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여보, 주책맞게 그런 소리를.”
으득, 이가 갈렸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내 속을 읽고 있을 게 분명한데도 엘렌은 리카르도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누가 차선책이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걸 왜 알려주지 않았는가.
나는 조용한 응접실에서 하녀가 달여놓은 홍차를 홀짝이며 어제 내린 나의 결정을 몹시 후회했다.
그냥 사업이고 뭐고 이런 약속은 만들지 않는 건데.
홍차를 좋아하지 않는 엘렌과 리카르도는 응접실에 앉아 홍차는 안 마시고 나만 보고 있었다.
‘이러다 내 얼굴 뚫리겠네.’
주변의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나는 내 홍차 맛을 조용히 음미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여기 왜 있는 것인가. 그냥 바쁘다고 둘이서만 만나게 자리를 주선하고 나는 빠지면…… 아냐.
지금 엘렌의 상태를 보아선 외려 단둘이 두는 게 더 상황이 악화될 여지가 컸다.
“공작님, 이 홍차는 어디서 구하셨나요?”
내가 그에게 말을 걸자 엘렌과 리카르도의 안색이 바뀌었다. 희비가 갈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말 한마디 가지고 왜들 저래?
“황실에서만 마시는 홍차라더군. 그래서 맛도 풍미도 일품이지.”
그렇게 말하는 리카르도는 왠지 뿌듯한 표정이었다.
“큼.”
나는 얼른 찻잔에서 입을 떼고 찻물을 보았다.
이게 황족들만 마시는 홍차라면 굉장히 희귀한 홍차일 것이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혹시 홍차 이름도 아세요?”
“빌레드.”
나는 품위도 잊고 입을 떡 벌리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찻잔을 집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차 한 모금에 손바닥만 한 황금을 마시는 거라 불리는 차라고?
아무리 내가 돈이 많다고 해도 홍차 하나에 엄청난 돈을 쓰지는 못한다.
“꽤 마음에 든 모양이군. 진작 보낼 걸 그랬어. 앞으로도 종종 보내도록 하지.”
“어머, 이 귀한 걸.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냥 보내준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이런 건 넙죽넙죽 받아야 하는 법이지.
형식상의 사양도 없는 내 칼 같은 대답에 리카르도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잘생긴 사람이 미소까지 지으니 더 잘생겼네.
아니, 그가 어떤 표정을 짓든 잘생기긴 매한가지기는 했다.
나는 나란히 앉아 있는 미남들을 풍경 삼아 홍차를 마셨다.
분위기는 좀 냉랭하다는 게 조금 흠이었지만, 이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궁금증이 일었다. 리카르도는 왜 내 남편을 보고 싶다고 한 거지?
아,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었지.
나는 이제 남편에 대한 어필을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이 기회로 마르그리트 백작이 능력이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면, 가문 간 가문의 결속이 좀 더 단단해지고 더불어 사업에도 좋은 영향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 마르그리트 백작인 당사자가 바보 엘렌이라서 문제였다.
음, 포기하자.
상황이나 악화시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오필, 빌레드가 마시고 싶었어? 그건 나도 구해줄 수 있는데.”
“너…… 아니, 당신이요?”
나는 그가 무슨 수로 빌레드를 구한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고민했다가, 그가 황태자비 에테르나와 친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황실에서 마시는 차를 백작이 무슨 수로 구한다는 거지?”
그러나 엘렌은 지금 마르그리트 백작이었다. 백작이 황실이랑 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리카르도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오필을 위해서라면 못 하는 게 없어서요. 그렇지, 오필?”
“호호. 이이도 참.”
나는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겉모습과 달리 나는 이 상황이 껄끄럽기만 했다.
리카르도가 홍차를 주겠다고 했는데, 본인이 구해주겠다고 하면 그가 대체 뭐가 되는가.
그러나 말의 의미만 보자면 맞는 말이었다. 그에게 받은 도움은 많긴 했다.
그런데 말이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데 그의 말은 뉘앙스가 이상했다.
친구로서 도와준 일을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네.
눈치 없이 대화에 끼어드는 그를 보자 나는 이젠 그가 입을 다물어 줬으면, 간절히 생각했다.
“황족만 마실 수 있는 빌레드를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말하다니, 백작은 꽤 발이 넓은 모양이군.”
리카르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엘렌과 리카르도는 서로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흡사 탐색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또다시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질린 기분이 되었다.
아, 이제 다들 나가주세요. 나 혼자 있고 싶어요.
“오필, 불편하면 평소처럼 편하게 말해. 어차피 우린 부부니까 볼 거 다 본 사이잖아?”
엘렌은 그보다 더 산뜻할 수 없다는 얼굴로 대형 폭탄을 던졌다.
이 미친놈아!
“왜?”
‘무슨 문제 있어?’ 하고 묻는 듯한 얼굴로 엘렌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오, 저 눈을 확 그냥….
마음을 읽었는지 그가 몸을 움찔 떨곤 웃었다. 이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던 리카르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볼 걸 다 본 사이?”
아까부터 차가웠던 실내가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더욱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나는 벽난로에 있는 불이 꺼졌는지 보았지만, 여전히 불은 활활 잘 불타오르고 있었다.
“고, 공작님, 저이가 짓궂어서 헛소리하는 거랍니다.”
가짜라도 표면상에는 부부였으니, 헛소리라고 변명하기보단 이 자리에서 품격에 맞지 않는 말임을 사과하는 것이 맞으나 나는 그걸 구분할 이성이 있지 않았다.
“헛소리라니. 오필.”
그 입 제발 다물어라. 나는 아주 친절하게 그런 의미가 담긴 표정으로 입모양까지 만들어 전달했지만, 엘렌은 바보처럼 헤실거렸다.
“후우.”
잠깐만 타임. 갑자기 터진 시한폭탄에 정신이 혼미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주옥같은 명언을 읊지 않으면 뒷골이 당겨서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어느 집 귀족 부부가 손님 앞에서 ‘우린 볼 거 다 본 사이랍니다.’라는 말을 한단 말인가.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나는 그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속내를 뻔히 읽었을 텐데도 엘렌은 아주 천연스러웠다.
천연스럽다 못해 뻔뻔해 보였다.
“오필. 혹시 피곤해? 각하,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제 아내가 피곤한 모양이라 이만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더 있을 생각은 없다.”
리카르도는 싸늘히 말하고는 자리에 일어나 응접실을 나갔다.
…엥?
나는 그렇게 아무 소득도 없이 리카르도를 배웅해야 했다. 아니, 소득이 아니라 손해만 잔뜩 본 기분이었다. 물론 빌레드를 얻게 된 건 좋지만….
응접실로 돌아와 엘렌과 단둘이 남자 나는 그를 붙잡고 말했다. 어느새 마법을 푼 그는 푸른 머리로 돌아와 있었다.
“너 나한테 억하심정 있는 거 있으면 지금 말해.”
“무슨 소리야. 오필. 내가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엘렌이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내가 야속하다는 듯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참, 말은 잘한다.
그래,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이기는 했지. 근데 동시에 저속한 부부로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고많은 말 중에 하필 ‘볼 거 다 본 사이?’”
그 말을 듣고 리카르도가 어떤 상상을 할지 생각하면 낯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아, 죽고 싶다.
“왜? 틀린 말은 아니잖아. 나는 오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는걸.”
“그럼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 것도 알겠네. 아, 됐고. 그래서 리카르도 마음은 읽어 봤어?”
“아니, 못 읽었어.”
“뭐?”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는 조금 객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공작은 뭐가 딱 가로막은 것처럼 읽히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난 내내 오필 마음속이나 구경했지.”
내 마음속이 심심하면 관람할 수 있는 구경거리인 줄 아나. 그리고 계속 내 마음 읽고 있으면서 그런 이상한 말들을 던졌다는 게 괘씸했다.
“야, 안 되겠어. 너 이제 내 마음 읽을 때마다 돈 내놔. 관람료.”
“싫은데.”
게다가 뻔뻔하기론 제일이었다. 말장난은 이제 그만두고 나는 엘렌이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너 예전에도 다른 사람의 마음이 읽히지 않은 적이 있어?”
“아니.”
“그럼 리카르도의 마음만 읽히지 않는다는 거야?”
“응. 그런가 봐.”
굉장히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내가 그였다면 ‘이럴 수가! 내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었다니!’ 하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듯 손으로 물방울이나 만들고 있었다.
혹시 이미 이유를 알고 있어서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인가?
“공작의 마음이 읽히지 않는 이유는 나도 몰라.”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 손에 자기 손을 올렸다.
“네가 강아지인 줄 알아? 관람료 말하는 거야. 돈. 너 또 내 마음 읽었잖아.”
나는 손을 빼곤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돈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엘렌은 ‘이런 돈벌레를 보았나.’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와, 오필. 정말 너무하다. 얼만데?”
“1만 실링.”
한화로 말하자면, 500만 원이었다. 엘렌은 그런 큰돈을 들고 다니면 도둑맞는다고 말하며 기겁했다.
“리카르도의 마음이 읽히지 않는다고 했지?”
“응.”
“그럴 리가 없는데. 소설 속에서 너는 리카르도의 마음을 읽어서….”
“읽어서?”
읽어서 아일라를 중간에 두고 개싸움을 하거든, 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말을 흐렸다.
가만 생각하니 그 당시엔 별생각 없이 읽었지만, 소설 설정이 조금 막장이었다.
아무렴, 리카르도와 결혼 계약을 맺은 아일라를 엘렌이 좋아한다는 건 좀 위험한(?) 구도가 아닌가. 아무리 서류상 부부라도 그녀는 유부녀였는데.
“진짜 그렇게 생각해?”
“관람료.”
“인편으로 보낼게. 그래서, 오필은 유부녀한테 흑심 품는 사람은 싫다는 거지?”
“…딱히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긴 하지.”
‘그래, 그렇구나.’ 하고 웃는 그의 얼굴이 유독 밝고 기뻐 보였다.
대체 왜 어느 구석에서 기분이 좋아진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역시 저놈은 또라이가 틀림없다.