리아가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난처한 웃음을 그리는 것도 잠시. 결국 아일라의 눈빛에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제 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엘렌과 남편 대역에 대한 이야기, 원작 얘기는 쏙 빼놓은 채로.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일라는 그간 긴가민가했던 오필리아에 대한 에르도안 공작의 감정을 확신했다.

공작님이 오필리아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선 자리에서 ‘진정한 사랑’ 운운을 왜 했던 것인지 이해했다.

그리고 공작이 살인교사를 받지 않았다는 오해도 풀렸다.

그녀로선 안심이지만, 그런 얼굴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실존한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오필리아에게 말해야 할까.

아일라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의 사적인 일에 끼어드는 건 그녀의 적성에 맞지 않았어도, 이건 오필리아의 일이었으니까. 그러자 결심은 빨랐다.

“저… 공작님은 사장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오필리아는 아일라의 터무니없는 추측에 어이가 없었다.

리카르도가 나를 좋아한다니.

유부녀인 나를?

“아일라, 저 결혼했어요.”

“네, 그렇지만…….”

“어디 가서 그런 말씀 하시면 큰일 나요. 쉿.”

오필리아는 검지로 입가를 가리며 가볍게 씩 웃었다. 그만큼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녀의 태도와 달리 속은 복잡해졌다.

‘대체 어떤 근거로 저런 생각을 한 거지?’

아일라와 리카르도는 일할 때를 합해도 만난 횟수가 손가락에 꼽았다.

그가 나를 좋아했다면 1년 내내 얼굴을 마주한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일라가 이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정말로 리카르도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일라가 리카르도를 만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필사적으로 리카르도를 잡아야 할 이유도 오필리아, 그녀가 작성한 고용계약서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오지랖은 왜 떨어서!’

과거의 자신에게 원망만 쏟아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

하지만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녀가 리카르도와 결혼하고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사는지 아는 오필리아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에휴, 모르겠다.’

아일라를 비서로 두었으니 그녀는 충분히 노력했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가령 원작 지킴이 같은 놈이 와서 나를 꾸짖어도 켕길 게 없다 이거야.

이렇게까지 했는데 둘이 안 이어지면 둘이 인연이 아닌 팔자인 거지.

아일라와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오필리아는 조금 어색한 느낌에 자신의 뺨을 쓸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뭘 빠트린 기분이다.

“아일라, 지금 몇 시죠?”

“9시 10분이에요. 사장님.”

9시 10분.

본래라면 리카르도가 내담하러 올 시간이었다. 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익숙하리만치 들리던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굴 기다리시나요?”

아일라는 눈치 빠르게 오필리아의 행동을 보고 추측했다.

‘내가 누굴 기다려?’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요?”

“……조금은요?”

긍정에 가까운 대답을 들은 오필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기다리는 사람이 리카르도라고 말한다면 아일라가 오해할 여지가 있었다.

방금의 대화를 생각한다면 더욱 말을 아끼는 게 좋았다.

“이 시간이면 늘 오시던 손님이 있었거든요.”

“그렇구나.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요?”

무슨 일?

그녀의 말에 오필리아가 잠깐 생각에 빠지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일라는 빠릿빠릿하게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익숙한 노크 소리를 들은 그녀는 생각했다.

아, 오늘은 조금 늦은 거였구나.

노크 소리의 주인이 리카르도라고 생각한 오필리아는 아일라에게 문을 열어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펼쳐질 일은 꿈에도 모른 채.

* * *

‘이건 꿈일 거야.’

아일라는 눈앞에 닥친 일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레니에 후작 부인.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그녀가 있었다. 화려한 공작새 깃털이 꽂힌 붉고 넓은 챙모자와 황금 여우털로 만든 고급스러운 겉옷을 걸친 그녀는, 아일라가 가문을 나오기 전, 아일라가 기억하는 당시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유는 간단했다. 가문에서 그녀를 잡으러 온 것이다. 혼기가 찬 그녀를 비싼 예물에 팔아치우려고 했던 그들이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다.

그녀의 계모 뒤로 허니문 직원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이 아일라가 어디 있는지 그녀에게 언질한 모양이었다.

‘그때 그 일 때문에.’

며칠 전, 사직서를 낸 남자 동료의 텃세를 만만히 보았던 것이 실수였다. 아일라는 그들의 치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있었구나. 아일라.”

사무실로 들어온 후작 부인은 붉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아일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지만, 힘이 꽤 들어가 있어 아일라는 신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여기서까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시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오필리아가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아일라의 어미랍니다.”

아일라는 천연스럽게 대답하는 후작 부인의 말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직장에서, 더군다나 오필리아의 앞이라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저 그녀는 창백히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레니에 후작 부인?’

원작을 떠올린 오필리아는 빠르게 레니에 후작 부인을 훑어보았다.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뛰어난 미색을 가진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말아 올라간 붉은 입술과 살짝 접힌 붉은 눈은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악역들 중 한 명이었다.

후작 부인에게 다가간 오필리아는 으레 내담자 앞에서 짓던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니에 후작 부인. 저는 오필리아 마르그리트라고 한답니다.”

“반갑네요. 소문으로만 듣던 마르그리트 백작의 부인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저도 만나서 영광입니다. 부인. 부인께선 여기 무슨 일이신가요?”

“아일라를 데리러 왔어요.”

후작 부인은 이런 대화는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 유감이네요. 아일라가 아직 철이 없어 부인에게 폐를 끼친 건 아닐까요?”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후작 부인. 외려 아일라 영애는 아주 완벽한 예법을 가지고 있답니다. 선생님이 좋은 분이었나 봐요.”

고위귀족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으레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레니에 가문에서 아일라에게 가정교육을 위해 선생님을 고용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부러 모른 척 그 이야기를 꺼내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여기서 죄책감이란 걸 느꼈을 텐데.’

오필리아의 공손한 말투와 달리 원래도 날카로웠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치떠 있었다.

소설을 읽은 그녀는 얼마나 아일라가 가문 내에서 후작 부인에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아일라가 가문을 벗어나서도 끝나지 않았다.

사사건건 리카르도와의 약혼을 깨기 위해 레니에 가문은 훼방을 놓았다.

결국 리카르도와 결혼에 성공하고, 에르도안 공작 가문의 권력을 등에 업은 아일라가 레니에 후작 가문을 외압으로 망하기 직전으로 몰아넣고서야 완전히 가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라면, 그렇게 하기 위해선 그녀와 리카르도의 결혼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틀어져 버렸고, 애초에 가문에서 나온 아일라와 레니에 후작 부인의 첫 만남은 여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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